“그는 3040의 삶에 투영된 희망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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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040의 삶에 투영된 희망의 존재였다“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4.10.29 23: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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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듣는 세상] 9. 내 인생의 롤 모델 ‘마왕’ 신해철을 떠나보내며...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앞서갔던 음악성’을 보여준 인물이자, 2000년대 이후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정치 및 사회논객 활동을 하기도 했던 ‘마왕’ 신해철이 지난 27일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망 소식 이후 30대와 40대를 중심으로 애도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근 몇 년 사이 타계한 뮤지션들 중 이렇게 추모 열기가 뜨거운 적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입니다.

어릴 적 저 역시 그의 음악에 위로를 받고 많은 영향을 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무한궤도부터 시작해 솔로 활동 그리고 넥스트를 거치며 보여준 음악은 그야말로 ‘진보’, 영어로 ‘Progressive’ 그 자체였습니다. ‘그대에게’부터 시작된 그의 8090시절 히트곡은 ‘도시인’, ‘인형의 기사’, ‘날아라 병아리’, ‘Money’ 그리고 1차 넥스트 해체 시기였던 1997년 발표된 ‘해애게서 소년에게’, ‘Hero’ 까지 언제나 ‘다른 가수보다 적어도 한 발은 앞서간’ 행로를 보여 주었죠. 어쩌면 그의 음악적 공로는 서태지보다 더 우수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서태지가 서양의 인기 음악장르를 국내 가요에 가장 성공적으로 도입한 경우라면, 이미 들어와 있는 음악들을 조합해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는 점에서는 더 그 공로가 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인천in] 기자를 하기 전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던 경향신문 주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도 오른 넥스트의 [The Return Of N.EX.T Part I - The Being]은 당시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전례가 드문, 키보드 사운드를 중심에 놓는 헤비메탈 사운드의 독특한 아우라를 발산했으며, 뒤이어 발매한 [The Return Of N.EX.T Part II - World]에서는 록과 테크노, 펑크(Funk)와 국악을 하나로 접목하는 대단한 실험성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의 다른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신해철은 제게 가수 이상의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이미 프로 밴드를 하고 있던 제게 ‘신해철’이라는 세 글자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저런 사람이 되겠다”라고 마음먹게 만든, 소위 ‘롤 모델’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히트 넘버 ‘Money’는 제게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 큰 의미가 있는 곡이었죠. 당시 18세였던 저는 어른이 되어서도 돈을 쫒지 않는 삶을 살고자 했고, 지금도 그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소싯적 음악을 하다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잡지 기자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쭉 기자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돈에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은 제가 자부하는 삶의 긍지입니다. 소위 ‘중앙언론’에서 취재를 했던 적도 있었고, 때문에 최근 지역 언론인 [인천in]에 입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선배 정도 경력이면 더 좋은 언론사 가서 편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월급도 많이 못 받는 곳에 가서 고생을 사서 하려느냐”는 핀잔을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넥스트의 ‘Money’를 들으며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렸고, 지역 언론을 통해 이루려 하는 제 꿈을 위해 오늘도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삶의 방향이 사실, 모두 그가 리더로 있던 넥스트의 곡, ‘Money’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10대와 20대 시절의 제게, ‘신해철’이라는 존재는 최고의 우상과도 같았고, 가수를 넘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진정한 ‘인생 선배’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정치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논객으로서도 그는 비교적 훌륭했습니다. 특히 100분 토론에 ‘체벌 반대’의 패널 자격으로 나온 그의 발언은 가히 압권이었죠. 학교 체벌 반대 입장을 밝히며 “공부하는 기계로 살아라, 고 3에게 1년 동안만 죽었다고 생각해라 등등을 강요한다며 학생들의 인권과 판단을 짓누르는 교사들이, 체벌에는 너무나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며 교사들을 직접 비판했습니다. 이에 체벌을 찬성하는 교사가 “학생들과 합의 하에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으로 매를 들었다”고 말하자 “제가 새벽에 진행하는 라디오에 선생님 제자들이 ‘이 선생님은 넓은 주걱형의 매를 들며 눈 밑 부분을 잡아당기신다’라는 제보를 했는데 그 학생들이 합의했다는 말 안 하던데요”고 하며 교사를 당황시킨 부분은 통쾌한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그 발언 이후 기성세대들에겐 소위 ‘완벽한 X싸가지’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후 그의 달변에 반한 100분 토론의 제작진은 그를 소위 ‘단골 패널’로 자주 초대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가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 중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나간 횟수로는 그를 능가했던, 아니 비슷하게라도 따라온 사람조차 없었죠. 그는 이후 100분 토론의 제작진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최고의 비정치인 논객’ 1위에 꼽히기도 했는데 이는 인기 진보논객인 진중권 동양대교수보다도 더 높은 지지율이었습니다. 또한 정부 부처에서 노래 가사에 딴죽을 거는 부분에 대해 “동방신기, 비의 노래를 유해매체로 지정하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청소년들이 보기에 모범적인 모습이 아닌 국회를 유해단체로 지정해 뉴스에서 못 보게 해야 한다. 국회가 진정한 ‘19금’이다.”라고 말해 정치인들을 뜨끔하게도 했죠. 요즘 열풍이 불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시청률에 쫓겨 PD가 바보가 돼서 만드는 프로그램”이라는 주장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고요.
 
신해철의 장례식장. 영정 사진에서조차 그는 당당한 아우라를 뽐냈다. ⓒ인천일보

그런 그 역시 정의가 죽는 모습에서는 한없이 슬퍼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미군 탱크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미선, 효순 양을 위한 추모 곡을 만들고,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임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압력에 몸을 던져 세상과 이별한 슬픔에 추모 콘서트를 찾아 무대 위에서 한없이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는 부조리함이 정의를 누르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죠. 세상살이에 힘든 청년들을 위해서는 “무슨 꿈을 꾸는지에 대해 신은 관심을 두지 않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 꿈을 이룬다는 성공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할 것이다”라며 “지금 네가 행복하니?”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라 조언도 해 주는 카운슬러의 모습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전사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순수한 모습도 여러 번 봤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열린 록 페스티벌인 [2006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이었죠. 그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에서 이런 무대가 열리고 내가 여기 오르다니 정말 꿈만 같다"며 어린아이처럼 웃는 순간, 저는 '마왕'의 아우라가 아닌 '휴머니스트'로서의 그와 마주할 수 있었고, 그가 지었던 환한 미소를 저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저와 같은 30~40대들의 삶은 그전 세대의 삶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인생의 과제들을 풀어야 합니다. 그런 세대들에게 신해철은 단순한 가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래 가사를 통해 건강한 사회비판은 물론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 등을 표출하며 이 세대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대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의 잘못된 생각과 정책,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자본의 논리와 부조리 등에 맞서 음악을 무기 삼아 온 몸이 부서져라 고군분투했습니다. 논란 속에서 이미지를 깎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사회를 위해 총대를 메었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용기 있게 피력하는 진정한 논객이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선/후배 가수들은 물론 대중문화계의 논객들과 손석희, 문재인 등 정/언론계 인들까지 조문을 하고 애도의 뜻을 표시하는 등, 한국 사회 주요 인사들이 모두 안타까움을 내비치고 있으며, 시간을 정해 조문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시간 당 수천 명의 팬들이 장례식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안 그래도 어렵게 살고 있는 현재의 30~40대들에겐 자신의 젊은 시대 자체를 도둑질 당한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이후 저를 비롯한 그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처럼 ‘상실의 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저 역시 월요일에 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손이 덜덜 떨린 것은 슬픔의 기운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지표가 됐던 스승이자 롤 모델이었고, 저를 대신해서 이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동료를 한순간에 허망하게 잃은 듯해 슬픔을 넘어 공포감이 찾아왔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먹먹한 마음에 이 글은 물론 다른 기사까지 쓰기가 사실 힘이 들고, 자판을 치면서도 연신 눈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불귀의 객이 된 그를 보내주어야 하는데, 제 마음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지 아직 보내주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현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말해야겠군요. 살아생전 그의 평소 목소리처럼 나직하게 되뇌려 합니다. 잘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리 해야 하겠지요?

“안녕, 나의 진정한 우상. 마왕.”


N.EX.T - Money (1996년 공연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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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2014-10-31 09:49:21
기사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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