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한 위로 - 네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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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위한 위로 - 네 잘못이 아니야!
  • 이정숙 선생님(인천교육연구소)
  • 승인 2014.11.12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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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인천교육 미래찾기](74)

사진출처=EBS홈페이지

김샘은 언젠가 TV를 보다가 일명 <달라졌어요> 시리즈에서 교사 관련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언듯언듯 예고 방송이 나오거나 관련 내용을 접하게 될 때마다 약간의 저항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채널을 돌려 외면해왔었다. 뭔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장면에 꽂히게 되어 그 모든 불편한 감정을 뒤로 하고 열심히 몇 편을 보기 시작했다. 출연한 교사들의 진정성에 감동받기 시작하면서 ‘도대체 이 교사들은 얼마만큼 용기가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용기와 진정성에 아무 것도 안 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뭔가 내부에서 찜찜한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게 뭘까?
 
김샘은 그 프로그램의 이야기에 좀 더 관심이 가서 자료를 얻고자 인터넷 기사와 그 기사들에 달린 댓글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감동받았다는 사람들의 댓글을 본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이 내용에 대한 감동과 함께 교사들에 대한 맹비난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교육부 장관이 바뀌고 교육감이 바뀌어도 역시 교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교실은 바뀔 수 없다’는 의견을 접한 순간에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교사들의 용기와 진정성보다는 학교교육의 부조리함, 교실의 그 엄청난 부조리한 현실을 모두 교사 탓으로 돌리고 있는 사회의 시각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교사와 사회의 관계를 이간질하는데 이 프로그램이 혁혁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김샘은 어쩌면 이런 점이 이 프로그램이 불편함으로 다가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일 정말로 프로그램의 출발 시각이 모두 ‘교사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이런 ‘문제상황’이 벌어진 것은 모두 ‘교사인 네 탓’이었기 때문에 교사가 정신차리고 잘하면 다 잘될 것이란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 사회는 좋은 교육을 하기란 요원할 것이다. 교육은 교사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사회문화적인 거대한 압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사회가 이렇게 까지 교사를 불신하게 된 것일까.
 
진보교육감의 공약사업 때문인지 요즘 혁신학교에 대한 관심이 인천지역에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김샘 역시 그간의 교육이 교육의 본령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싶어 관련 서적을 읽고 관심 있게 각종 연수와 관련 학교상황을 눈여겨보았다. 이미 혁신학교를 추진한 바 있는 각 학교샘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과정을 발표할 때에는 그 선생님들의 노고와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게 다가왔다. 감동의 물결이 여지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연수를 들으면 들을수록 전에 느꼈던 <달라졌어요>시리즈를 접한 불편함이 다가왔다. ‘아, 내가 문제였구나. 교사의 헌신이 저렇게 훌륭한 결과를 낳을 수 있구나. 하지만 나는 저렇게 할 수 없겠다.’하는 생각이 더욱 더 들기만 했다.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오면서 김샘은 교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지에 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사회운동가들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교육이 여기까지 왔다. 정상적인 교사의 모습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도 없고, 마치 척박한 땅에 물 한 양동이를 부어 숲을 만드는 개척자의 헌신과 노력을 요구한다. 김샘은 여전히 불편했다. 교사도 자신의 아이를 기르고 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의 한 개인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얼마나 교육이 피폐해졌으면 교사를 ‘전사’로 서게 하는가. 김샘은 그 감동과 공감에도 불구하고 순간, 이 사회가 교사들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을 접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샘은 며칠 동안 학교폭력의 문제로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생각났다. 아이들 간의 소소한 다툼이 한 불안한 가정을 가진 학부모의 권력으로 회오리 태풍을 만난 사건이었다. 아이가 스트레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는 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그게 교사 탓이었라고 한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였다. 아이들끼리의 왕따를 시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교사가 이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며칠 동안에도 자꾸만 쓰러지며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아이를 집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학교에 보냈고 담임샘과 반 아이들은 쓰러진 아이들 힘겹게 업고 5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학교 보건실에 있는 아이를 위해 선생님들은 전담시간마다 아이를 찾아가 개인 레슨을 해주고 보건교사는 점심시간마다 밥을 날라다 주었다. 그 담임샘은 매일 쓰러지는 아이를 부축하고 업고 다니느라 수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반 친구들은 같이 놀아준 죄로 그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여러 번 사과를 해야 했다. 아이는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생각하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다. 엄마가 아니었다. 불안한 가정사가 아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자신에게 문제의 본질이 있음을 그 아이의 엄마는 알까. 자기 아이가 정작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그리고 진정 아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을까?
 
만만한 학교에 민원은 계속되었다. 한 아이가 친구들을 괴롭혔다. 한 학기 동안 괴롭힘을 당했는데 왜 선생이 그것도 모르냐고 할머니 고모 삼촌 부모가 다 쫒아와 경찰에 신고를 하고 교사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그 부모는 그 긴 시간 자기 아이가 괴롭힘을 당한 걸 자신들이 정작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교사는 긴 시간 동안 괴롭히는 아이를 상담하고 달래고 그 부모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전문기관에 의뢰 중이었다. 그리고 정작 아이들은 또래들끼리 잘 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모가 개입하여 문제를 확대시키고 그 아이들끼리는 서로 소원하게 되었고 교사는 문제교사가 되었다. 부모들은 아이를 방치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면서 그 모든 소소한 책임은 학교 탓이고 교사 탓이다. 아이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동안 몰랐냐고 조심스레 반문이라도 하게 되면 학부모 대부분은 “바빠서”였다. 부모도 바빠서 모른 일을 학교가 알아야 한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 중 교사의 책임이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부모는, 사회는 그저 책임을 교사에게 떠넘기기에 바쁘다. 학교는 아무 힘이 없다. 학교는 부모가 아이를 방치하거나 잘 못한 책임을 묻을 수 없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학교에 와서 더 위험한 칼들을 아무렇게나 휘두른다. 그 칼에 자신의 아이가 다치고, 끝내 망가져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교사들을 잡아뜯는 모진 현실 앞에 속수무책으로 교육이 집밟히고 있다. 교사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라고 수요자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관리자들까지 가세하여 문제가 생기면 ‘교사의 무능탓’으로 교사를 몰아가고 있다. 점점 폭력적이 되어가고 버릇이 없어져 가는 아이들을 그래도 기꺼이 내 책임이라고 껴안고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 제발 그것은 ‘너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해 주면 안 될까. 학력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아이들을 다그치고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는 살벌함으로부터 아이들을 막아보려는 많은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누구나 교육을 말하고 있지만 교육이 진정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지 합의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 이 사회가 아무렇게나 던진 돌에 맞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교사들에게 꼭 이 모든 책임이 실은 ‘네 탓이 아니라는 위로’를 줄 여지는 정말 없을까. 교육의 혁신을 꿈꾸는 교사들에게 우선은 작은 위로가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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