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도의 새우 파시(波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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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도의 새우 파시(波市)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4.11.14 0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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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8
 
울도 전경

“새우 중에서 됫대기(돗대기, 뎃데기)가 있는데 껍질이 두껍고 오래 살아요. 김장할 때 많이 써요. 요즘사람들은 살아서 펄펄 뛰는 거 좋아하잖아요? 됫대기 새우는 오래 살고 팔팔 뛰는 건데 실제로는 껍질이 두꺼워 참젓보다 맛이 없어요“ 김상식(77세)
 
울도는 인천에서 덕적도까지 가서 다시 덕적도에서 나래호를 타고 뱃길로 이동을 해야 갈수 있는 섬이다. 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울도방파제를 만나는데 옹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태풍이 오면 주변의 선박들이 울도 항으로 피항한다.
 
울도 방파제
 
방파제가 끝나는 지점에 덕적초등학교 울도분교가 있다. 울도분교는 1989년 폐교되었다.

“울도방파제를 건설하기 전에는 학교운동장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공부를 하다 말고 바로 10m 정도 뛰어가서 수영을 했지요”(문송배).

그야말로 울도 바다가 학교운동장이었다.
 
울도 분교
 
일제강점기 시기 울도 어장은 동해의 청진어장과 함께 2대 지정 어장으로 새우가 유명했으며 1940-50년대는 젓새우 파시(波市)가 열렸다고 한다.
 
울도 지도

이 섬에서 나고 자란 김상식 어르신(77세)을 만나 울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기는 새우가 유명했어요. 일제강점기 시기 큰아버님(김일순씨)이 36년간 마을 이장을 했어요. 큰아버님이 여기서 안강망어선 2척을 가지고 새우를 잡아 말려(말린 새우를 건하(乾蝦라고 함) 중국에 수출하셨죠. 나는 어릴 때 새우 잡아다 가마솥에 바로 쪄서 말리고 하던 기억은 나요”

“현재 마을 입구 노인정 있죠. 노인정 옆으로 보면 새우를 잡아서 가마솥 걸어놓고 찌던 곳이죠. 또한 거기에서 안강망 그물은 면사라서 튼튼하게 하려고 어망을 가마솥에 삶아서 물들이잖아요. 지금은 가마솥은 없어요”
 
[매일신보] 1931.9.16자는 울도의 새우를 ‘경기도의 주요 수산물’로 소개하고 있다. [매일신보] 1933.11.08.일자에 “울도 어장은 지금이 한철로 3백여 척이 조업하여 어획량이 12월 중순경까지 평년의 3배인 15만 환을 기록할 모양인데, 만주국(일본이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 국가)에 신 판로를 엇은 관계로 시세도 평년보다 3-4배 폭등 하고 풍년을 맞이하여 중국 청도, 대련, 만주까지 수출하였다”고 기록했다.
 
[동아일보] 1939.6.9일자는 “인천수산시험장에서는 새우의 산지로 유명한 인천 근해 덕적도 울도 부근에서 새우의 성어기를 맞이하여 각지의 새우잡이배로 일대호화판을 이루고 있다. 이에 수산시험장으로서는 새우의 신보고(寶庫)를 탐험코자 수일 전부터 울도 근해를 항해를 하다 귀환했는데 울도 서측 굴업도 근해가 풍어의 보고로 보고 있다고 하며 어획은 울도 보다 3-4배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보도하였다.
 
“1930년 중반에 울도 주민 문성재씨가 새우(白鰕)어장을 발견했지. 주민들은 울도 어장에서 새우를 잡아서 중국 청도, 대련 등지에 수출했지. 중국 사람들이 풍토병 때문에 새우를 꼭 먹어야 한다고 해서 많이 수출했었지. 마른 새우로 만들기 위해 울도, 백아도, 장부도, 지도 등에 건하장(乾蝦場;새우를 말리는 곳) 있었는데 해방 이후 폐장됐지. 이 새우 덕분에 덕적도 경제가 매우 좋아서 외국으로 유학한 학생이 육지보다 많았지” (덕적도 송은호, 84세)
 
1952~1955년까지 새우 어획량을 비교해보면 경기도가 전국대비 평균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1957년에는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자료 : 한국수산물어획고표
 
“새우는 음력 5월에 잡은 것은 ‘오젓’, 음력 6월에 잡은 것은 ‘육젓, 음력 8-9월엔 ’추젓‘, 음력10-12월까지는 ’동백하‘를 잡았어요. 그중에서 새우는 육젓이 제일 최고로 치지. 그전에는 새우는 품질이 좋았어요. 지금은 그런 새우 없어요. (김상식)
 
새우젓을 주로 생산하던 시절의 울도, 문갑도 등의 새우젓 생산자들은 충남 당진?서산?홍성 등지로 내왕하면서 새우젓을 판매하면서 쌀 등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상인들이 주로 다니는 곳은 큰 포구와 작은 포구로 나누어지는데, 평택?아산?줄포 등 큰 포구에서는 객주가 상인으로부터 새우젓을 모아서 도매로 판매하였다. 반면에 작은 포구인 예산 구만포, 아산 선장, 서산 거문도리, 창금 대산, 예산 서두물, 거문돌, 귀양도에서는 새우젓이 소매로 거래되었다.

새우어장이 흥성할 때는 덕적도 생활권은 주로 경기도 서남부와 충남 북부 해안지방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다음 표는 1920~1950년 울도의 통혼권이다. 남자 통혼권은 리내 타리(11명)가 가장 많고, 군내 타면(3명) 순으로 나타났으나, 도내 타면(2명)과 충청권(0명)은 적었다. 여자 통혼권은 리내 타리(1명)만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식민지시대 및 6.25 이전에 충남과 통혼기록이 극히 적게 나타난다. 이른바 시장(市場)권과 통혼(通婚)권이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새우젓은 조선 초에 특산물로 궁중에 공물로 진상되었는데,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서해안 음식문화권’의 양반가의 일상 음식으로 거래되었다. 19세기 새우젓 제조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젓새우는 주로 해선망으로 어획하였다. 새우젓 제조용 배는 주로 해선(?船)(배에다 소금과 독(항아리)을 준비하고 있다가 어획물을 직접 젓으로 담그기 때문에 ‘젓담그는 배’라는 의미에서)이라고 불렸다. 해선망은 자루 모양의 그물 2개를 어선의 양각축(兩舷側)에 긴 말뚝 매달고 조류를 따라 이동하다가 그물에 들어오는 어류를 잡는 어망이었다.

어획된 젓새우는 잡어를 선별하여 소금물에 세척하고 소금을 살포하여 혼합한다. 이때 젓새우에 첨가되는 소금의 양은 어획시기의 기온이 높고 저장기간이 길수록 많았는데 특히 중국산 소금(支那鹽)의 경우 소금의 혼합 비율이 높았다. 젓새우와 소금을 혼합한 후에 선상(船上)에서 옹기에 담았다.

19세기에는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새우젓 생산이 증가하여 유통의 발달을 통해 새우젓이 서민의 일상식(日常食)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새우젓 수요는 쌀의 주식화, 김치의 발달을 통해 증가하고 있었다. 쌀이 주식화 되면서 새우젓은 단백질?무기질?염분의 공급원으로서, 감칠맛으로 식기를 돋고 소화를 도우면서 부식으로서의 비중이 커졌다. 김치의 발달은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김치 발효원으로서 새우젓이 쓰이면서 수요가 늘어 궁중과 양반들만이 아니라 민중의 일상식으로 정착시키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새우젓이 대량생산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를 기점으로 새우젓찌개 등 새우젓을 이용한 음식이 다양화되었고 신분에 관계없이 김치가 일상 음식의 기본적인 찬이 되면서 중부지역의 김장에 새우젓을 사용하였다. 새우젓이 김장에 쓰이면서 고춧가루도 함께 김치의 저장기간을 늘려주어 서민들의 월동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안정윤, 19세기 서해안지역의 새우젓 생산이 식생활에 미친 영향, 중앙대대학원, 2002).
 
늦봄부터 초여름에 잡히는 아주 작은 새우로 담근 자하젓(곤쟁이젓), 초가을에 잡히는 어린 새우로 담근 자하젓(紫鰕? 자젓, 감동젓), 9월에 담근 엇젓, 돗대기 새우로 담근 돗대기젓(됫대기젓, 뎃데기젓), 중하로 담근 중하젓, 전라도에서 나는 아주 작은 보라색 새우로 담근 고개미젓도 있다([뉴스천지], 2014,05.19)
 
자하젓(곤쟁이젓)의 유래 조선 중종 때 남곤과 심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남곤과 심정은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사람들로 '곤쟁이젓'이란 '젓 담아 버릴 사람'이라는 비난이 담긴 말이라 한다.
 
“그 후로 새우가 잡히질 않자 꽃게를 시작했어요. 70년 중반 넘어서 울도 사람들이 꽃게를 제일 잘 잡는다고 했고 그때 수입이 괜찮았어요."
“요즈음은 전라도?충청도 배들이 와서 새우 잡아요. 봄가을에 울도 앞바다에 닷을 내리고 동백하(음력 12월 잡는 새우) 끝날 때까지 해요. 옛날에 비하면 새우가 별로 없어요” (김상식)
 
고기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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