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영컬럼] 우리 시대의 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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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컬럼] 우리 시대의 설국열차
  • 지창영 시인, 번역가
  • 승인 2014.11.1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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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평화도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이런 문이 아니라, 이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야.”
 
2013년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설국열차>(감독 봉준호)에서 남궁민수(송강호 분)는 열차의 벽을 가리키며 그 쪽으로 나갈 것을 주장했다. 갖은 억압과 설움을 당하면서 죽지 못해 살던 꼬리칸의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호화 생활을 하는 앞칸을 차례로 점령하고 마지막 엔진 칸에 진입하려는 순간에서였다. 엔진칸의 문만 열면 열차를 장악하게 되는데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민수가 문 열기를 거부한 것이다. 민수는 그 대신 열차의 벽을 가리키며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제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쪽 바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폭동을 이끌어 온 커티스는 민수의 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면 얼어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18년간 그랬으니까. 그러나 민수가 밖으로 나가자고 주장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관찰한 것이 있었으니 추락한 비행기였다. 10여년 전에는 얼음에 완전히 덮여 꼬리 날개만 살짝 보였는데 이제는 몸통과 앞날개까지 확연히 보였던 것이다. “눈과 얼음이 줄어든다 이 얘기지. 즉 녹고 있다.” 민수는 추가로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그만 둔다. “그리고 최근에 말야, 내가 무얼 봤는지 알아?” 그러나 민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가 하려던 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한다. 곰, 그는 살아 있는 곰을 본 것이다. 열차 밖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와중에 그는 생명을 본 것이다.
 
앞칸의 미국과 꼬리칸의 북코리아
 
영화의 이 장면들은 최근 수 년간 북코리아와 미국의 대결 양상을 비유하기에 매우 적절하다. 세계를 하나의 열차로 치환해 본다면 맨 앞칸에 있으면서 다른 모든 칸을 지배하는 것은 단연 미국이었다. 영화 속에서 앞칸에 저항하여 머리를 쳐들면 여지없이 보복과 처참한 살육이 따른다. 세계의 현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테러범을 잡는다는 핑계로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고 대량살상무기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 이라크를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와 여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많은 난민이 속출했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든지 마음만 먹으면 쥐락펴락할 수 있는 미국이 쉽게 건드리지 못한 단 하나의 나라가 있으니 북코리아다. 자본주의 체제가 스며들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중국도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흔들릴 때에 북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북이 의지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다가 기후마저 사나워져 식량은 바닥나고 수많은 인민이 굶어죽어 갔다. 1990년대 중반의 일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다. 이 시기 동안 북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하나는 미국의 체제에 편입되어 순종하고 사느냐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느냐였다.
 
후자를 택한 북은 곧 망할 것이라는 세계의 예측을 깨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게 되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 북은 급기야 핵무기를 개발하여 배비하게 되었으니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핵 강국의 독점물로 여겨져 왔던 최강의 무기를 손에 쥔 것이다. 대륙간탄도탄을 구비하고 위성 발사까지 성공한 북에 대하여 미국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은 미국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꼬리칸의 사람들이 앞칸을 향하여 전진하듯이 북은 미국을 겨냥하여 일심으로 전진해 왔고 영화의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이제 맨 앞칸의 점령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패권을 두고 대결하는 북-미 사이의 미묘한 기류
 
그 사이 세계는 어떻게 변화됐을까? 부시 집권 당시 이라크 다음으로 미국이 손볼 나라는 이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으니 북의 핵무장에 이어 이란이 핵개발을 단행함으로써 이스라엘도 미국도 이제 함부로 이란을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이란의 군사력 강화와 핵개발에 북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때 북은 중동 패권을 두고도 미국과 대결하게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힘의 변화 사이에서 북은 어떤 면이 달라졌을까? 영화 속의 민수가 바라보던 예리한 눈으로 주시하면 달라진 점을 알 수 있다. 북은 전례 없이 대화 공세를 강화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한다. 세계가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대국의 체면 상 하루아침에 북과 친해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리한 관찰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AP통신사가 서방 언론사 최초로 평양에 지국을 개설했다. 2012년 1월 16일의 일이다. 그 이후 AP는 북에 대하여 비교적 객관적인 내용을 보도해 왔다. 2014년 11월 16일자 연합뉴스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AP 평양지국은 북의 허가를 받아서 장거리 취재를 했다고 한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북은 미국과의 대결 속에 상시 전시체제나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해 왔고 보안을 이유로 외부의 접근을 상당히 제한해 왔다. 그러던 북이 이례적으로 융통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12년 4월 7일에는 미국 정부의 대북 특사가 탑승한 보잉 737기가 비밀리에 평양 순안공항으로 들어갔다. 북의 인공위성 발사가 예고되어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비밀리에 들어가려던 것이 언론에 포착된 것은 우리 영공을 통과하던 특별기가 항공관제센터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였다. 이에 관한 정황은 <디펜스21> 김종대 편집장의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http://defence21.hani.co.kr/24705).
 
급한 쪽이 먼저 움직인다
 
급한 쪽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상식이다. 미국은 북의 인공위성 발사를 막고 싶어 갖은 구실을 붙였으나 끝내 막지 못한 상황에서 발사 날짜는 코앞에 닥쳐 있었다. 미국은 급한 나머지 특사를 평양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으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은 북의 핵개발도 인공위성 발사도 실질적으로는 막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언론을 통하여 북을 제재한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실은 북이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이 또 한 차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것은 2014년 8월 16일이다. 그 시기가 또한 미묘하다.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이 시작되기 이틀 전이다.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에 대하여 북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반발하면서 대규모 상륙훈련 등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 고위 당국자들의 평양 방문 후 어쩐 일인지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이 전례 없이 조용히 지나갔고 일정도 단축되었다. 항공모함이나 전략폭격기가 동원됐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북도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미 당국자들의 평양 방문과 연결하여 판단할 때 북-미 사이에 이미 물밑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북-미 사이에 이러한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북은 파격적인 대화 제의를 계속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한 관계가 삐걱거리는 가운데에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는 선수단을 파견했고,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응원단까지 파견하려 했다. 폐막식 때는 황병서를 포함한 최고위급 3인이 전격 방남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北 최고위급 3인의 전격 방문이 가져올 중대 변화’에 대해서는 2014년 10월 6일자 <인천in>에 게재된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재론하지 않는다.
(관련 글 : [시론-北 최고위급 3인의 전격 방문이 가져올 중대 변화],
http://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m_no=2&sq=26841&thread=002001000&sec=3)
 
싸움은 말리고 흥정을 붙여라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할 것인가. 영화 속 민수의 말처럼 제3의 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열차의 앞칸을 차지하려고 싸울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신세계로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앞칸과 꼬리칸이 공동의 인식을 가지고 상생의 길을 찾으면 더 넓은 세계가 보일 것이나, 과거의 인식을 고수하면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싸움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미국과 맞장뜨고 있는 북은 언제나 똑같은 말로 호언한다. ‘대화냐 전쟁이냐 선택하라.’
 
북-미 대결 사이에 끼어 있는 대한민국이 택할 수 있는 현명한 길은 무엇일까. 우리 선조들은 훌륭한 격언을 남겨 두었으니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길이다. 북-미 사이에서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고자 애쓴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이 대표적이다. 이와 반대의 길을 걸은 대통령은 이승만이니 그는 북진통일을 외치다가 정작 전쟁이 터지자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홀로 도망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녹음 방송을 통하여 ‘서울은 안전하니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취지의 거짓말을 반복하였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북-미 사이의 막바지 결산 문제와 맞물려 우리 시대는 어느 때보다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전쟁도 평화도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 서로 대결하여 상대를 이기려고만 하다가는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 민수의 말대로 제3의 문, 즉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문을 찾아야 한다. 대결로 질주하는 열차를 세우고 증오와 미움이 눈처럼 녹아 내리는 변화된 바깥 세상으로 함께 발을 내딛어야 한다.
 
반북 삐라를 보내는 일이나 애기봉에 등탑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은 열차의 파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고 아이 둘만 겨우 빠져나와 경이로운 눈으로 신세계를 맞이한다. 우리 시대의 설국열차는 과연 어떤 결말로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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