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일기(忍冬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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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일기(忍冬日記)
  • 이창수 법인권사회연구소 준비위원장
  • 승인 2014.12.18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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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의 법과 인권 이야기] 9

사진 출처 = 쌍용차노조 복기성

김창완 시인의 “인동일기”는 독재 시대의 시련과 고통으로 살아내야 했던 시민들의 상태와 그 상태에 구애받지 않는 희망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나는 특히 ‘인동일기2’를 좋아하여 즐겨 암송하곤 한다. 나 스스로 안락함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경문이자 독재와 맞서 싸웠던 그 시대의 사람들과 의미를 늘 간직하려는 의도이다.

춥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덜 추운 사람도 있고 더 추운 상황도 있다. 이런 추운 상황에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난(飽暖)의 처지를 누리는 자도 있다. 자연환경적으로 보면 추운 시기인 겨울은 절대적이다. 모두가 똑같은 조건이 주어진다. 그러나 사회적 또는 정치경제적으로 보면 이런 추위는 생리적 상대성 이외에 구조적인 상대성도 존재한다.

며칠 동안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3일 새벽 쌍용차 평택공장의 70미터 굴뚝 꼭대기에 올라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은 훨씬 더 춥다. 지난 달 대법원은 쌍차 노동자들의 해고 무효의 희망을 냉혹하게 잘라 버렸다. 김창완 시인이 말한 ‘나무들은 잎이 없고, 시민들은 목이 없는’ 그런 상황이다.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없앤 대법원은 말도 되지 않는 허접한 논거를 제시하며 이들의 희망을 잘라냈다. 법이 가난하고 약하지만 굿굿이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희망을 잘라내는 단두대 역할을 한 것이다. 70년대의 정치적 툰두라 시기에는 시민들은 목을 움츠리며 목이 없는 것처럼 지내야 했지만, 2014년 겨울에는 삶을 꿈꾸며 희망을 일구며 살아갈 존엄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올 겨울에 쌍차 노동자들은 움추려들어 ‘목’(생명)이 없는 것처럼 굴종하지 않고 맞섰다.

다시 법원을 말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올해 최악의 판결로 바로 위 쌍차 노동자들의 해고 무효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시를 파기한 대법원의 판결을 들었다. 힘없는 이들이 법원을 통해서 삶을 보장받기는 정말 힘들다. 그 원인은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간단하다. 법원은 법적용 권한을 확정할 수 있는 독점권력을 갖고 있고, 이 권한은 법관들이 행사한다. 더 정확하게는 대법관 몇 명이서 좌우한다. 사실 법이론이라는 것이 상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상식적인 판단력을 벗어난 법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법이론 신비주의와 전통적인 관료 엘리트의 출세주의와 일제의 프리즘을 통해 이른바 근대 법률가가 배출되었기 때문에 법조의 엘리트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법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법의 영역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사실의 인정과 확인은 일반인의 상식이든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법적인 것은 무엇인가? 법적인 것은 사실상 법문을 해석하는 기술로서의 추상적인 논리체계에 불과하다. 실사구시적인 사법개혁이 없다면 사법부 또는 법관들이 국민의 편에 선다는 말은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

법원은 이 겨울 밤에 일터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꿈을 잘라냈다. 70미터 높이의 작업장 굴뚝에 올라간 쌍차 노동자들의 희망은 이제 일터에 남아 있는 동료들의 관심이다. 아니 일하며 삶을 사는 이들이 이 겨울을 함께 참아내야 한다. 굴뚝에 올라간 우리 시대, 우리 공동체의 얼굴이 자꾸 앞을 가린다. 이들이 다시 인동일기를 쓰도록 하지 말자. 이 겨울엔 나무에 잎이 없어도 되지만 더 이상 시민들이 목 없이 지낼 수는 없다. 내가 촛불이 되고 그대가 화롯불이 되고 우리 모두가 횃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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