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영컬럼] 빨개진 미륵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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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컬럼] 빨개진 미륵의 눈
  • 지창영 시인, 번역가
  • 승인 2014.12.22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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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목적’을 이유로 재단하는 데야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이미지 출처 = SBS뉴스 캡쳐 화면 
 
저녁이 깊어갈 무렵 춥고 배고픈 중이 잘 곳을 찾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방문하는 집집마다 문전박대였는데 오직 할머니 한 분만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다음 날 중은 할머니의 집을 나서면서 나지막하게 한 마디 말을 남겼다. “뒷산에 서 있는 미륵의 눈이 빨개지면 마을에 난리가 날 것이니 피하셔야 합니다.”
 
그 날 이후 할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미륵의 눈을 살폈다. 이상히 여긴 마을 청년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할머니는 있는 그대로 일러 주었다. 청년들은 할머니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다.
 
성질이 못돼 먹은 청년 몇몇이 하루는 할머니를 골려 주려고 미륵의 눈에 붉은 물감을 칠해 놓았다. 이를 발견한 할머니는 미륵의 눈이 빨개졌으니 큰일이 날 것이라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알렸다. 이를 지켜보던 청년들은 재미있다며 낄낄거렸다.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자 할머니는 홀로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폭우가 쏟아져 마을이 잠기고 할머니 말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의 줄거리다. 제목이 <미륵의 눈>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까맣게 잊혔던 저 동화가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에서는 통합진보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이 강제로 해산됐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과거에 흔히 쓰이던 빨갱이 딱지를 붙여 하나의 정당을 해산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지하혁명조직이라던 이른바 RO는 없었고 내란 음모는 조작이었다는 것이 법정에서 드러날 때까지만 해도 정당 해산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숨은 목적’이라는 창조적(?)인 모자를 씌워 그럴 듯한 논리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내세울 줄이야…. ‘숨은 목적’을 이유로 재단하는 데야 당해낼 재간이 있겠는가. 증거도 없고 당사자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숨은 목적이 있잖아’ 하고 몰아대면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 딱지는 다시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 속에서 미륵의 눈에 빨간 칠을 한 패륜아들처럼 우리 사회에서 함부로 빨갱이 딱지를 붙여 대는 이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더욱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는 적신호가 역력하다.
 
<미륵의 눈>이라는 동화는 작금의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서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재난에 대한 경고를 불신하고 조롱하다가 벌을 받는다는 면에서 그렇다. 작금 우리 사회에 재난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차고 넘친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물리적 재난도 그렇거니와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의 몰락도 어느 때보다 강하게 염려되는 현실이다. 사실 민주적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면 물리적 사고도 훨씬 줄일 수 있다. 작은 경고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의 해산 과정을 지켜보면서 드는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정말 빨갱이들이 내란을 음모해서 국가가 위태로운 것일까, 아니면 빨갱이라는 딱지를 억지로 붙여서 이 나라가 갈등에 빠지는 것일까? 정당 해산의 근거가 될 만한 증거가 없고 해산의 이유가 다분히 자의적이라는 점을 들어 나는 단연코 후자라고 진단한다. 마치 동화 속의 못된 청년이 미륵의 눈에 빨간 칠을 하듯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빨간 딱지를 마구 붙여 대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재난이 닥친다면 그와 같은 장난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당의 강제 해산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로 작동한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당은 존속하게 되고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당은 자연히 유명무실해지거나 해산되게 마련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아서 활동하는 정당을 정부가 나서서 강제로 해산한 것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위요,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짓밟은 처사다. 현정부에서 유난히 강조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가 다름 아닌 그들의 손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홍수로 망해 버린 동화 속 마을처럼 또는 성서 속 노아의 마을처럼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도 영영 침몰하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세월호는 방향타를 우측으로 심하게 돌린 상태에서 회전하다가 기울어졌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두고 도망쳤다. 작금의 대한민국, 너무 심하게 우측으로 방향을 돌린 나머지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한민국호가 침몰한다면 이 나라의 선장은 과연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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