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끼리 술 마시며 못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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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술 마시며 못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4.12.31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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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의 인천문화 관람기] 7-연극 ‘이런 미친 하늘 아래’
‘이런 미친 하늘 아래(이하 하늘 아래)’는 작가, 배우, 관객이 한 무대에서 만나는 독특한 연극이다. 관객참여형 연극은 분명 아니다. ‘하늘 아래’의 대본은 이미 주어져 있고 배우들은 약간의 ‘변수’가 있긴 하지만 연습한 대로 움직인다. 관객은 분리된 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 방석을 차지하고 앉아 가까운 곳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공유한다.

연출가 유종연은 작품의도에서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젊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반복하는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우리가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즐거워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 물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 주변의, 우리 주변의, 내 문제점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일까? 어떤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일까?”

여덟 명의 배우들은 각각 남자 2, 5, 9가 되고 여자 1, 7, 10이 된다. 둘씩 혹은 셋씩 ‘나는 아니지만 나일 수도 있는 사람’으로 등장해 관객에게 사연을 털어놓고, 동의를 구하고, 오늘을 하소연한다. 아프고 서글픈 이야기다. 그렇다, ‘이런 미친 하늘 아래’ 행복은 없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동급생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매일 얼굴을 보지만 가족이 어떤 고민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없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누가 말했던가. 고독한 현대인은 타인을 향한 위로를 포기했다. 고만고만해서 만만한 술, ‘hof’는 ‘hope’다.
 

주제는 없다.
그냥 단지 외로워서 관객들을 친구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서로 나누러 온 사람들이다.
어차피 여기 모든 이들은 혼자 사는 집에 찾아온 것이다.
이제 배우들은 작가가 알고 있는 외로움이 자신들의 외로움인 양, 관객들에게 연기한다.


지미의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라는 책이 생각났다. 2003년 금성무, 양영기 주연의 영화로도 리메이크됐다. 바이올리니스트 리우와 번역가 이브의 러브스토리. 두 사람은 벽 하나를 마주하고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서 늘 왼쪽으로 건물을 돌아 나오는 리우와 왼쪽 구석에는 귀신이 있다는 공포소설을 번역한 뒤로 언제나 오른쪽으로만 돌아 나오는 이브. 공원에서 만나 첫눈에 반하기 전까지 그들은 ‘가깝지만 먼 사랑’으로 존재한다.

상대가 바로 옆집에 사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두 사람. ‘하늘 아래’의 무대도 비슷하다. 왼쪽에 있는 의자에서는 여자가, 오른쪽에 있는 소파에서는 남자가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취직하지 못해 우울하고, 직장 내 부조리가 힘들고, 헤어짐이 괴롭고, 죽음이 아프고, 자살에 분노한다.

‘등’을 보이면 안 된다. 결점을 내보이면 안 된다. 가면을 쓰고 되도록 방긋방긋 웃어야 한다.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에서 김옥빈은 ‘가난을 등에 업고’ 나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최대 결점이다. 용기 있게 감춰야한다. 가난뿐이랴. 정상과 보통, 평범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경계 밖에 있음을 티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 ‘나와 너’를 포함한, 우리.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관객은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연극은 마치 ‘내 삶 같아서’ 빤하기만 하다. 하지만 동질감을 느껴서든 배우의 연기에 반해서든 배우와 함께 울고 웃는 관객들이 많았다. 배우를 의식하며 자리를 지켜야하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연말의 ‘릴렉스한 선택’으로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극중에서 배우들은 시종일관 술을 찾는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신다. 소주는 시늉만 하고 맥주는 ‘진짜로’ 마신다. 연극이 끝난 뒤, 배우들은 친구에게 권하듯 관객들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늘 아래’는 중구 신포동에 있는 떼아뜨르 다락에서 지난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상연했다. 백재이 대표는 처음에는 제목이 어둡고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날 ‘이런 미친 하늘 아래에도 불구하고 새 희망을 갈구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함축된 묘하게 긍정적인 힘.

을미년 새해 첫 날이다. 지난해에는 특히 아픈 일이 많았다. 올해는 속상한 일이 적었으면 하지만 행여 그렇더라도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우리’를 찾길 바란다. “이런 미친 하늘 아래에 살고 있는데, 우리끼리 술 마시며 못할 말들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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