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도 새우젓과 독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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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도 새우젓과 독공장
  • 김용구(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 승인 2015.01.0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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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 새로운 발견] 10

문갑도 마을 전경

문갑도를 가기 위해 덕적도 내렸다. 일행 중 한 명에게 물었다. “문갑도 가시유”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나도 가볍게 인사 후 물었다. “충청도가 고향이신가 봐요”. “아니요. 문갑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시유. 문갑도가 고향인 사람들 대부분 충청도 말을 사용하고 있시유”

문갑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덕적도에서 나래호로 갈아타고 가야 한다.
정류재란 때 강릉김씨 상서공파인 김명립(金命立)과 아우 명리(命理) 두 형제가 마송리로부터 소야도와 문갑도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현재 문갑도에는 강릉김씨와 김해김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문갑도는 2010년 ‘토탈 디자인 빌리지 사업’으로 돌담 쌓기, 호수공원 등을 조성하였고, 2014년 경관협정 지원 시범사업(단장:인하대 건축학과 김경배 교수)이 진행중이다. 작년 9월 26~27일에 주민들 스스로 ‘제1회 자구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문갑도 돌담
 
(자구리 축제 포스터 사진)
 
제1회 문갑도자구리축제는 문갑도 프로젝트팀이 섬의 발전방향에 대해 문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축제를 기획하였다.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잡히는 자구리라는 전어같은 생선을 소재로 하면 어떨까 제안해서 2014년 가을에 열리게 되었다.
당초 축제관련 예산 제로에서 시작해서 주민들이 서로 간의 농.수산물을 거두고 면과 군에서 도와 주어 300여명의 축제에 참가하였다.(자구리 축제 기획자 김종현 삶은 연극 대표)
자구리 : 벤뎅이와 비슷한데 맛은 전어맛이며 전어보다 가시가 연하고 맛이 좋다. 9월말 전후에만 잡힌다. 문갑도 주민들은 자구리를 잡아 말린 다음 구이로 먹는다. 
 
현재 문갑도 어촌계장 임성민(66세) 어르신을 만나 문갑도 새우젓과 새우젓 독공장에 대해 인터뷰를 하였다.

“할아버지 때 승봉도에서 문갑도로 이주해와 여기서 태어나고 학교를 다녔지. 고등학교는 인천에서 다녔어. 문갑도와 선갑도 사이, 각흘도 주변에서 새우가 무척 많이 잡혔어. 물론 소야도와 이작도, 문갑도 사이를 반도골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민어를 많이 잡았지.

당시 범선이 아침에 나가 오후에 새우를 가득실고 들어오면 즉시 소금에 절여 탱크(새우를 저장 하던 창고)에 보관했거나, 쪄서 말리기도 (말린 새우를 건하(乾蝦)라고 함) 하였지. 부두에 배가 많아 정박이 어려울 정도였고 마을 뒤편과 마을 우물가 근처와 언덕과 한월리 마을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

50년대 중반 북한에서 피난 나온 분이 한월리 해변에 새우젓 독을 만들고 가마로 생산하기 시작했지. 당시 새우젓 독공장을 운영하던 사람이 남주관 씨인데 인부들이 약 10명 정도 있었지“ -임성민(66세).
 
 
새우젓 파편과 새우젓독 가마
 
“현재 천주교성당 공소에도 독공장이 있었고 왼쪽 산 주변에 가마가 있었지. 독을 만드는 흙은 충남에서 실고 와서 물과 혼합하여 새우젓 독을 만들었지“
 

천주교 공소
 
젓새우잡이는 해선망어업(무동력선을 조류가 빠른 해역에 닻으로 고정시킨 후, 조류에 밀려 그물 안으로 들어온 고기를 잡는 어업)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데, 해선망 어업은 ‘멍터구리 배’, ‘중선’, ‘젓중선‘, ’곳배‘ 등으로 부른다. ‘멍터구리 배’라는 이름은 자체적 동력이 없어서 다른 배가 조업 장소까지 끌어다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박종오, ‘젓새우잡이 어법의 변화’, <남도민속연구>, 제 18집, 2009).
 
현재 문갑도천주교 공소회장으로 계신 김진규(70세, 전 안강망조합 근무) 어르신에 따르면 “주로 안강망 어업으로 젓새우를 잡았어요. 안강망어업은 수해와 암해로 어구를 열고 닫으며, 조류에 의해 새우가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서 잡았지. 수해는 대나무이고 암해는 참나무인데 주로 수입을 했지. 1980년대 초에는 암해와 수해는 쇠파이프로 구성 되었는데 일신제강(현, 동부제강)과 계약을 맥어 생산해서 안강망 수협에서 공급했지. 1980년 중반에는 범퍼(행글라이더 이론에 따라 물이 들어오면 위는 뜨고 아래는 가라앉는)로 구성되었지.
 
그림 : 박종오
 
문갑도 주민들은 겨울철 북서풍(높하늬바람)을 이용하여 충남 당진.서산.홍성 등지로 내왕하면서 새우젓을 판매하여 쌀, 잡곡 등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평택.아산.줄포 등 큰 포구에서는 객주가 상인으로부터 새우젓을 모아서 도매로 넘기거나, 작은 포구인 예산 구만포, 아산 선장, 서산 거문도리, 창금 대산. 예산 서두물, 거문돌, 귀양도 에서는 새우젓을 등짐을 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김진규 옹(70세)과 임성민 어촌계장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지리를 잘 몰라 ‘얼마 만큼 가야합니까?’ 물어보면 ‘잠깐 갑니다’라고 해서 가다보면 하루 종일 걸어간 적도 있다고 해. 1960년대는 배에 20드럼 정도 새우젓을 실고 인천에 있는 상회에 직접 팔기도 했지. 한번은 1975년에 내가 강화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굴을 팔러 와서 만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하지” (임성민)
 
당시 통혼권(通婚圈 :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혼인을 통해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지리적 범위)으로 문갑도 통혼권 비율(호적에 등록된 사람총수에서 지역권역으로 나눈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남자의 경우 61~70년에 13%, 70~79년에 13%로, 여자의 경우 51~60년에 11%, 61-70년 6%, 70~79년에 19%로 크게 증가한다. 따라서 남녀 모두 1960년대 이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60년대 말 문갑도에서는 새우가 잡히지 않자 1970년 초부터 꽃게조업을 시작하였다.

꽃게는 1969년 일본에 수출을 시작으로 70년대 대일 수출의 중요한 품목이었다. 당시 부천수협에서 어구, 배 구입알선, 운영자금 등을 선주에게 빌려주었다. 선주들이 꽃게를 조합에 팔면 운반선이 꽃게를 실고 인천항을 경유하여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꽃게잡이 배는 12-3명 인원이 필요하여 섬주민 만으로 부족하여 외지인들이 들어와 작업을 하게 되자 시집.장가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꽃게운반선이 인천항을 통해 교역하다보니 1970년대 이후 도내, 다른 군(인천지방)과 결혼이 증가하고 있다. 덕적면의 연혁을 보면 1914년 부천군 덕적면으로, 1973년 옹진군 덕적면으로 변경된다.
 
 
 
아마 통혼권은 1960년대는 새우젓, 1970년대는 꽃게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1967년경에 문갑도에서 새우가 잡히지 않자 아버지 배를 타고 1년 정도 전라도까지 가서 새우를 잡은 기억도 있어” (임성민)
 
한편, 1908년 발행된 『한국수산지』에는 지역별 젓새우 어장은 다음과 같다.
 
지역별 어장이름 어장 형성 위치
경기 선수 어장 강화 삼산면 배음리(어류정)에서 화동(선수)간 해역
만도리 어장 장봉도 서방외해에 위치한 동?서만도섬에서 3-4마일걸의 서방해역
용유리 어장 용유도 앞바다 1마일 해역
강화도 어장 무의도 서방 대초지도 북서방향에 형성된 어장(일명 초지도 어장)
충남 천수만 어장 보령, 서산, 당진, 태안, 홍성을 근거한 충남 서해안 지역
전북 칠산 어장 전북 곰소, 위도, 석도 부근 해역
전남 전장포 뒷불 어장 영광 낙월도에서 신안 임자도 전장포 뒷불까지 해역
안마도근해 어장 영광 안마도에서 낙월도까지 해역
비치, 허사밖 어장 신안 임자도 비치도, 허사도,외해 수역
칠발도 어장 신안 비금 칠발도 부근 해역
소귀 어장 신안 도초 우이도 근해
조도 어장 진도, 조도, 서거차도 부근 해역
 
1930년대 중반이후 울도, 문갑도, 각흘도 주변에 새우어장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울도, 문갑도 어장에서는 새우가 잡히질 않는다.

그리고 만도리, 용유리, 강화도 어장은 영종도 신국제공항 건설로, 충남 천수만 어장은 천수만의 간척사업으로 어장이 축소되고 강화 선수어장은 한강의 오염원으로 인해 어장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게 되자 인천, 강화, 충청도 지역의 배들은 서남해안(전북, 전남)까지 장기 출가 어업을 하게 된다. 서남해안의 젓새우잡이 출가 어업은 ‘구정밥 먹고 봄젓을 잡으러 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려갈 때 높새바람이 불면 동력선보다 빨리 가고, 돌아올 때는 마파람을 받으면서 온다고 한다(윤형숙, ‘강화도 젓새우잡이 어업의 발달과 변화‘, <도서문화> 34집, 2007).
 
1981년 당시 전남 젓새우 조업선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 조업선이 303척으로 강화.옹진조합 소속의 배는 100척으로 약 33%를 차지하고 있다.
 
소속 조합 톤급 동력선(척)
동력 무동력
  303 60 243
강화 10∽40톤 70 40 30
옹진 30∽50톤 30 - 30
영광 10∽20톤 73 - 73
신안 10∽40톤 130 20 110
자료: 박광순.김승, ‘우리나라 젓새우잡이 어업의 발전?전망?과제’, 한국도서연구화 제10권, 1999.
 
한편, 지역별 새우젓 생산 실적은 다음과 같다, 강화, 옹진 어장은 17.4%, 천수만 어장 9.9%, 영광어장 5.0%, 신안어장은 67.2%를 차지하고 있다. 강화, 옹진 어장에서는 5.6젓이 생산되지 않고 전남 서남해 수역에서만 생산된다. 특히 강화, 옹진 배들은 5.6젓을 잡으러 신안어장으로 장기 출가어업을 한 이유이다.
 
구분 새우젓 종류별 생산 실적
(%) 동백하젓 봄젓 5.6젓 자젓 추젓
합계 40,200 100 4,000 8,600 11,500 4,200 11,900
서해안 강화, 옹진 어장 7,000 17.4 - 1,400 - 4,200 1,400
천수만 어장 4,200 9.9 - 2,000 - - 2,000
칠산 어장 200 0.5 - 200 - - -
전남 서남해 영광 어장 2,000 5.0 - - 1,500 - 500
신안 어장 27,000 67.2 4,000 5,000 10,000 - 8,000
자료: 박광순.김승
 
신안지역 어민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 조기를 잡았지만 곧 사라지고, 1970년대 중반까지 부시와 민어가 사라지면서 젓중선(멍터구리배)을 이용하여 새우 잡이가 시작되었다.(김준, ‘파시의 해양문화사적 의미구조-임자도 ’타리파시‘와 ’재원파시‘를 중심으로’, <도서문화> 제24집, 2004)
 
1980년대 후반 서남해안 지역주민들의 어장관리, 서해안 지역의 어장변화와 어업인구의 감소, 1994년 실시된 연근해어업 구조조정사업에 따른 젓새우잡이 어선 감척 등으로 옹진, 강화, 충청 지역의 젓새우잡이 어업은 차츰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2007년 이후 만도리어장, 장봉어장, 선수어장 등 경기 북부지역의 젓새우 어장이 다시 활성화되어 가을철 강화에서는 새우가 많이 잡힌다. 지난 2013년 10월 울도를 방문했을 때 충청.전라도에서 올라온 새우젓 배들이 조업을 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강화, 연평까지 올라가서 새우를 잡는다고 한다.
 

문갑도 깃대봉에서 본 굴업도와 풀등이 보인다


문갑도 해안의 굴따기

문갑도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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