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들의 애환의 삶의 터전 <독쟁이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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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들의 애환의 삶의 터전 <독쟁이고개>
  • 디비딥 장윤석 블로거(인천in 객원기자)
  • 승인 2015.01.08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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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딥의 인천이야기] 8.

 

인하대 후문으로 나와 숭의동 쪽으로... 수봉공원에서 바로 용현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 그렇게 작은 언덕으로 많은 차들이 지나가고 ... 다닥다닥 붙은 주택과 빌라촌이 나온다.
 

지금은 돌아가신 작은 어머니댁이 있었던 용현동 이곳을 우린 독쟁이고개라 불렀다. 왜 독쟁이고개인지는 몰랐지만, 그냥 그렇게 그 작은 언덕은 독쟁이고개로 함께 했다.

 

하지만 아버지,어머니께서 기억하시는 이곳은 가난한 동네였다. 해방과 6.25전쟁 전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피난민들이 몰려든 곳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피난을 온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하인천 만석동과 북성동 등지에서 살았다가, 두 부류로 나뉘어 서구 경서동과 수봉공원 밑 독쟁이로 터를 잡았다. 원주민들이 얼마 없었기에 새끼줄만 치면 자기땅이었다고 한다.
 

 

인천시 남구 용현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우리 말의 어원과 변천, 그리고 쓰임새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다.
 

동네 이름은 용정리 앞바다에서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는데, 지척인 인하대학교는 용을 대학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용은 상징동물이고, 캠퍼스는 용현벌이라고 불린다. 캠퍼스 내 작은 호수인 인경호는 용이 나왔다는 곳이다.

 

'용현'이란 이름의 유래와는 달리 지금도 용현동 일대를 '독쟁이' 또는 '독쟁이고개'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독짓는 마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다. 피난민들이 독을 구워 팔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하지만 향토지명을 연구해온 이들은 책읽는 정자가 있어 독정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옛부터 경치좋은 정자에서 선비들이 모여 독서를 하고 담론을 나누던 곳이었는데, 독정리란 발음이 어렵고 와전되면서 독쟁이로 됐다고 한다.

 


표지판에 보이는 독정이길... 독정이...독쟁이...

 

60년대 이후 인하대 주변에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인하대 주변환경이 나빠졌지만 그 터만큼은 아주 좋다고 한다.
 

선비들이 학문에 정진했던 정자가 있었다면 주변 풍경이 수려하고 한적한 여유가 넘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독쟁이는 세월의 변화와 더불어 인구 300만의 도시팽창 속에 자취를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위로 보이는 용현시장은 예전엔 전부 논이었다고 한다. 인근에 타일공장, 양계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불량배들도 많았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상우물이라고 해서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주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고 한다.


피난민들이 억척스럽게 삶을 꾸리면서 시장이 형성되었고, 인천의 재래시장 중 연륜이 오래된 용현시장이 탄생했다.


상우물 자리엔 목욕탕이 들어서고 비만 오면 흙탕물이었던 독쟁이는 30여 년만에 옛자취를 감추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독쟁이엔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유독 중국인들의 묘가 많았다고 한다.
 

인근 숭의동과 용현동에는 일제 때부터 채마밭을 일구던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고, 인근이의근교원예농업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어마어마한 빌라촌이 되어있는 독쟁이고개...

지난 척박한 삶을 살았던 피난민들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직도 서민들이 모여 열심히 사는 동네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제는 독정이라는 바로 된 지명으로 거듭난 독쟁이고개...

그 동네를 다니며 이것저것 담아보면서...지난 어린시절 동네의 향수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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