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교회, 아펜젤러 상사병의 희생자, 올링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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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교회, 아펜젤러 상사병의 희생자, 올링거 목사’
  • 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승인 2015.01.1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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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의 발굴-인천근대인물열전] 5
사진출처 = 쿠키뉴스

1. 올링거목사 

올링거목사에 관한 연구는 미국 UCLA 옥성득 교수가 예일대학교와 드루대학교 고문서실에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집필한 ‘초기 한국 북감리교의 선교신학과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토대로 간략하게 정리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올링거목사는 1845년 미국 오하이오주 샌드스키 카운티 프레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미국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던 애국심이 강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 ‘Franklin Ohlinger’도 미국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성을 본 딴 것이다. 그의 부친과 형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으로 참전하였다.

올링거는 남북전쟁 열병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회심을 체험하였다. 1865년 목회자의 꿈을 갖고 독일계 감리교 대학 German-Wallace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사회개혁적이며 복음적인 독일 감리교 교육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설교자로 미시간의 사기노와 베이시키 독일감리교회에서 2년간 목회를 하였다. 목회자로 만족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선교사로 나갈 것인가 고민하던 중 감리사가 선교사로 나갈 것을 권유하자, 1870년 중국 선교의 중심지 복건성으로 파송되었다.

중국에는 일본과 한국선교를 개척한 매클레이 선교사가 있었다. 1871년 성경학교를 볼드윈신학교, 유니언신학교로 발전시켰으며, 1874-5년 최초의 한문신문 <순산사자>를 발간하였다.

1881년 최초의 근대학교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하고 초대교장을 지냈다. 그러나 신교육의 일환으로 영어교육을 추진하였으나 영어교육을 지지하는 선교사는 별로 없었다. 1883년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자 많은 선교사들과 갈등이 깊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1887년 가을 한국 담당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당시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주로 20대 청년들이어서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 경험이 있는 올링거가 필요하였다.

올링거는 파송되자마자 배재학당 교사로 활동하였다. 1888년에는 제물포 담당 선교사로 판서인 노병일과 함께 파송받았다. 1889년에는 한국 최초의 인쇄소 삼문활판소를 배재학당 내에 설립하였다. 1890년부터 3년간 서울구역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890년 조선성교서회(朝鮮聖敎書會)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맡는 등 주로 문서선교에 집중하였다. 한국 최초의 영문잡지 The Korean Recorder을 발행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1892년 1월 The Korea Repository를 발행하였다. (사진은 The Korea Repository 5권 2호, 1898년 발행)
 
또한 <미이미교회문답> 등 다양한 전도 문서를 번역하였고, 한문 <라병론>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초대 부총무직을 맡아 이수정역본 <성경>을 반포하였고, 찬송가를 다수 번역하기도 하였다.

올링거목사는 1993년 스크랜튼 목사와 선교방향을 두고 갈등을 겪던 중 그 해 5월, 6월 두 달동안 두 자녀를 편도선염으로 잃게 되는 슬픔을 겪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양화진 묘지에 안장된 자녀의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895년 다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911년까지 중국 복주에서 인쇄소와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활동을 열성적으로 하였다. 은퇴 후 미국 오하이오 톨레토와 미시간 앤 아버에서 지내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
 
2. 올링거, 왜 내리교회 역사에 사라졌는가?
 
1923년 인천 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신홍식 목사는 <내리교회역사>를 편집하였다. 인천 내리교회의 시작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885年에 本敎會가 비로소 始作하엿는대 美國목사 월능거 氏가 京城 貞洞에 住宅을 정하고 本敎를 巡察하여 朝鮮敎人 盧丙日 氏를 파숑하여 傳道를 하엿더라.”
 
1923년 <내리교회역사>를 집필한 신홍식 목사
 
이를 근거로 인천내리교회 장로 홍기표는 <인천내리교회 90년사>를 집필하면서 신홍식 목사가 1885년 본교회가 시작하였다면 당시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교회를 처음 세웠다는 논리를 내세워 한국 최초의 공식교회라고 처음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신홍식목사가 <내리교회역사>를 집필하면서 원래 1885년 내리교회가 시작되었다면 그 당시 선교사 아펜젤러가 창립한 것인데, 월능거로 오기한 것이기 때문에 <인천내리교회 90년사>에서 이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이후 내리교회는 월능거 목사는 교회역사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초대 아펜젤러 목사, 2대 존스 목사, 3대 김기범 목사로 정하였다. 그리고 <내리교회역사>에 언급되어 있는 권사 노병일은 월능거 목사가 파송하여 전도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아펜젤러가 파송하여 전도한 것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인천내리교회 창립일은 시대마다 다르다. 오래전 개그맨 컬투의 유행어 “그때 그때마다 달라요”가 연상된다. 내리교회 100년사에서는 창립일을 7월 19일로 삼는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쌓은 제물포에서의 이 제단을 내리교회의 시작으로 삼고저 하는 바이다. 그리고 7월 19일을 택한 까닭은 그날이 서울로 떠난 날로서, 인천 체류 최후의 날이라는 점이다.”

<내리교회110년사>와 <인천서지방사1885~1997>에서는 창립일을 선교사적으로 1885년 4월 5일로 또는 오르간이 도착하여 첫예배를 드린 7월 7일로 잡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

“1885년 7월 7일에는 아펜젤러의 화물이 도착하였는데, 이 날 오래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중요한 일이 이루어졌다. 아펜젤러는 포장된 짐덩어리에서 오르간을 꺼내 한국에서의 첫 오르간 연주를 하였다. 이렇듯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머물면서 한국 사람들의 생활 수준과 의식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처지를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름을 달래기도 하였다. 스크랜튼이 20일을, 아펜젤러가 40여 일을 체류했던 인천을 선교사들의 서울 입점을 위한 단순한 통과경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특히 감리교 선교사들이 일정 기간 체류하게 되고, 항구에는 외국인의 신앙 자유지대가 있어 그 동안에 음으로 양으로 인천에서 복음이 전파된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 기록이나 정황에서 그 근거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사들이 인천을 드나들기 시작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회의 시작의 시점으로 인정하는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근거로 선교사적 교회창립일을 1885년 4월 5일로 잡기도 하고, 7월 7일 일본에서 보내온 오르간이 도착하여 아펜젤러 부부는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린 날을 인천에서의 첫 예배로 잡고 내리교회의 시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내리교회 담임목사는 언론을 통해 이런 실토를 하였다.

“내리교회처럼 설립일이 불분명한 교회는 우리나라에 없을 것이다.”

교회설립일이 불분명한 이유는 바로 내리교회 안에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내리교회가 한국 '최초교회병'과 '아펜젤러 상사병'에 걸려 내리교회 역사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내리교회 창립일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길은 있다. '한국최초교회병'과 '아펜젤러 상사병'에서 벗어나 본래 교회 창립일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1936년 3월 10일 <감리회보>에 게재된 ‘朝鮮監理敎會 略史 貳, 仁川內里敎會 一, 敎會의 創設’ 기사에 해답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主後 1888年에 本敎會가 創立되었으니 美國 宣敎師 올링거 氏가 京城 貞洞에 居住하면서 本地方을 巡察하고 또 朝鮮人 敎友 盧丙日 氏를 派送 傳導할새 當時는 大院君의 天主敎徒 虐殺事件의 記憶이 아직까지 남어 있는 때라.”

“本敎會의 歷代 牧師及監理師 1888~1889 올링거 목사, 1890년-1891년 고 亞偏薛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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