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도 위화를 존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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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도 위화를 존경하고 있었다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5.01.29 2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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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의 인천문화 관람기] 10-영화 ‘허삼관’

 
중국 문호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허삼관>은 배우 겸 감독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영화판에서 16년을 돌고 돌던 시나리오. 제작사 대표가 판권을 산 후 16년 동안 7가지의 시나리오가 나왔지만 쉽게 영화화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배우 제의였고 어느 날 하정우는 감독 제의를 받았다. "주변에서 거의 다 만류했고 하나만(배우만) 잘 하길 원했다." 하지만 ‘신인 감독’ 하정우는 70억 원 가량의 제작비가 든 제대로 된(?) 상업 영화를 만들어냈다. “내가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 현대사를 소재로, 비극과 희극을 완벽하게(?) 한 그릇에 담았다. 허삼관은 도덕과 비도덕을 적절하게 공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인 인물. 남녀의 사랑에는 말도 안 되는 도덕을 내세우면서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을 건 비도덕을 행사한다.

허삼관의 부인 허옥란이 낳은 첫째 아들 일락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안 후 허삼관의 태도는 급변한다. 속 좁고, 유치해진다.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고 허옥란을 죄인 취급하며 하녀 부리듯 대한다. 하소용과의 첫날밤을 꼬치꼬치 듣고 싶어하는 수준을 봐도 알 수 있다. 마음의 편견을 몸으로도 드러내는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남자.

하지만 이 남자에게 진지하고 무거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병에 걸린 일락이를 위해 생명의 위험까지 불사하며 피를 팔기 시작한다. 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엄청난 물을 마시는 것은 물론 고개를 숙여 피를 거꾸로 돌게 한 다음 얼굴을 '붉어'(생기 있어) 보이게 한 후 또 피를 팔러 가기도 한다. 결국 기절하고, 빼냈던 피를 다시 몸속에 집어넣어 죽음을 면하는 장면까지 오면 슬픔의 맥박은 최고조에 이른다.

<허삼관 매혈기>의 장점은 웃음 속에 눈물이, 눈물 속에 웃음이 담겨 있는 데 있다. 웃기기만 한 코미디도, ‘슬픔 쩌는’ 비극도 아니다. 소설에는 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엄청난 물을 마셔대는 모습과 불뚝 튀어나온 배가 교차되고, 피를 팔고 나서의 증상이 '그것'을 하고 난 후의 증상과 비슷하다는 농담(?)도 나온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스런 피 팔기를 육체적인 쾌락과 잇는다. 고통과 쾌락을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삶이 곧 불행과 기쁨의 공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원작에는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중국 현대사의 질곡이 담겨있지만 <허삼관> 속의 배경은 ‘지금보다 오래 전’이라는 느낌이 전부다. 공간도 명확하지 않다. 아주 시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시도 아닌 한국의 어느 마을.(한국전쟁 직후의 충청남도 공주가 배경이라고 밝힌 기사도 있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국의 역사성을 걷어내면 하정우의 <허삼관>은 위화의 ‘허삼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름도, 사건도, 해결방법도, 결말도 비슷하다. 돼지간볶음이 만두로 바뀌었을 뿐.

하정우가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역시 하정우’ 했다. 허삼관을 알다니! 위화를 알아보다니! 재미있고, 깊고, 따듯하고, 커다란 이 소설을 영화로 망쳐놓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하지 않았다. 마냥 좋고 반가웠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일부러 만족도를 낮게 잡은 뒤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말하는 뉘앙스와는 다르다. 내게 <허삼관 매혈기>나 ‘위화’의 존재감은 정말 큰데, 극장을 나오면서 알 수 있었다. 나처럼 하정우도 존경하고 있다는 걸. 영화 속 과장과 변형, 오그라듦이 지나치지 않았던 것도 하정우의 연출력 덕분이었으리라.

문화대혁명과 같은 중국의 역사적, 정치적 문제는 깨끗하게 제거하고 가장 매력적인 ‘서사’는 원작 그대로 살려 그 나름으로 ‘한 아버지의’ ‘한 가족의’ ‘한 사랑의’ ‘한 삶의’ 이야기를 이만큼 그려냈으면 됐다. ‘어느 시대’에 특히 빛을 발하는 이야기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야기’란 일상의 매 순간 탄생하는 것 아닐까. ‘툭’ 떨어지는 순간순간들을 쓸어 모아 엮고 엮으면 그게 바로 너와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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