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거리는 청년들] ③ 성장하지 못하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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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거리는 청년들] ③ 성장하지 못하는 청년들
  • 이재은 기자
  • 승인 2015.02.26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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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거부, 그 후’ 속의 빈곤 청년

 

많은 사람들이 청년세대, 혹은 젊음이 ‘내몰리고’ 있다고 말한다. 한 해 전에도 그랬고, 몇 해 전에도 그랬고, 십 년 전에도 그랬다. 세상은 쉬이 바뀌지 않고 ‘아직도’ 이 땅의 청년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대학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출발선에서 이미 탈락이 예정된 낙오자들. ‘루저’일 뿐이라며 얕잡아보는 시선들. 막연한 미래의 행복이 아닌 현재의 행복을 찾기 위해 싸웠던 열아홉의 삶들. 초졸에서 고졸까지, 그야말로 ‘허름한 학력의 소유자’인 ‘대학거부, 그 후’ 속 사연을 소개한다.

‘중졸’과 ‘고등학교 중퇴’ 사이

A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의자에 종일 앉아 있었지만 완전한 ‘내 자리’는 없었던 교실이 너무 답답했다.” 자퇴서를 낸 A씨에게 담임교사는 “너 이러면 나중에 배추장사나 한다”라는 말로 으름장을 놓았고, 그는 ‘‘배추 장사’가 어때서?’라는 말을 설득이랍시고 내뱉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대학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음악이 즐겁고, 배우는 게 좋아서 열심히 다녔는데 어느 날부터 숨이 턱 막혔다. ‘콩쿠르 나가서 상 타는 게 도움이 되겠지?’ ‘교수님에 따라 붙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A씨는 음악이 좋았지만 연주 실력으로 틀에 박힌 평가를 받는 것은 싫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방황(?)하다가 ‘인권교육센터’를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있다.

“대졸은 기본이고, 고졸은 좀 안됐지만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중졸이나 그 이하의 학력은 잘 상상조차 안 되는 사회 속에서,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중졸’로 남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대학’보다 중요한 ‘어떻게 살 것인가’

B씨가 대학을 가지 않은 이유는 대학거부가 열아홉 살인 그에게 주어진 일생의 한 번 뿐인 ‘D-DAY’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학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경험과 스펙이 필요했지만 그조차 평등하지 않았다. B씨는 왜 대학을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항상 대비하고 있는 사람, 자식이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자신들의 탓인 양 여기는 부모님의 죄책감을 늘 헤아려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게는 학벌로만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간절하게 필요했지만 사회는 오로지 ‘학벌’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서울대 간 너는 인생의 승리자, 지잡대 간 너는 인생의 패배자, 대학도 못 간 너는 낙오자’라고 이야기할 뿐, 대학이라는 굴레 속에서 다양하게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청춘’의 이미지를 곧바로 ‘대학생’으로 떠올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B씨는 소외받았다. 방황과 경험을 ‘청춘’에게 독려하는 분위기도 ‘대학생’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비싼 등록금을 내기 위해 빚지지 않고 스무 살을 시작했으니 괜찮다는 생각도 자위에 불과했다. B씨는 아직도 대학을 가야하나 고민하고 있다.


인문학 강의하는 중졸

C씨는 중졸 인문학 선생님이다. 여덟 살들과 그림책을 매개로 진행하는 인문학 강좌의 ‘책 읽어 주는 언니’를 맡고 있다. ‘교육공동체 나다’는 제도 교육에 반대하는 인문학단체로 권위적인 교육을 반대하는 강좌를 열고 있다. 특강 중에 열린 학부모 간담회에서 C씨는 자신의 학력이 중졸이라고 밝혔다. 대체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지만 한두 사람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C씨는 이제 그 부모의 자녀와는 만나지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상의 시선에서 보면 철없어 보이는 20대 초반 여자가 인문학 강사라는 건 실망할 만한 일일 테니까. 사실, 그동안 나는 뭣도 모르고 당당했다. 중졸인 게 부끄럽지도 않았고, 대학을 나와야만 인문학 강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학을 가지 않아서 불안했던 것은 내가 앞으로 돈을 못 벌까 봐, 살아남지 못할까 봐서였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까 봐는 아니었다. 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게 나를 불신하는 이유가 된다는 건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비싼 등록금”, “집안 형편”, “자유와 해방감”, “선택 아닌 강요에 편승하기 싫어서” 대학을 거부했다. 수능 당일에 마음이 바뀌어 수능 고사장 대신 교육청 앞에서 ‘대학 평준화/수능 자격 고시화’ 피켓을 든 사례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처지가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때도 많다. 그러나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마땅한 일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고3 수험생’과 ‘대졸 취업준비생’의 통과의례가 생노병사의 통과의례와 같지 않다고 외쳤다.

대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시선과 차별 속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또 다른 청춘들. “대학에 가도, 가지 않아도 불안한 우리가 불안의 실체를 마주하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전복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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