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인천 가치재창조'와 굴업도, 그리고 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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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인천 가치재창조'와 굴업도, 그리고 백범 김구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5.03.23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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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가치와 정체성은 정치적 도구의 대상이 아니다
지난 3월 10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인천만의 가치창조르 위한 열린 토론회' 모습(사진제공=인천시)
 
연초부터 유정복 인천시장이 '인천의 가치재창조와 정체성 확립'을 시정의 주요 목표로 제시해왔다. 이를 계기로 인천시는 인천의 인물을 발굴하는 한편, 인천 출신의 출향 인사들과 유명인사들을 조사해 인천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인 듯하다.

2013년 전임 송영길 시장 때도 인천정명600주년을 기념해 인천인물 발굴사업이 진행된 바 있고 조사, 연구 결과를 묶어 <인물로 읽는 인천사>라는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다. 또 정명600주년기념비가 소리소문 없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앞 광장 모퉁이에 들어서기도 했다. 

인천 출신의 신임 유정복 시장이 새해 임기를 시작하면서 '인천 가치재창조와 정체성 확립'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실은 무척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지난 십수년간 인천의 시장님들이 인천의 정체성과 가치를 돌보지 않고 발전담론에만 기대 개발위주의 정책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 시장이 강조한 인천의 가치재창조와 정체성 확립은 기실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되고 연구돼온 바탕 위에서 꽃필 수 있는 것이다. 인천이라는 도시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섬세한 조사와 연구에 바탕해 추진해야 하며 현실의 정책으로 구체화할 때는 매우 섬세한 정책적 고려가 수반되야 하는 것이다.

인천 가치재창조라는 시정구호가 마치 전혀 새로운 담론처럼 인천시 각 부서와 산하기관들이 나서 토론회를 열고 부산하다. 그러나 토론회에서 유 시장이 주로 언급하는 인천의 가치재창조는 '인천만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호명하고 있을 뿐이어서 우려스럽다. 이런 시각으로 과연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채 몇 달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인천 지역 도서들의 가치 재창조 담론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대기업이 소유한 굴업도를 해양관광단지로 조성해 명품섬으로 만들는 논의로 치닫는 것을 보면, 심히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대기업 CJ 이재현 일가가 섬이 97% 이상을 소유한 굴업도는 지난 수년간 골프장을 중심으로 한 해양관광단지 조성 계획을 밀어붙여 섬의 환경파괴와 사유화 논란을 빚은 곳이다. 논란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지난해 CJ측에서 골프장 개발은 안 하겠다고 지역사회에 공언하기도 했지만, 인천시가 명품섬으로 조성하겠다고 나서면서 또 다시 논란에 기름을 붓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말 굴업도를 명품섬으로 만들어 인천의 보배로운 정체성을 간직한 섬으로 만인이 공유하는 섬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심사수고해 접근해야 할 뜨거운 감자가 바로 굴업도다. 
 

굴업도의 아름다운 풍광 (사진제공=김용구)

인천 출신의 출향인사와 유명인사를 대대적으로 조사, 발굴해 활용하겠다는 시책도 마찬가지다. 인천의 특정 구에서는 메이저리그에서 잘 나가는 유현진을 구의 마케팅 대상으로 활용해 '유현진거리'를 조성한다는 풍문인데, 인천시도 도시의 내실있는 발전전략이나 소통행정보다는 인천이 정체성과 인천인물을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는 소란한 정치적 구호로 그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난 22일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와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에 남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진행한 '백범 김구 선생 발자취 따라걷기' 행사는 주목할 만한 행사라고 생각한다. 외세의 침랴과 남북 분단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받은 도시 인천에서 자주적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헌신한 김구 선생의 뜻을 실천적으로 이어받으려는 지속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는 물론 인천 출신이 아닌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은 인천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주 활동무대가 인천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범은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기록하고 있거니와, 청년 김창수가 김구로 거듭나는 사상적 전환을 이곳 인천에서 이루었던 것이다. 

조선이 강제 개항되었던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난 김구는 만 20세의 나이에 치하포에서 국모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군 토전양량(土田壤亮)을 때려죽이고 붙잡혀 인천감리서 감옥에 투옥되면서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재판장을 꾸짖으면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꾸짖는 김구를 돕기 위해 가장 먼저 강화 출신의 김주경(金周卿)이 헌신적으로 나섰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주경은 김구의 부친과 모친을 번갈아 가며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 법부대신인 한규설을 만나서, 김구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여 석방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자 김주경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풀어서 7~8 차례나 법부에 소장을 올렸다.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주경은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단율의 시 한 수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김구의 구명을 위한 김주경의 놀랄만한 노력도 소중하지만, 탈옥 후 김주경의 도움을 잊지 않고 김주경의 집을 찾아 나선 김구의 행적도 주목된다. 망해가는 김주경 집안을 찾은 김구는 김주경의 아들 윤태와 김주경의 둘째동생 무경의 두 아이들을 데리고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인근의 30여 명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료도 받지 않고 근 3개월 이상을 성심성의껏 교육하였다.
 

백범 김구와 백범기념관 (이미지 출처=백범김구기념관)

김주경 형제 이외에도 청년 김창수를 도운 인천의 인물들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김주경에 이어 단연 두드러진 인물은 인천 시천동 출신의 유학자 백초(白樵) 유완무(柳完茂)이다. 김주경이 시도한 법률적인 사면이나 뇌물을 바치는 일 등이 모두 어려운 것을 안 유완무는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모험대를 조직하여 인천항 주요 지점마다 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김창수를 구출해내는 계획을 짰다.

김구가 먼저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유생들의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유완무는 김구를 수소문하여 만나 민족운동을 도모하고자 했다. ‘김창수’란 김구의 아명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준 이도 유완무다. 유완무가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후 김구보다 앞서 북간도로 망명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살돼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김구는 유완무를 “평생 친구”라고 <백범일지>에 기록하였다.(보다 자세한 것은 졸고, ?백초 유완무의 생애와 민족운동?, <인천학연구> 10호,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9)

백범 김구과 인천과의 인연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1911년부터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14년 인천감옥으로 다시 이감되어 축항공사에 노역했던 것이다. 청년 김구는 질곡의 역사를 인천의 감옥에 갇혀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려는 뜻과 구상을 바로 인천에서 마련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때마침 2015년 6월, 인천내항 8부두가 친수공간으로 개방될 계획이다. 아무런 역사적 연구도 없는 인천대공원 구석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부터 내항으로 이전하여, 파란만장한 인천항의 역사를 굽어보시도록 하면 어떨까! 인천의 가치재창조와 정체성 확립은 이런 것부터 하나씩하나씩 풀어가야지 성과를 내기 위한 도구적 구호로 밀어부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아무런 역사적 연고가 없는 인천대공원 구석에 위치한 '백범김구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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