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떠나보낸다는 것 - 노희경 원작 민규동 감독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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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떠나보낸다는 것 - 노희경 원작 민규동 감독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이한수 선생님
  • 승인 2015.04.01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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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님의 교실밖 감성교육] 제20회


아이의 감성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시작과 끝이 모두 엄마인 걸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 하는 게 아니라 세상 일이 전부 다 마음 씀씀이(정서)에 달려 있다는 깨닫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아기는 엄마를 통해 타자(他者)를 처음 만나고 엄마를 잃으면서 비로소 철들게 된다니 엄마가 곧 나의 전부라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엄마 없이는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으며 엄마를 보내 드림으로써 비로소 내가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보면 참다운 교육은 공감이요, 공감한다는 것은 곧 엄마를 마주한다는 것일 뿐이잖습니까. 그동안 엄마(母性)를 마주하지 못해 마음이 가난한 아이들 얘기를 펼쳐 왔는데 이제 엄마를 보내드리면서 비로소 사람(人間;사람 사이)이 되는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합니다. 이타적인 사랑이 사람을 비로소 사람답게 만들 수 있는데 엄마는 제 살을 깎아 자식을 낳고 기르니 세상의 모든 엄마는 위대한 휴머니스트(인간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엄마의 자식 사랑이 가끔 자식에게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 받은 마음의 상처는 좀체 지워지지 않고 평생을 따라다니게 마련인데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만나게 되는 타자(他者)가 엄마일 수밖에 없으니 어릴 적 마음의 상처를 엄마한테서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어떻게 부모한테서 상처를 받게 되는 걸까요. 저는 마음의 상처는 본질적으로 모두 공감 부재(不在)에서 온다고 봅니다. 사랑받지 못해 상처받는다고 말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결국 공감일 테니 말입니다.

공감이 어렵게 되는 건 내 마음이 너무 앞서기 때문입니다. 조급하게 앞서가는 마음을 그냥 욕심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부모의 욕심이 자식과의 공감을 가로막는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자식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단순히 욕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가 힘겨운 짐일 수가 있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부모가 강할수록 자식은 초라해지는 게 정한 이치일 수가 있는 겁니다.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이 얼마나 힘겨울지 영화 [간디의 아들]를 보며 참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식은 애비를 죽여야만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심리학의 은유가 마음에 와 닿는 모양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위대한 게 아니라 자식에게 엄마의 죽음만큼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도 이 이치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가족 관계가 엄마의 죽음으로 비로소 아름다운 제 자리를 찾게 되는 모습이 아주 감동적입니다. 신파적으로 눈물을 짜낸다고 험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눈물짓는 이야기에는 법칙과도 같은 이치가 깃들어 있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구성상 허술한 구석은 차치하고 근본 이치를 눈여겨보았으면 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부재(不在)가 존재(存在)를 일깨운다는 이치 말입니다. 무슨 대단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으로 들릴까봐 이 말 쓰기를 주저하게 됩니다만 이만큼 이치를 명쾌하고 짧게 말한 경우도 많지 않으니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용운 시인이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고 노래한 건 참 안성맞춤이다 싶은데 저는 ‘님이 가셔서 비로소 님을 모시게 되었다’고 고쳐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어미 애비의 죽음만큼 자식에게 큰 가르침이 없는 것입니다.

존재와 부재의 변증법(모순의 조화)이라고 말하든,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있는 게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이다)이라고 말하든 다 한가지라고 봅니다. 전정으로 나를 죽이지 않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우리들의 사랑타령이란 모두 헛된 말재주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갈마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나를 죽여 사랑을 드러내는 게 그리 쉽게 될 일입니까. 죽음은 눈 먼 자에게 빛이요 귀머거리에게 하모니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제 비로소 보게 되고 듣게 되었는데 죽음이라니요. 가슴 아프지만 이 역설만큼 삶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게 있을까요. 우리는 살아생전에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엄마는 고칠 수 없는 암에 걸리고 맙니다. 의사인 남편이 고집 부려 손수 집도하지만 배를 열어보니 손댈 수 없는 지경인지라 중도에 그만둡니다. 시어머니는 치매환자이고 딸은 유부남과 열애중이고 아들은 재수 삼수하면서 애인을 임신시켰습니다. 엄마는 차츰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게 되지만 도저히 그냥 죽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대로 죽으면 가족들이 전부 엉망이 될 게 뻔합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하나 둘 엄마의 불치병을 알게 되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너 살 아기로 돌보아 온 시어머니가 정신이 돌아왔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보듬어주기도 하고 인생 패배자연 하던 남편은 아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노름으로 날을 지새우던 남동생이 달라집니다. 진정으로 바라던 것들이 다 이루어질 듯합니다. 그런데 기적을 이룬 나는 정작 그 기적을 볼 수가 없답니다. 며칠 남지 않았답니다.

치기 어릴 적에는 ‘사랑은 이별로 완성된다’며 너스레를 떨곤 했는데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워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뭘 모를 때 한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고 뭘 알 만한 나이가 되니까 진실과 섭리가 두려워지는 걸까요. 죽음이 다가올수록 깨달음이 깊어지고 그리하여 사랑도 참다와져야 할 텐데 나이를 먹을수록 집착은 강해지고 지푸라기 같은 욕심을 내려놓지 못 하는가 봅니다.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말하는 것이 치기라는 건 알겠는데 죽음을 알 만하니까 모른척하는 건 뻔뻔해져서인가요.



인성여자고등학교 이한수 선생님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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