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처럼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재산권을 가진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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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재산권을 가진 나무
  •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 승인 2015.04.0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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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이야기 (4) : 예천 금남리 황목근

외국에서 영화와 사진에 관한 일을 하는 젊은 친구들이 우리나라의 나무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유가 많지 않아서 긴 시간을 낼 수는 없어도 모국의 자연과 문화를 알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한 그루를 보여주더라도 우리의 자연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 나무를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찾은 곳이 경북 예천이었습니다.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 민족의 생각과 풍경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하기야 어느 한 그루의 나무만으로 우리의 자연주의적 삶 모두를 보여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모자라다는 한계가 있고서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나무 앞에 함께 찾아가서 나무가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름을 가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선 ‘황만수’라는 옛스러운 이름을 가진 나무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만수’라는 이름의 이 나무는 아직 그리 큰 나무가 아닙니다. 누가 심어 키운 게 아니라, 저절로 땅에 떨어진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건 1998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그러고 보니, 동행한 교포 젊은이들보다 조금 어린 나무입니다. ‘만수’라는 이름은 너른 들을 품은 이 마을의 어른들이 머리를 맞대고 뽑아낸 이름입니다. 만년 동안의 오랜 수명을 누리라는 복된 이름입니다.

만수 나무를 이야기하려면 만수에게 황씨 성을 물려준 그의 아버지, 5백 살 된 큰 나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바로 ‘황목근’입니다. 마을 앞 논 한가운데에 홀로 근사하게 서 있는 한 그루의 훌륭한 팽나무입니다.

나무가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1939년의 일입니다. 이곳 금원마을에서는 100여 년 전부터 성미(誠米)를 모아 공동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03년의 ‘금원계안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임원록’이 그것들이지요. 요즘은 거의 사라진 풍습인 성미는 마을 공동체 구성원 중의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조금씩 아끼며 모으는 쌀을 말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대비하는 마을공동체였다는 증거겠죠.

1939년 당시에 어린 아이로 혹은 젊은이로 이 마을에 살았던 분들 가운데 아직 마을에 살아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마을 공동재산을 물려주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꼭 그 분들의 기억이 완전하다고만 이야기하기 어려울 겁니다. 당시 마을 사정을 쥐락펴락하던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에게 일일이 사정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으리라 짐작되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일제 침략의 말기인 그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때 마을 공동재산을 나무에게 넘겨주고, 나무를 마치 사람처럼 이름을 붙인 일은 어쩌면 몇몇 어른만 알아야 할 비밀이었을 지도 모르지요. 지금 마을에 남아 계신 어르신들은 나무를 관리하고, 마을 공동재산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였다고만 말씀하시지만, 그 이상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마을 들판의 한 그루 팽나무는 1939년에 ‘황목근’이라는 이름으로 등기를 마쳤고, 당시의 마을 공동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황목근이 맡게 된 재산은 현재 마을회관이 들어선 땅을 비롯해 주변 임야와 마을 논의 일부입니다. 황목근 소유의 논에서는 마을 사람이 돌아가며 농사를 짓고, 해마다 쌀 80㎏들이 여섯 가마로 이용료를 황목근에게 냅니다. 황목근은 자신의 수입을 꼬박꼬박 자신의 저금통장에 넣고, 나라에는 재산세를 꼬박꼬박 냅니다. 나무 앞에 세운 입간판에는 몇해 동안 황목근이 납부한 재산세 내역을 상세히 적어두었습니다. 지난 2013년에는 34,760원을 재산세로 납부했다고 합니다.

딱히 재산을 가진 나무라 해서가 아니라, 이 아름다운 한 그루의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큰 자존심입니다. 재산을 갖기 훨씬 전부터 이 나무는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온 고마운 나무였지요. 마흔 가구 남짓한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정월대보름 자정이면 나무 앞에 모여 당산제를 지냅니다. 나무 주위에 금줄을 치고 신성한 나무임을 표시하고 모두가 진중한 몸가짐으로 한데 모여 제를 올리지요. 정월대보름 외에 칠월 백중 때에도 이른 아침에 나무 앞에 모여 황목근의 재산의 일부로 마을 대동잔치를 벌이곤 합니다. 그야말로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 마을의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을의 상징이자 자존심인 황목근은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역시 여느 나무처럼 해마다 꽃 피고 씨앗 맺는 본능을 따릅니다. 그러던 중에 그가 맺은 씨앗 하나가 나무 바로 아래에 떨어져 저절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도담도담 자라났습니다. 바로 황목근의 아들 나무인 거죠. 그게 기특해서 마을 사람들은 이 작은 나무를 잘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작은 나무가 어미의 그늘에서 벗어나 더 잘 무럭무럭 자라게 하려고 황목근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로 옮겨 심고, 마침내 ‘만수’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겁니다. 어린 나무여서인지, 그 자람은 왕성합니다. 해마다 찾아보는 나무입니다만, 볼 때마다 부쩍 커진 느낌이어서 바라보면 저절로 미소가 배어나옵니다.

고요한 농촌 마을 들녘 한가운데를 저녁 찬 바람이 휘익 지나갑니다. 미국, 우즈베키스탄 등을 오가며 영화를 제작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젊은 친구들이 과연 얼마나 우리 나무를 이해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그루의 나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만큼은 충분히 알아챈 듯합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황목근과 그의 아들 만수도 새삼 웃음기 머금은 표정을 짓습니다.
 

□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이 원고는 홈페이지 솔숲닷컴(http://solsup.com)의 ‘나무를 찾아서’ 게시판에 함께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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