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묘지 -인천 외국인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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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묘지 -인천 외국인묘지
  • 디비딥 장윤석 블로거(인천in 객원기자)
  • 승인 2015.04.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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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딥의 인천이야기] 23


지금은 빌라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청학동 야산에 철조망으로 굳게 닫혀진 묘지가 있다. 하지만 흔히 보는 우리네 묘지가 아닌 마치 영화 속의 외국 묘지처럼 조성돼 있는 곳... 이곳이 국내 최초의 외국인묘지라 한다. 120여년 전 이역만리 먼 길을 찾아왔던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위치는 연수구 청학동 산53번지가 되겠다.


인천의 개항과 함께 했던 이 외국인묘지는 중구 북성동, 율목동, 남구 도화동 등에 흩어져있던 외국인 묘를 지난 1965년 5월 25일 한데 옮겨 놓은 것으로 대지 5,760평 묘지 면적 3,140여평의 외국인묘지에는 영국인 21기, 미국인 14기, 러시아인 7기, 독일인 6기 등 모두 11개국 59명의 외국인이 잠들어 있다.
 


1883년 개항 후 외국인들이 어디보다 많았던 인천에 외국인묘지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개항후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각분야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던 곳으로, 조선에서의 패권을 쥐려는 일본, 청국, 러시아와 구미열강들은 앞다투어 인천에 몰려와 조계를 조성하고 치외법권 등의 특권을 누렸다.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자연 사망하는 외국인들도 생겨 묘역 조성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중국인묘지 의장지, 중구 율목동의 일본인묘지, 중구 북성동의 외국인묘지가 생겨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묘지는 북성동 1가였으며, 1883년 설치돼 최초 매장은 1887년 7월에 이루어졌으며, 그 넓이는 26,400m2에 달했다고 한다.
 

청국의 을씨년스러움이나 일본의 획일적인 묘지와는 달리 갖가지 묘비들이 전시장처럼 있어 공원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1914년 조계가 철폐되자 각국 영사관에서 관리를 하다 1941년 16,500m2가 철도부지로 수용당하고, 남은 부지도 6.25전쟁 중에 파괴되거나 유실되어 1965년 지금의 청학동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일본인묘지는 중구 신흥동과 경동 사이의 작은 구릉지에 1884년에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송도중학교 자리에 일본인들의 묘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자들로 1888년 2월 1일 사정(신흥동)에 일본인 전용묘지와 화장장을 설치했다.


화장장은 1902년 율목동으로 옮겼다가 1922년에 지금의 인천소방소 자리로 이전하고 다시 1933년 교외지역으로 이전하기 위해 주안1168번지에 화장장을 신축해 옮겼다가 1976년 지금의 부평동 산 57-1 부평 공동묘지에 화장장을 신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인 묘지인 의장지는 1884년 2월에 조인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에 중국인을 위한 매장의지 조항에 따라 설치되었다.


관련 조항에는 "제물포에서 10여리 떨어진 지대 이내에 화상이 적당한 산전을 선정하여 공동묘지를 만들고 나무을 심을 수 있고, 묘지를 지킬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 지금의 남구 도화동 인천대학교 자리 야산에 묘지를 만들었다.

 

먼 이국땅에서 열심히 살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외교관, 선원, 통역관, 선교사, 의사 등이 이곳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인천인들에게 서양의술을 배풀다가 32세란 젊은 나이로 별세한 랜디스 박사의 묘지도 있다. 이국만리 인천에서 선교활동과 더불어 참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한 희생정신이 가슴에 다가오는 듯 하다.


또, 청국 외교관 출신으로 인천해관(세관)에서 일을 한 오례당의 묘비도 있다. 이 밖에 개항 후 인천에서 외국무역을 주도하던 독일계 세창양행의 헤르만 헹켈, 타운센드 상회의 월터 타운센드 등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일요일 이른 아침 이곳을 찾았을 때 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옆을 통해 들어가긴 했지만, 묘지라는 특성상 내 스스로가 조심스럽게 마음도 아주 경건하게 사진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진을 담기 전에 기도를 올려 그들의 명목을 비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이 묻힌 묘지 또한 우리 인천의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역사학습장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참고자료

<경향신문>,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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