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얼을 찾아 일본 대마도에 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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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얼을 찾아 일본 대마도에 가다(1)
  • 권혁진 시민기자
  • 승인 2015.04.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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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섬
 
노후의 해외여행! 부산역 근처에서 하루를 숙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마도 조상의 흔적을 찾아 지난 15일 1박 2일로 고희를 넘긴 인곡우회 일곱 쌍이 갔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출국 절차를 받고는 오션풀라워호에 승선 대마도 이즈라 항으로 출발하였다.
 
대한해협은 파도가 높아 배의 롤링으로 사람들은 멀미하는 것 같았다. 2시간 20여 분의 항해 끝에 하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하였다. 입국장은 비좁은데 한국인 관광객으로 붐볐다. 하루에 약 2천5백 명의 한국인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것이다.
 
대마도는 상도와 하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인구는 약 3만 명이며, 크기는 제주도의 5분의 1 정도란다. 카키 타니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현지식으로 하였다. 메뉴는 도시락 형태의 일본 전통 음식이다.
 
안내자를 따라 오후 시내에 있는 한국인 유적지를 들러보았다. 처음 간 곳은 수선사였다. 계단을 오르자 좁은 마당과 법당 한 채, 옆에는 유골을 모신 비석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을사조약에 반발 의병을 일으켜 패하자 이곳에 유배되어 순국한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서 있다.
 
안내자 황우진(43·남) 씨는 “일본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보면서 나라 사랑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시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일본에 대항한 선열들의 흔적을 더 찾아내어 길이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일본인 나카라이 기념관에 들렀다. 가는 도중 좁은 골목에 일본 전통 양식의 집과 돌로 예쁘게 담장을 쌓았다.
 
황 씨는 “돌담 장은 방호벽 구실을 하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니카라이는 대마도 출신으로 기자이자 소설가이다. 이는 부산의 왜관 의사로 상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냈다.”
 
“특히, 아사히신문의 부산 통신원과 서울에 파견된 특파원 1호이다. 임오군란에 대한 기사와 춘향전을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한 사람이다. 조선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해석을 자세히 덧붙여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한다.”
 
다음은 팔번궁 신사를 찾았다. 큰길가 옆 입구에 커다란 도리가 서 있다.
 
황 씨는 “팔번궁 신사는 최익현 선생이 처음 구금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어부와 병사들을 지켜주는 하치마 신을 모신 신사로 일본에서 꽤 유명한 곳이다. 특히, 도리는 신사의 입구에 설치한 문이다. 도리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 짓는 경계이다. 우리나라의 사찰 일주문과 같다.”
 
도리를 지나 돌계단 위에 신사 건물이 위치하고 주변은 고목의 울창한 나무들이 있어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다음은 고려문과 조선통신 사비, 대마도 역사관을 찾았다. 아리아케 산 입구 언덕에 있는 고려문은 그 흔적만 있고 조선통신 사비가 우뚝 서 있다.
 
동행한 이완수(71·전 역사 교사) 씨는 KBS 징비록 연속 방송을 상기하며 “서인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고, 동인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의견을 내놓아 동인의 주장을 선조 임금이 받아들여 임진왜란의 비극을 낳았다.”
 
“최고 권력자의 의사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당시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얼마나 혼란하였는가? 반문하며, 우리의 정치 현실도 여야를 막론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국사를 의논하면 좋겠다.” 고 했다.
 
다음은 자료 전시관을 들렀다. 일본의 문화에 대해 고대, 중세, 근세의 생활상과 종가문서, 민속자료. 조선 통신사 행차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음은 재일본 거주 한국인들이 덕혜옹주의 한 많은 삶을 위로하고자 건립한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를 찾았다.
 
이 씨는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 일신 심상소학교에 재학 중 일제의 불모로 끌려가 도쿄 여자학습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옛 쓰시마 가문의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고 3년 후 딸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조현병 증세로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하였다. 그 후 이혼을 하고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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