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은 바로 그 원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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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은 바로 그 원형이 아니다
  • 류이
  • 승인 2015.07.0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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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 칼럼] 류이 / 미디어교육연구소 이사장

<2014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거행된 청황패놀이 >


- 전통문화의 전승은 또 하나의 창조이다
- 청황패놀이의 복원도 재현이 아니라 창작으로
 

인천 남구에서 조선시대의 청황패놀이를 복원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청황패(靑黃牌)놀이는 인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민관 합동 대동놀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청황패놀이를 오늘에 되살려보겠다고 하는 것은 문화도시 인천을 키워나가는 데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청황패놀이는 옛 관원과 고을 주민들이 청패(靑牌)와 황패(黃牌)로 나뉘어서 싸움을 벌이고 모의 쟁투를 하는 놀이입니다. 푸를 청(靑)은 바다 색깔이지요. 어업과 어부를 상징합니다. 누런 황(黃)은 땅 색깔입니다. 당연히 농사와 농부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패(牌)는 두레패 사당패 할 때의 그 패거리,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때 청패는 여러 가지 고기잡이 도구들을 들고 나오고, 황패는 농사 도구를 들고 싸움에 나선다고 하는데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들고 나온다고 하니까 아마도 만선 때 거는 봉기[豊漁旗]도 들고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기, 영기, 군기, 오방기 등 군사를 부릴 때 쓰는 깃발도 나오고 관원의 복장을 한 패장(牌長)의 지휘 아래 싸움을 벌인다고 하니 어군과 농군으로 편재해서 모의쟁투를 벌이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청황패는 온갖 깃발을 비롯하여 청패틀과 황패틀을 앞세우고 수령과 향반·육방 관속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덟 마당으로 놀았다고 합니다. ????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에 따르면, 이 놀이꾼의 편성은 제관 [수령, 좌수, 향반, 아전, 군졸, 놀이 기수, 신위 기수], 농악대 [호적, 상쇠, 소고, 징, 장고, 북], 청패 황패 각각 [당길꾼, 멜꾼, 패장, 부장, 전진 싸움꾼, 좌우익 싸움꾼, 군기수, 영기, 수기수, 패기수]로 이루어집니다. 놀이는 <도는 마당―뵈는 마당―비는 마당―노는 마당―얼림 마당―싸움 마당―화동 마당―나는 마당>으로 모두 여덟 마당으로 나누어 한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초 인천도호부사가 인천 바다의 여러 섬에서 모시는 신들을 모두 다 모아서 낙섬(인천남구 용현동 부근)에 사당(원도사猿島祠)을 지어놓고 직접 제사를 지내고 청황패놀이를 관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조(世祖) 때 백성이 모시는 오악과 사해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해에는 인천도호부에, 동해에는 강릉도호부에, 남해는 순천도호부에 바다신을 비롯한 모든 신들을 모시는 사당을 두고 수령이 삼월 삼짓날과 시월 상달에 봄가을로 직접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황패놀이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로 그 기원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멀리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국행사전(國行祀典)이었던 나례(儺禮) 의식이 발전한 관민 합동의 나희(儺戱)일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강릉단오굿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강릉도호부사가 똑같이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민중은 굿을 하고, 탈놀이도 하고 대동놀이를 하는 큰굿입니다. 강릉은 고대에는 예맥족이 살던 곳으로 고구려 때는 하슬라, 신라 때는 명주였지요. 예전에는 김유신을 모셨다고 하니까, 그 기원이 신라시대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되살린 탐라입춘굿놀이도 민관 합동의 큰굿입니다. 탐라시대에는 탐라 왕이 몸소 쟁기를 잡고 백성 앞에서 농사시범을 보였던 세시풍속이자 풍농굿에 그 기원이 있다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마을 원로인 호장(戶長)이 손수 쟁기를 잡고 낭쉐[木牛]를 끌고 가면 전도에 흩어져 있던 심방들과 마을의 걸궁패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물론 그 뒤에는 백성들이 따르고 질펀하게 거리굿을 펼치며 관덕정에 모여 큰굿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주목사가 전도의 심방을 모아 비용을 대고 제주(祭主)가 되어 벌이는 굿의 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황패놀이는 강릉단오굿이나 탐라입춘굿놀이와 같이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왕가의 의지를 반영하는 민관 공동행사의 하나로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큰굿이 그 형식을 바꿔가면서 계속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민중의 민속놀이와는 다른 형태의 민관 공동의 의식이자 놀이였다는 점을 감안해서 복원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원형을 보존한다’는 생각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청황패놀이는 사라지고 없으므로 원형을 찾아서 재현하겠다는 생각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통은 살아서 숨쉬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입니다. ‘원형’을 찾는 일이나 ‘문화 원형’으로 ‘문화콘텐츠’를 재창조하겠다는 문화부와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사업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문화재’ 혹은 무형문화재 제도가 우리 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그것을 전승해온 분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실제적인 지원 정책으로 도움을 주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컨대 내가 1977년 경 고성에 내려가서 허종복(고성오광대 양반춤, 문둥북춤, 탈 기능보유자) 선생님에게 오광대 춤을 배웠는데, 그때의 오광대 춤과 요즘 전승하고 있는 오광대춤은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1976년 경 김선봉 선생의 봉산탈춤과 오늘날의 전승하고 있는 봉산탈춤도 많이 다르지요. 지금 필름이 남아있는 1930년대의 봉산탈춤은 1970년대 우리가 배우던 봉산탈춤과도 너무나도 다른 감성과 사위를 보여줍니다. 장단도 훨씬 느리고 늠실늠실 거리는 춤사위도 훨씬 물 흐르는 듯 흘러갑니다. 아예 다른 춤을 보는 듯합니다. 시대가 다르고 시공간도 다르고 춤을 추는 사람도 다르고 보는 사람도 다 다른데, 어찌 춤이 같을 수가 있을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원형을 남기고 싶다면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일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전통이라면, 고화질 영상으로 촬영하고 녹음하고 구술하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서 ‘지금 이 순간’의 전승을 남길 일입니다. 곧 사라져갈 운명의 전통이라면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청황패놀이는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우리 문화이지만 죽은 문화입니다. 청황패놀이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원형’ 자체가 창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원형은 바로 그 원형이 아닙니다. 이때의 ‘원형’은 그래서 오리지널(original)이 아니라 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는 말로 써야 할 것입니다. 신화의 대가였던 캠벨은 신화 시리즈의 마지막 권을 ‘창작신화’로 마무리했습니다. 신화의 전승조차도 늘 ‘창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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