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제일 많은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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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제일 많은 외국인은 중국인이었다”
  • 진달래 기자
  • 승인 2015.07.3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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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특강 <식민지 조선인이 본 일본 중국 그리고 화교>
사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과 박노자 교수가 재조선 중국인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1930년대 한국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29일 오후 7시 중구 해안동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린 박노자 교수의 특강은 수많은 참석자들을 순식간에 1930년대 식민지 시기 인천 차이나 타운으로 데려갔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중에 가장 많았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본인? 답은 중국인이다. 

1930년 경성부에만 6천여명, 전국에 약 7만에 가까운 화교가 거주등록을 하고 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 인구가 약 2천만명, 현재의 전국 화교 수가 약 2만 가량이라는 것을 고려면 상당히 많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수많은 화교들이 산동성 출신인데, 당시에는 산동성에서 중국인들이 비자 없이 한국으로 와서 노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이 청을 침략해 벌인 전쟁이 조선으로의 중국인 유입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청나라 영사관은 지금 연남동(서울)의 화교학교가 되었으며, 차이나 타운(吉那町)이 한국 곳곳에 생겼다. 

중국인들은 단지 한국에서 노동과 상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의 땅을 개간해 소작인으로 농업을 해 당시 채소 생산량의 1/3을 차지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영국에서 고급 방직물을 들여왔다. 식민지 시기 40년 동안 대 중국 무역은 17배로 늘어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식민지 시기 중국인들이 한국에 이렇게 많이 살았다는 것을 잊게 된 것일까? 

개화기 때부터 식민지 시기 내내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의 혐오에 시달렸다. 돈이 많은 화교들에게는 냉혈한, 호색한, 살인자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독립신문은 중국인에게 가장 적대적인 신문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부의 압력은 중국인들을 계속해서 한국에 진출하게 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 내 공산주의 혁명에 큰 관심이 있었으며, 조선 내 언론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해외 신문은 상해일보였다. 

일본은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경쟁할 때에, 식민지 정부 정책을 통해 갈등을 완화시키기보다는 이간질하여 중국인 거주자들과 조선인들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신문에는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말자는 광고가 실렸고, 중국인들이 아편 장사를 한다는 것을 약점 삼아 식민지 언론들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중국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 중국인들은 서서히 악마화되었다.
 
사진: 1931년 만보산 학살로 인해 파괴된 평양의 차이나타운의 모습.

.1931년 7월 이 갈등이 파국에 이르러 폭발했다. 평양과 인천 등 중국인이 많이 거주한 곳에서 백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만보산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만주 근처의 한 마을에서 조선인 소작인을 대거 모집, 수리공사를 진행했던 데에서 시작했다. 이 수리공사에 방해를 받은 중국 농민들과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 때 한 조선일보 특파원이 조선일보에 “만보산 사건으로 조선인 200명이 사망했다”는 거짓 보도를 냈다. (이 기자는 이후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중국인 혐오는 극에 달했으며, 조선인들은 차이나타운을 습격해 건물과 재산을 파괴하고 중국인들을 살해했다. 당시 약 130여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으며, 신문에 “폭력을 실행하지 말자”는 기사가 실릴 때까지 폭동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인의 중국인 혐오를 이용했던 일본 경찰조차 중국인을 보호해야 했다.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났으나 폭동이 끝난 이후 중국인들의 수는 다시 늘어나 40년대에는 8만여명대로 회복되었다. 하급 노동시장 내 조선인과 중국인의 경쟁에서 인권은 보호되어야 했지만 역으로 이용되어 중국인을 악마화, 타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보산 사건 등 한국화교의 역사는 역사 교육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인천대 중국학술연구원의 한국 화교 연구를 통해 인천 시민들과 한국인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30년대의 끔찍한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경제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가 붕괴되고 있는 현대 한국에서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 혐오, 외국인 혐오는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서 하급 노동자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혐오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 박노자 교수는 러시아 상뜨페쩨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한국학을 전공하여 한국에 유학, 귀화하였다. 현재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 노동당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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