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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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 이한수
  • 승인 2015.10.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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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선생의 공감 팩트] ①남북교류 재개로 다시 보는 『황진이』

<인천in>이 이번주부터 ‘이한수 선생의 팩션'을 격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팩션(Faction)이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입니다.?우리 역사에 민초의 이야기는 기록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그러니 기록된 사실(事實)로만 역사를 보면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팩트와 픽션을 결합한 드라마는 많은?국민들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또?이를통해 진지하게 역사에 진실(眞實)을 떠올려 볼 수 있읍니다.? 이한수 선생은 현재 인성여고 국어교사로 재직하고있습니다.

 


약 2년 동안 중단되었던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었습니다. 곧 전쟁이 날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엊그제 같은데 금방 또 이렇게 서로 오가게 되니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발길이 다시 트이게 되니 마음이 참 좋습니다. 제가 한 5년 쯤 전에 북한을 다녀온 게 까마득했었는데 이제 다시 수 일 전 일처럼 또렷해지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그때 남북 교류가 참 활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북 합작 영화 『황진이』일 겁니다.

북의 작가 홍석중의 『황진이』와 남의 작가 최인호의 『황진이』를 같이 보면 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을 남한에서 영화로 만들어 남과 북에서 같이 상영한 일은 우리 역사 공부에 엄청나게 큰 기여를 한 셈입니다.




홍석중 원작 장윤현 감독 영화에서 ‘진이’가 사랑하는 ‘놈이’의 유골을 깊은 산중에 들어가 뿌리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북한 금강산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2007년 일입니다. 제가 금강산에 가본 게 2009년인데 그 무렵의 일이 아득한 옛날 같습니다. 북의 작가가 쓴 작품으로 영화를 만들고 남과 북을 오가며 촬영을 하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황진이』를 촬영했던 금강산 옥류동 계곡에서 북한의 젊은 안내원들과 한 잔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게 어제 같은데 10여 년 지난 그때가 어찌 이리 아득한지요. 영화『황진이』를 만들고 하던 때가 다시 올는지요.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에 북한을 방문한 선생님들께서 책 몇 권을 구입해 왔다고 교단에서 쫓아내는 이런 일이 다시 올 줄을 그때에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황진이’는 실존 인물로 보입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참 많습니다. 천한 기생의 이야기가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역사에 기록되었을까요. 그의 삶을 추적해 가는 일은 역사가 무엇인가 다시 깨우치게 되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녀의 삶은 왕조실록으로 재구성된 과거가 얼마나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기녀 황진이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는, 수십 년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 판서 ‘소세양’, 왕족 벽계수 ‘이종숙’, 선전관 ‘이사종’, 재상의 아들 ‘이생’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은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황진이’와의 애정 행각이 실재했는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야담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바에 근거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급될 때 그 창작 배경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인물들이 언급되었는데 황진이가 유명한 기생이었으며 개경 유수로 임명된 ‘임재’가 ‘황진이’를 위한 헌시를 지었다가 파면당한 사실이 있는 걸 보면 황진이가 실존 인물이며 그녀가 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연분을 맺은 사건들이 실재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개경 유수 관직이면 지금의 광역시장에 해당하니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판서와 친분이 있었다는 야담도 전혀 황당한 얘기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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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의 ‘벽계수’가 ‘황진이’의 속치마에 시를 쓰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벽계(碧溪)라는 말은 ‘맑디맑은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이런 뜻의 호를 쓴 이로 벽계도정(‘도정’은 관직명) ‘이종숙’이 ‘황진이’가 유혹하려 했던 벽계수임을 추측케 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결했던 벽계수마저 꼬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황진이’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과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벽계수’가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 ‘이종숙’이라는 실존인물이며 고고한 그가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창을 듣고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질 만큼 ‘황진이’에게 매료되었다는 일화가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진이’가 살았던 때는 조선 중종 때로 16세기 무렵입니다. 그런데 영조 때라 하면 18세기이니 2,300년 뒤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나,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실존 인물 ‘벽계도정’과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가 같고 가사(歌辭) ‘면앙정가’의 작가로 유명한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낼 때 ‘황진이’와 시(詩)와 술(酒)로 교유(交遊)했다고 전해오니 영화에서 개성 유수가 ‘황진이’더러 왕손인 ‘벽계’를 유혹해 보라고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출전 『청구영언』

‘이종숙’의 호 ‘벽계(碧溪)’에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을 붙여 이렇게 즉흥시를 써낼 정도이니 ‘황진이’의 문학적 재능은 놀랍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고아(高雅, 높고 우아하다)하다고 자부할지라도 나의 미모(明月)에 안 넘어갈 수 있겠느냐는 호기로운 노래가 어찌나 절창인지 이 정도로 재색(才色, 재능과 미모)을 겸비했다면 제 아무리 벽계라도 아니 넘어갈 수 없었겠지요. 이렇듯 ‘황진이’는 당시 사대부의 위선을 통쾌하게 풍자하면서 그의 문학은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대부들이 황진이 문학의 깊이를 인정하는 만큼 그녀는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우습게 알았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이는 소리꾼 ‘이사종’이었다고 합니다. 『어우야담』에서는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듣고 당대 최고의 명창 ‘이사종’임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영화 『황진이』에서는 ‘진이’가 이토록 사랑한 이가 ‘이사종’이 아니라 자기 집 종이었던 ‘놈이’로 그리고 있는데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놈이’의 화적패가 관가의 창고에서 훔쳐낸 곡물을 마음 사람들한테 풀어놓아 마을이 온통 축제 판이 된 모습을 목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우야담』은 예능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두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영화 『황진이』는 천한 신분이면서 신분사회에 대한 강한 반감이라는 계급적 동질성이 ‘진이’와 ‘놈이’를 생사를 넘나드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천한 신분인 기생으로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교유하며 그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아 전해지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인물의 존재 자체가 그 시대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역사는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 보여준다면 그만큼 위대한 역사 서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추한 세속에 영합하지 않고 홀로 고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정신적 귀감은 있게 마련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를 대표하는 청빈한 학자로 화담 ‘서경덕’이 바로 그런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덕’은 하급 무사의 아들로 집이 가난하여 서당에서 한자 공부를 한 이후로는 줄곧 독학을 하여 그만한 학문의 경기에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그의 제자로는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있습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반순’도 그의 제자라고 합니다. 독학해서 이룬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의 제자들에 이렇듯 명망가가 많은가요.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서경덕’ 학문의 깊이를 인정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조선 성리학은 당쟁의 영향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자학과 양명학이 사상적으로 대립 경쟁한 측면이 있습니다. ‘퇴계’가 주리론의 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율곡’이 주기론의 학맥을 대표적인 학자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화담 서경덕’을 조선 성리학 주기론 학맥의 시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하니 ‘서화담’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단한 학자가 ‘황진이’와 썸씽(something)이 있었다고 합니다. ‘썸씽’이라고 하니 둘 사이의 무슨 치정(癡情)을 먼저 떠올린다면 말한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화담 선생이 절세가인(絶世佳人) ‘황진이’와 밤새워 대화하면서 도학자로서의 기품에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황진이’는 감동하게 되고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분 사이에 오간 시조는 정다우면서 맑기가 한량없습니다. 도학의 깊이를 측량키 어려운 선생께서도 ‘진이’를 대하는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들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 모습이 오히려 그 분의 학문을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선생이 이렇듯 체면을 개의치 않고 순정을 표현하니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에 대한 ‘진이’의 답가는 사제 간의 격의를 일부러 들까부는 듯 염치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말투가 스승의 파격에 재치 있게 화답하는 듯하여,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임꺽정' 을 쓴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의 [황진이]에서는 진이를 사모하다 죽은 남자가 이웃집 총각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야사에서는 이웃집 종놈이라고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홍석중의 작품에서 종놈 '놈이'에게 정조를 바친 대목은 전해 오는 야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진이가 파혼을 당하면서 자신이 실제로는 종년 ‘현금’의 소생이며 아비의 추잡한 욕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연유로 스스로 신분의 허울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그려낸 것은 ‘황진이’의 화류계 투신에 대해 설득력 있는 사연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생모가 ‘현금’이라고 전하는 기록이 있고 홍석중의 [황진이]는 황진사가 부인의 몸종 ‘현금’을 건드려 진이를 낳은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홍석중의 『황진이』와 최인호의 『황진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홍석중(『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은 북한의 문인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한 작품으로 ‘황진이’를 그리고 있으며 최인호가 쓴 『황진이』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으니 두 작품은 상당한 정도 대척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인호의 ‘진이’는 서울 양반 댁과 혼담이 오가는 중 이웃의 갖바치가 자기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속치마를 벗어 관에 씌우는 기행을 했다 하여 파혼당하고 기생이 되었으며 벽계수와 사랑에 빠졌으나 버림을 받고 무능한 선비 ‘이생’과 전국을 떠돌다가 결국 사당패에게 팔리고 마는 것으로 그리고 있고 홍석중은 진이가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고 양반 귀족의 허위에 환멸을 느껴 기생이 되고 그녀를 흠모한 종놈 ‘놈이’와 남녀의 정을 통하며 나중에 역적 무리에 가담하였다가 참살당한 ‘놈이’의 시신을 수습하고 걸인처럼 세상을 떠도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최인호의 작품은 ‘86년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홍석중의 작품은 장윤현 감독에 의해 ’07년에 영화로 발표되었습니다.『어우야담』에서는 ‘황진이’가 ‘이생’과 남루한 차림새로 금강산 기행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인호의 작품이 이 기록을 더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담 기록이다 보니 명백한 사실(事實)임 입증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이라는 게 입증이 될 수 있는 것인가요. 형광등은 매우 빠른 속도로 깜박거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인간의 눈으로는 그걸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리는 사실대로 감각한다는군요. 어떤 점에서는 파리만도 못한 거지요. 팩트만 운운하는 건 역사일 수 없으며 진실(眞實)하지 않은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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