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으로 두 번 죽은 항일 전사 윤세주
상태바
역사 왜곡으로 두 번 죽은 항일 전사 윤세주
  • 이한수
  • 승인 2015.12.22 2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감 팩션]⑤『석정 평전』

영화 『암살』로 김원봉을 만나면서 윤세주, 김학철을 알게 되고,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이 왜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역사에서 잊히고 말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김원봉은 중국에서 활동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결속시키는 일을 주도할 만큼 항일 운동의 구심이었는데 해방 후 김구 선생 뒤를 이어 2차로 귀국하면서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쫓겨나다시피 북으로 갔고 북에서도 누명을 뒤집어쓰고 제거되고 맙니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세우고 팔로군에 결합하여 중국의 항일 혁명 전투(태항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윤세주는 북한 남한 독립운동사에서 모두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념이라는 게 뭔지 우리 위대한 역사를 이토록 누더기로 만들어 버린단 말입니까.

 

<팔로군의 유격 근거지였던 태항산 협곡에 세워진 윤세주 묘 >

 

원통한 심정으로 그 근원을 추적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가 김진명이 명성황후의 끔찍한 최후를 알게 되고 그 사료를 찾기 위해 일본 역사학계 어두운 이면을 샅샅이 뒤져서 결국 ‘에조보고서’를 찾아냈듯이, 그런 심정입니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더럽혀온 자들이, 총칼로 인명을 살상하는 테러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시비를 거는데, 명성황후의 끔찍한 최후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인의 처참한 실상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시비를 걸 수 있는지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지난번에 위안부 얘기를 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너무 끔찍하여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구한말 얘기를 할 때 가슴을 부여안고서라도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겠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그 많은 애국 투사들이 왜 저 멀리 만주로 간도로 풍찬노숙하면서 떠나갔을까요. 그들이 왜 총칼을 들고 가슴에 폭탄을 품었을까요.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알게 됩니다. 테러 운운하는 게 얼마나 뻔뻔한 짓인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우국지사들의 행적을 뒤좇아 가보면 그분들이 삶이 불가분으로 엮여 있어 그 중 몇몇을 가려내어 역사를 서술하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육사를 빼놓고 한국 문학사를 논할 수 없는 것처럼 윤세주를 가리고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둘도 없는 친구이며 동지이니 이육사의 삶을 조명하는 일은 곧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투쟁사를 밝혀내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결합하고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하였고 한국 전쟁 때 북한군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하여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면 역사 왜곡이 되어 버립니다. 김원봉과 윤세주의 의열단 창설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고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선생이 고종황제의 밀명으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고종이 암살당하자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건너가 세운 독립투사 양성 학교입니다. 그러니 의열단, 조선의용대는 구한말 망국의 역사, 해방 이후 분단 동족상잔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따로 떼어 서술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 서술은 조선의용군 항일 투쟁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윤세주 뿐만 아닙니다.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세운 김두봉, 김원봉 윤세주와 함께 공부한 조선의용대 출신 김무정, 이루 셀 수 없는 많은 지사들이 중국 만주 간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분단과 이념 대결로 역사는 반쪽이 나고 그 많은 항일 투사들이 역사의 그늘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윤세주의 삶을 제대로 되짚어 가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역사 분열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중국 연변 조선족 사회를 주목했고 ‘연변소설가협회’에 윤세주 관련 자료를 문의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정세봉 회장님께서 바로 연민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책 『석정 평전』을 보내주셨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감동하여 이렇게 답신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나라 사정이 참 가소롭다는 생각으로 요즘 참 우울합니다. 크게 보지 않고 세력 다툼으로 날 셀 줄 모르는 모습이 참 밉습니다. 수난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흩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선생님, 연변에 사시는 조선족, 연해주에 사시는 한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 흩어져 멀어졌지만 아직 말이 통한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요. 서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면 나중에서 오고가고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저에게 책을 보내주시고 저도 그에 화답하는 이 인연이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이 참 좋았습니다. 저의 잡문이 연변 작가들에게 읽힌다면, 우리 도시의 독자들이 연변의 작가 분들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 연변소설가협회장 정세봉 선생님께 -

 

<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생 훈련소 이연선림 현 천녕사>

 

3.1만세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만들어 무장투쟁에 나선 윤세주는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 폭파사건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릅니다. 출소한 뒤 1929년 중국 남경으로 가 김원봉과 재회한 윤세주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심양, 천진,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는 의열단원을 군사간부학교 학생으로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이육사와 함께 자신도 1기생으로 입교하고 졸업하여 1935년까지 2,3기생 교관으로 참여합니다. 이 군사간부학교에서 양성된 사관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의용대가 탄생하게 됩니다.

 

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중국 국민당의 사관학교 황포군관학교(교장 장개석)를 졸업한 조선 항일 투사들이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세운 학교입니다. 이 학교 건립을 주도한 사람이 김원봉이고 이 학교에서 길러낸 대표적인 투사가 우리가 잘 아는 이육사, 윤세주, 김학철입니다. 김원봉의 의열단이 주도하여 여러 항일 단체를 묶어 민족혁명당이 창립되고 중국 국민당 정부 수도 남경 근교의 한 절(이연선림, 현 천녕사)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군사 간부로 길러내었던 것입니다. 조선 청년들에게 김원봉은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장투쟁입니다. 전쟁의 과학을 모르면 발톱까지 무장한 강대한 적과 맞설 수 없습니다. 황포학교는 창립 당시부터 우리 조선 학생들하고는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군사인재를 육성해냈습니다. … 우리 민족의 미래를 양어깨에 짊어졌다는 자세 하에 조국 광복에 필요한 군사과학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기를 바랍니다.” - 김학철의 회고 -

 

각처에 분산되어 일제 요인과 친일 반역자를 암살하는 테러 활동을 벌였던 항일 투사들이 정식 군사 훈련을 받아 군대로 조직됩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이루어 대일 항쟁을 벌이는데 조선의용대도 군대 조직으로 결합합니다. 국민당군에 편성된 조선의용대는 상해, 남경에서 일본군에 밀려 중경으로 후퇴하고 국민당군의 무능과 부패에 반감을 가진 다수의 의용대원이 공산당의 팔로군에 결합하기 위해 연안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연안은 험준한 태항산맥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팔로군의 유격 근거지였습니다. 군사조직으로 성장한 조선의용대 독립투사들은 하루 빨리 고국 땅으로 진공해 들어가고 싶었고 중국 공산당의 주 활동 무대 화북지방을 거쳐 동북지방 만주로 가기를 고대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불리우는 태항산 협곡>

 

 

윤세주는 살아생전에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화북지방 태항산 십자령 전투에서 1942년 5월에 전사하였습니다. 이 전투 때 조선의용대의 희생으로 등소평의 중국공산당은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중국이 윤세주를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는 게 당연합니다. 조선의용대의 구심이었던 김원봉은 연안으로 가지 않고 중경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김구 선생과 한국광복군을 만듭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김원봉과 윤세주가 이념 갈등으로 결별했다고 짐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윤세주가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 태항산으로 가고 김원봉은 임정이 있는 중경으로 가면서 서로 헤어졌지만 계속 연락을 주고받은 증거가 있고 윤세주가 전사한 뒤 김원봉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 것을 보면 이념 갈등은 사실이 아니며 이들은 죽을 때까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는 일편단심으로 좌우 합작과 항일 세력의 통일을 위해 고심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 단체 통일 조직 민족혁명당 결성을 위해 노력한 이력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군에 편성되고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합니다. 이후 김두봉의 조선독립동맹에 합류하게 됩니다. 해방이 되자 김두봉의 부대는 북한으로 귀국하고 남은 조선의용군은 중국 국공내전(1948년) 승리에 기여하고 귀국하여 북한 군부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역사 서술에서는 이들의 항일 투쟁이 철저히 배제됩니다. 분단과 이념 갈등이 독립투쟁사를 반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영화 『암살』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친일 세력이 자신들의 추악한 매국행위를 가리기 위해 반탁 반공을 내세우면서 이념 갈등을 부추긴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의용대의 독립투쟁은 연안파의 숙청으로 북한에서도 배척되고 맙니다. 우리가 교과서로 배우는 국사는 빈껍데기가 아닌지 서글퍼집니다.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운동의 모델이 된 3.1만세운동, 수많은 독립투사를 길러낸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일제 강도에 의해 피바다가 된 남경(난징 대학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중경, 중국 혁명의 산실 연안 태항산, 석정 윤세주는 가장 뜨거웠던 역사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그의 삶 자체가 독립투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반쪽 역사 서술에 의해 또한번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