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으로 되살아나는역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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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으로 되살아나는역사의 진실
  • 이한수
  • 승인 2016.01.0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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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⑥ 김학철 『격정시대』

일제의 만행에 맞서 싸우다 처절하게 죽어간 항일 투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새삼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감정이 격해집니다. 그 위대한 정신에 고개 숙이게 됩니다. 이 민족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그 불굴의 정신과 숭고한 헌신을 후대에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있으니 통탄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저들의 파렴치가 우리 민족사의 정기를 바로 새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어찌 보면 참 다행한 일입니다. 역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 민족정기가 이 땅에서 쫓겨난 디아스포라(유이민)에 의해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커지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중국 대륙에서 싸우다 산화해간 독립투사들의 삶이 더 많이 소설로 영화로 그려져서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 절절한 우리 민족사가 널리 공감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정신을 맞아 머리 숙이는 고귀한 깨달음만큼, 처참하게 죽어가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민초들의 삶을 마주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아픈 공감 또한 참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은 역사로 기록되지 않으니 복받치는 가슴으로 회고한 구술(口述)이 사료(史料)만큼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이회영 선생을 비롯하여 의열단의 김원봉, 윤세주, 아리랑의 김산(장지락)은 경외감이 들게 하는 위대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들은 젊은 시절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신흥무관학교,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정치조직을 결성하거나 그에 가담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지식인입니다. 김산은 님 웨일즈와의 대담에서 김원봉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원봉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얼마나 냉철한 지식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 지식인 의사(義士)들을 알면 알수록 무지하고 힘없는 민초들의 삶이 담긴 팩션(팩트+픽션)이 더 간절해집니다.


 
<김원봉>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에 담긴 약산 김원봉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 영상은 194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75년이 지난 작년에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암살단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시 왔지만 그가 항일 독립투사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좌우합작에 고심하는 내면의 아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이나, 이름 없이 죽어간 민초의 처절한 삶을 담나내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영화 [암살]보다 4년 전에 나온 드라마 『절정』에서는 이육사를 통해 좌우 갈등이 일부 형상화되었고 윤세주의 태항산 전투까지 담아냈으니 4년 전 『절정』을 오늘의 『암살』보다 진일보한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 선생도 이런 안타까운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2001년 윤세주 선생 탄생 100주년 행사 차 밀양에 왔다가 안경환 서울대 교수와 인터뷰하며 한국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 시기 그토록 잘 싸웠던 양심들.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권의 옹호를 위해 그토록 물불을 헤아리지 않았던 그 양심들이 지금은 왜 이리도 고자누룩(물러나앉아 모르쇠함)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지?”   

우리 역사가 진일보하기는커녕 퇴보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을 저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학철 선생의 소설 『격정시대』는 역사의식은 어떻게 진보하며 우린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 세울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사대(事大) 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주의(主義)와 이념(理念)이 미래 지표가 되기는 커녕 과거 왜곡에 매몰되게 하는 작금의 질곡을 극복해야 하며 영웅사관을 지양하여 보통 사람의 고달픈 삶이 곧 역사 서술의 본령이 되고 그리하여 눈물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런 뜨거운 역사가 되살아나길 바라는데 『격정시대』는 그 표본이라 할 만합니다. 


<김학철>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은 김원봉 윤세주와 중국에서 항일 독립 투쟁을 함께 했습니다.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가 죽을 때 김학철은 총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잃고 일본으로 잡혀가 감옥살이를 합니다. 광복 후 외다리로 귀국했다가 곧 월북합니다. 북에서는 김일성 우상화를 반대하다 중국으로 망명했고 중국에서는 모택동 독재에 반대하다가 투옥됩니다. 원산에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월북을 하고 북한 공산당의 배척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도 배척을 당해 그 어디에서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는 그가 어느 누구보다 순수한 혁명 정신의 소유자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권력자로부터 버림받아 홀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지난 일을 회고하고 기록함으로써 우린 진정한 역사의식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위대한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너무 절절하여 한 대목도 놓치고 싶지 않지만 특히 민초와 함께한 그의 모습은 저를 너무도 가슴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그가 목격한 1928년 원산 제네스트(general strik 총파업)는 봉건적인 의식이 여전하던 그 시대에는 참으로 놀라운 대사건이었습니다. 서로 대립하던 아나키스트들과 적색노조가 부두 노동자 총파업을 통해 새롭게 각성하게 되는 모습이라든지 원산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박의 일본인 선원들이 함성을 질러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장면은 국가체제를 뛰어넘는 코뮌의 탄생을 보는 듯했습니다. 관념과 이론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민중 해방과 연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감동을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김학철 선생은 온몸으로 직접 겪었으니 논설이 아닌 이야기로 우리를 그 현장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 김학철이 의열단의 테러리즘에 의문을 갖는 대목도 너무나 생생합니다. 김학철(작중 서선장)이 테러 행위는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의문을 제기하니 교관이 “토벌대를 풀어서 부락을 에워싸구… 온 마을에 물을 질러놓구… 불구뎅이 속에서 살겠다구 기어나오는 어린것들을 총창으로 찍어서 불속에 들이뜨리는 야수들에 대해서… 우리는 인도주의를 베풀어야 합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독립투사와 그의 가족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간도 토벌대 출신 친일 매국노들이 테러 운운하며 항일 의거를 폄훼하는데 그들에게 이 말을 그대로 던지고 싶습니다.

역사 서술을 두고 객관적 사실(事實) 운운하며 진실(眞實)을 호도하는 것만큼, 현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념이 얼마나 우리 정서를 메마르게 만들며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 가슴을 울리는 현장 이야기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의용대가 중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주둔하며 대원들 몇이 개울에서 엄청나게 큰 메기를 발견하고 곧장 잡아서 구워 먹었는데 나중에 마을 촌장 격의 노인이 찾아와 그 메기가 조상 대대로 모셔온 토템(원시 신격)이라며 항의하자 대원들이 사죄하며 산신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을 뒷산을 수천수만 배 절을 하며 오르내렸습니다. 원시적 신앙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할 법도 한데 현지 주민의 정서에 맞춰 허리를 굽히니 이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정신대>


『격정시대』에도 일본군 위안부 얘기가 나옵니다. 간호병으로 징집해 가서 성노예로 착취한 저들은 아직도 사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죄 없이 10억 엔 협상 타결이라니 이런 굴욕이 어디 있습니까. 『격정시대』에 의용대가 일본군 주둔지를 치고 들어가 조선인 처녀들을 데리고 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위안부로 학대당하던 이 처녀들이 의용대원이 되어 무슨 일이든지 모범적으로 일하며 행복해 하는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가장 약한 자는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이 폭압의 사슬에서 풀려나 변혁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만큼 위대한 혁명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김학철 선생은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싸워왔기 때문에 이런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 분열과 이산의 아픔은 한반도가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찢길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조건 때문이었다고 넋두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여기, 내 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그 모든 게 외부적 조건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불변의 이치이지 않습니까.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논할 때 중국 공산당이 조선 민족주의를 존중하는 장면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청년 코뮤니스트들이 팔로군 집회에 적기를 들고 가자고 주장하자 이에 대해 중국 공산당 팔로군 총사령 팽덕회가 이렇게 조언했다고 합니다.

“젊은 군들을 잘 설득해서 태극기를 높이 쳐들도록 하십시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나중에 할 일이고 우선 나라의 독립부터 해놓고 봐야지 않겠습니까.”

김학철 선생은 이게 크게 감동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는 『격정시대』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서술 가운데 여러 번 <태극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 당지의 력사적 사실이 바로 그러하였으므로 인위적인 변경을 삼가 하였다. 왜곡되거나 날조된 력사는 몇참 못가서 곧 들통이 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택동의 독재를 비판하다가 감옥살이를 했으니 중국 공산당에 대해 유감을 가질 만도 한데, 오로지 진실만을 위해 말하고 몸 바친 그의 올곧은 정신을 다시 확인케 하는 대목입니다. 

김학철 선생, 윤세주 등 의용대 다수가 태항산으로 갈 때 김원봉은 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중경 임정으로 가서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오래 앓다가 광복 직전에 사망합니다. 해방을 몇 년 앞둔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는 전사하고 김학철 선생은 총상을 입고 한 쪽 다리를 잃고 맙니다. 이렇게 김원봉은 사랑하는 부인과 둘도 없는 친구 윤세주와 영별하고 해방을 맞아 혈혈단신으로 귀국하였으나 독립투사로 칭송을 받기는커녕 친일 모리배들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합니다. 지난 윤세주 이야기를 읽으시고 인천 경인방송 이장열 PD님께서 김학철 선생님의 죽음에 얽힌 슬픈 사연을 보내 주셨습니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도 김학철과 같이 의용대 활동을 했던 동지입니다. 그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해방 직전 사망했습니다. 광복 후에 약산 김원봉은 아내의 유해를 들고 귀국하여 밀양 보광산 자락에 묻었습니다. 김학철 선생이 밀양을 방문하여 박차정 무덤 앞에서 동지로서 예를 다하고 중국으로 돌아간 뒤에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김학철 선생은 역사의 진실을 위해 자기 인생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김학철 선생의 『격정시대』는 버림받고 잊혀진 자들의 삶을 온전하게 담고 있는 진실의 역사로 읽혔습니다. 눈물짓게 만드는 공감의 역사 서술이란 곧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역사의 현장을 함께 들여다보며 서로 공감하듯이 간도, 연해주, 사할린의 동포들에게까지 공감대가 넓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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