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6년... 상처받은 자들의 아픔을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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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36년... 상처받은 자들의 아픔을 달래며
  • 이한수
  • 승인 2016.05.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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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15)광주항쟁 진혼가 변천사

5.18 광주항쟁 36주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세대가 훌쩍 지났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5.18은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킬까요. 아마 별 감동 없는 편년(編年)에 지나지 않겠지요? 구지 그 아픈 기억을 들추어낼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까요. ‘잊지 않겠다. 가만두지 않겠다’던 자들이 지금 다 어디에 가 있나요. 동족상잔 비극의 되풀이라 할 5.18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들 하는데 두 세대, 반 세기의 제자리 걸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기성세대인 저로서는 ‘잊지 말자’는 말 허투루 할 수가 없습니다.

뜻을 새기기 전에 공감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곁에 있는 친구와 죽이 맞듯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사는 게 더 의미심장해지지 않겠습니까. 80년 광주를 그린 영화와 소설들을 다시 보면서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 딴에는 제법 대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나 자신이 새로 태어나듯이 한 세대 전과의 극적 만남으로 내 삶의 화폭이 빛과 음영으로 깊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러분께도 이 드라마틱한 만남을 권합니다. 격동의 청춘 시절에 해당하는 [부활의 노래](1991)로 시작하여 가슴 찢어지는 결별의 트라우마 [꽃잎](1996)을 거쳐 미적(美的) 승화 [오래된 정원](2006)으로 이어지는 5.18 광주 팩션(팩트+픽션)의 성장사를 소개합니다.

영화는 소설과 따로 때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광주항쟁을 문자로 기록하거나 형상화한 작품으로 ‘황석영’의 르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을 고전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5.18을 그린 초기 영화는 이 작품들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여 기록한 르뽀이며 광주 만행을 저지른 권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1985년)에 은밀하게 제작 배포되었지만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읽혔습니다. 광주항쟁을 그린 소설로는 윤정모의 [밤길], 홍희담의 [깃발], 임철우의 [봄날], 박혜강 [꽃잎처럼]이 많이 읽혔는데 이중 [봄날]은 항쟁 열흘간을 다섯 권의 대작으로 그려낸 독보적인 작품입니다. 지금 소개할 진혼가들은 이 작품들에서 배태(胚胎)된 후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중민주주의 진혼가 [부활의 노래], [깃발]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퇴진하면서 광주 5.18 진혼가가 분출되기 시작하는데 [부활의 노래]는 극장에서 상영된 최초의 광주 진혼가였습니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들불야학’ 노동자 ‘박기순’이 실제 겪은 일을 바탕으로 1990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박관현’ 열사를 그린 인물 ‘철기’가 노동야학에서 일하기 시작하는 1978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야학에서 일하면서 민중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뜬 ‘철기’는 다니던 전남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나서고 비상계엄령이 떨어지자 도피생활을 시작합니다. 도피생활 중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나중에 만난 야학 친구 ‘현실’한테서 야학 선배 ‘태일’이 도청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책에 빠집니다. 노출 ‘현실’이 학출 ‘철기’를 위로하면서 이 둘은 서로 의지하게 되고 ‘기철’은 죄책감을 극복해 나갑니다.

 
[부활의 노래] ‘태일’의 죽음과 영혼 결혼식

영화 [부활의 노래]가 그린 노동야학생의 항쟁 참가 이야기는 이미 소설로 나와 있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의 시각으로 광주항쟁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평가받은 홍희담의 소설 [깃발]이 발표된 건 [부활의 노래]보다 2년 앞선 1988년이었습니다. [깃발]의 운동권 지식인 ‘윤강일’은 5월 21일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자 피신해 버립니다. 야학 학생이었던 ‘형자’와 ‘순분’은 이런 지식인의 나약한 기회주의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이 장면은 민중항쟁의 대의(大義)를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는데, [부활의 노래]에서는 구두닦이 ‘봉준’이 ‘먹물들은 말로는 민주화니 투쟁이니 해놓고 막상 일이 터지면 제일 먼저 도망간다’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 작품들이 형상화한 민중주체 이념은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쳐들어오기 직전 수습대책위가 지식인 중심의 무기반납파와 기층 민중 중심의 결사항전파로 나뉜 뼈아픈 사실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깃발]에서 야학 학생 ‘순분’이 도피중인 ‘윤강일’을 만나 위로하는 장면은 [부활의 노래]에서 ‘현실’이 ‘철기’를 찾아가 재회하는 장면과 겹칩니다. 이렇게 여러 장면이 겹치는 걸 보면 영화 [부활의 노래]가 소설 [깃발]을 원작으로 했다고 할 만합니다. 소설 [깃발]의 인물 ‘상원’은 항쟁 마지막 밤 도청에서 산화한 실존인물인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그린 것이고, 영화 [부활의 노래]에서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하다 아사(餓死)하는 ‘철기’는 실존인물 ‘박관현’ 열사를 그린 것입니다. 올해에는 5.18 기념식장에서 추모곡으로 불릴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부활의 노래]에서도 그린 ‘윤상원’과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되어 불리기 시작한 노래입니다.

영화 [부활의 노래]는 난산을 겪으며 1990년에 제작 완료되었지만 극장에 걸리지 못합니다. 노태우 정부에 의해 심의가 미루어지다가 몇 장면이 잘려나간 상태로 1991년에 개봉이 됩니다. 87년 항쟁 이후에 형성된 민중민주주의 민족통일 기운은 5공 청문회, 재야인사 방북 등으로 확대되었고 이런 기운에 위기를 느낀 노태우 정부는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펼칩니다. 공안정국이 조성된 1989년 그 다음 해에 광주 항쟁을 그린 [부활의 노래] 공윤 심의가 순탄할 리가 없지요. 2년 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원상 복원되어 다시 개봉되고 ‘이정국’ 감독은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받게 됩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 어떻게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합니다. 너무 선동(프로파간다)적이라 공감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 의기(意氣)만으로도 이 작품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상흔 [꽃잎]

[부활의 노래]가 그리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투철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투사들로 그  숭고한 헌신은 역사에 기록될 만합니다. 그에 반해 [꽃잎]이 그리고 있는 인물, ‘이름 없는 소녀’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소품 같은 존재입니다. 80년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 대부분은 이 소녀처럼 ‘이름도 남김없이’ 산화(散花)해 갔습니다. 늦은 봄 흩날리는 꽃잎처럼 말이지요. 소설 [깃발]에서 대학생 ‘윤강일’이 자기 동료 ‘상원’의 죽음을 내세우자, 노동자 ‘순분’이 "죽음조차도 윤 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라고 소리치며 화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5월 27일 진압군이 도청을 치고 들어올 때 끝까지 남아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기층 노동자 출신이고 지도부를 꾸렸던 지식인 학생들 대부분은 무기 반납을 주장하며 결국 도청을 빠져나갔습니다.

죽은 자들은 얼마나 원통할까요. 도망자 배신자로 낙인찍힌 자들은 또 얼마나 비참할까요.  [꽃잎]은 그 상처를 심리극 기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엄마와 함께 금남로 시위에 나갔다가 진압군의 총격에 엄마는 길바닥에 쓰러지고 유혈이 낭자한 엄마의 손은 그대로 굳어버립니다. 딸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엄마의 움켜진 손을 발로 짓이겨 떨쳐 내버리고 도망쳐 살아남지만 죄책감에 실성해 버리고 맙니다. 강가에서 우연히 만난 남정네를 오빠인 줄 알고 졸졸 따라가지만 막노동꾼은 미친 소녀를 떼어버리기 위해 갖은 학대를 다합니다. 그래도 소녀는 떨어질 줄 모릅니다. 어느 날 무덤 앞에서 신들린 듯 오열하는 소녀를 보고 그녀가 왜 미쳐 버렸는지 알게 됩니다.


[꽃잎] 엄마를 버리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으로 미쳐버린 소녀

[꽃잎]에서 그린 혈육 간의 상처는 5.18로 반복된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봄날]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붉은 산, 흰 새]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6.25 동란의 비극을 그렸는데, 이는 5.18의 비극이 6.25 동족상잔의 반복이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골육상잔(骨肉相殘)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으로 남아있습니다. 5.18의 골육상잔은 여러 작품에서 그려졌습니다. 5.18 기록문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임철우’의 대하소설 [봄날]에는 형제가 제각각 시민군, 진압군으로 나뉘어 서로 총질을 하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고,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에도 진압군으로 광주에 들어왔다가 눈앞에서 동생이 상관에 의해 사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미쳐 버리는 형이 등장합니다. 불의에 맞서 싸우자는 의기를 북돋우는 일도 의미 있겠지만 상처받은 자들의 아픔을 달래는 일도 꼭 필요합니다. 문학예술은 하나의 방편으로만 호명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5.18의 예술적 승화 [오래된 정원]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노라며 동지들과 어깨를 걸었다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이 겪었을 양심의 가책이 얼마나 쓰라렸을까요. 심리적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그들을 비겁자라고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느라,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겠지요. 죄책감 때문에 오막살이 소박한 살림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안일(安逸)로 여겨졌을 겁니다. [오래된 정원]은 그렇게,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소박한 정원을 등지고 제 발로 사지(死地)를 찾아 나서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곱고 착한 ‘윤희’와 너무나도 행복하게 함께했던 아름다운 정원을 뒤로 하고 동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녀와 함께라면 두메산골 오막살이도 고대광실(高臺廣室) 부럽지 않을 ‘영원한 정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래된 정원] 눈물겹게 아름다운 둘만의 정원


‘현우’는 도시로 나가 금방 붙잡히고 무기수가 되어 젊음을 고스란히 어두운 감옥에다 매장하고 백발이 되었지만 아름다운 정원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윤희’만 생각하면 아직도 설레는 청춘입니다. ‘윤희’는 ‘현우’의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르며 가슴에 한(恨)이 맺히지만 ‘현우’의 눈빛을 그리워하며 그가 돌아올 아름다운 정원을 지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일까요. ‘윤희’는 불치병에 걸리고 그와 그토록 행복했던 그 아름다운 정원에서 젊은 생을 마감합니다. 출옥한 ‘현우’가 오래된 정원에 와서 ‘윤희’가 남긴 일기와 그림으로 삶의 공백을 메워 나가는 장면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끔찍한 상잔(相殘)의 도가니로 뛰어들게 했을까요. [부활의 노래]에서, [꽃잎]에서 목격한 동지와 혈육 간의 뼈아픈 결별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을까요. 진리를 좇는다고 곁에 있는 모든 걸 버린 뒤에야 비로소 진짜 소중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부재(不在)가 존재(存在)를 일깨운다고 할까요. 사랑하는 내 님의 눈물, 그와 같이 깃들었던 보금자리만큼 소중하고 진실한 삶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래된 정원] ‘윤희’의 그림


소설 [오래된 정원]은 해외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입니다. 프랑스 문단에서 ‘위대한 소설’로 격찬을 받았으며, 『르몽드』 신문의 <2005 국내외 소설 7>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광주의 비극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 세계인을 울리는 보편성을 획득해낼 수 있었을까요. 작가는 방북(1989년)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귀국(1993년) 후 바로 투옥되고 5년 옥살이 뒤에 석방(1999년)되면서 바로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면서 그가 목도한 냉전체제 종식이 이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떠난 뒤에야 그리워지고, 잃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게 삶의 이치이듯이 눈물의 역사가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는구나 싶었습니다.

눈물로 부둥켜안을 때 진실한 관계가 맺어지고 그렇게 연인과 동지와 이웃이 얽혀 공동체가 이루지는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려면 서로 마주보고 눈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활의 노래] 진혼가는 논설(論說)로 들리고 눈빛들은 불칼 같은 의지를 쏘아내는 총구처럼 무섭습니다. [꽃잎]의 눈빛은 트라우마에 매몰되어 어느 누구와도 교감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된 정원]에는 눈으로 말하고 눈빛에 매료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감하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수가 있겠지요. 진실한 관계는 이렇게 맺어지고 그렇게 맺어지는 관계로 더불어 사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웃과 함께 자연에 어울리면서 말이지요. [오래된 정원]이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천명하는 건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하지도 않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이념의 시대, 21세기초 개인화 시대를 넘어 앞으로 공감의 시대를 열어 가자는 고운 눈빛으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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