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편 헌문(憲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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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편 헌문(憲問)
  • 이우재
  • 승인 2010.08.1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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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편 헌문(憲問)

1, 憲問恥. 子曰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헌이 부끄러움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고 있으면 봉록을 받는다. 그러나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는데도 봉록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해설> 헌(憲)은 공자의 제자인 원헌(原憲)으로, 자는 자사(子思)이다. 옹야 3에 나오는 원사(原思)와 동일 인물이다.
  옹야 3을 보면 원헌이 공자의 가재(家宰)가 되자 공자는 그에게 봉록으로 곡식 구백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원헌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또 『사기』 「중니제자열전」을 보면 원헌은 공자가 죽은 후 풀이 우거진 늪지대에 숨어살았다.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자공이 그를 찾아와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말하길 “병색이 엿보이는군요”라고 하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나는 ‘재물이 없는 사람을 가난하다고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고 들었소. 내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병들지는 않았소.”라고 하였다. 이후 자공은 죽을 때까지 그 때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또 『사기』 「유협(游俠)열전」은 원헌이 일생을 곤궁하게 살다가 죽었지만, 그 문도(門徒)들은 무려 4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받들어 모셨다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원헌이 청빈을 숭상하고 세속의 부귀영화에 초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장은 공자가 바로 이러한 원헌의 사람됨을 직시하고, 그에게 무조건 세상과 담을 쌓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면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라고 충고한 말이 아닐까? 그렇게 해석한다면 말의 중심은 邦有道 穀에 있다. 邦無道 穀 恥也는 원헌에게 봉록을 받는 것이 모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때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깨우쳐 주기 위한 말이다.
  다산은 “나라에 도가 행하여질 때도 봉록을 받고, 나라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풀이한다. 즉 나라야 어찌되던 말던 봉록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이다.

   <참고> 태백 13에서는 “나라에 도가 있음에도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를 누리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하고 있다.
  邦有道  … 邦無道 …하는 표현은 공야장 1, 20, 태백 13, 헌문 4, 위령공 6에도 보인다.

2,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 子曰 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남을 누르고, 자신을 자랑하며, 남을 원망하고, 탐욕을 부리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가히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나는 모르겠다.”

  <해설> 극(克)은 호승(好勝)으로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벌(伐)은 스스로 뽐내는 것(自矜)이다. 원(怨)은 남을 원망하는 것이요, 욕(欲)은 탐욕(貪慾)이다.
  극(克), 벌(伐), 원(怨), 욕(欲)을 하지 않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데 그칠 뿐이다. 인(仁)은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인(仁)은 보다 적극적으로 남과 서로 사랑하며 어울려 사는 것이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해 주며, 자기가 두루 통하고자 하면 남도 두루 통하게 해 주는 것(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옹야 28)이 인(仁)이다. 그러기에 공자가 인(仁)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克伐怨欲不行焉 可以爲仁矣가 누구의 말인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앞의 장과 연결지어 원헌의 말로 추정하고 있다.

3, 子曰 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선비로서 편안한 생활만 생각한다면, 족히 선비라고 할 수 없다.”

  <해설> 회거(懷居)는 일상 생활의 안락함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선비 된 자가 도(道)에 뜻을 두지 않고, 단지 일신의 안락함만 생각한다면 언제 도(道)를 이루겠는가? 선비라고 불리울 자격이 없다.

4, 子曰 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라에 도가 행하여진다면 말과 행동을 높고 당당하게 하고,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행동은 높고 당당하게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하라.”

  <해설> 위(危)는 높고 당당한 것(高峻)이다.
  나라에 도가 행하여진다면 말과 행동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높고 당당하게 한다. 그러나 도가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행동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시속(時俗)에 흔들리지 않고 높고 당당하게 하되, 말은 삼간다. 공연히 말로 인하여 쓸데없는 화(禍)를 입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군자는 항상 말이 앞서 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뒤집어 생각한다면 군자가 말을 삼가고 조심할 때는 이미 그 나라는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는 나라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 필화(筆禍), 설화(舌禍)가 많은 나라에서 정의를 찾을 수는 없다.

  <참고> 邦有道  … 邦無道 …하는 표현은 공야장 1, 20, 태백 13, 헌문 1, 위령공 6에도 보인다.

5, 子曰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말이 들을 만하지만, 말이 들을 만하다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진 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지마는, 용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

  <해설> 유언(有言)은 말이 들을 만한 것이다.
  덕이 있는 자는 그 말 속에 자연히 덕이 스며 나온다. 따라서 그 말이 들을 만하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자 중에는 간사하게 말만 잘하는 자(佞者)도 있다.
  용기는 의(義)를 으뜸으로 친다. 어진 자는 도(道)에 따라 살기 때문에, 의(義)를 보면 반드시 행한다. 따라서 용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 중에는 단지 혈기(血氣)만 방자한 자도 있다.
 
6, 南宮适問於孔子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而有天下. 夫子不答. 南宮适出. 子曰 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
  남궁괄이 공자에게 묻기를 “예는 활을 잘 쏘고, 오는 배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졌으나, 모두 제 명에 죽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와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으나, 천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공자께서는 대답이 없으셨다. 남궁괄이 물러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로구나, 저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저 사람은.”

  <해설> 남궁괄(南宮适)은 주자에 의하면, 자(字)는 자용(子容)으로, 공야장 1, 선진 4에 나오는 남용(南容)이 이 사람이다. 
  예(羿)와 오(奡)는 설화 속의 주인공으로, 그 자세한 내용은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4년에 그에 관한 약간의 내용이 전해질 뿐이다. 그에 의하면 예(羿)는 하(夏)나라의 제후로 유궁국(有窮國)의 군주였는데,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하나라의 임금 상(相)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찬탈하였으나, 부하인 한착(寒浞)에게 피살당하였다. 오(奡)는 『춘추좌씨전』에는 요(澆)로 되어 있다. 한착(寒浞)의 아들로 힘이 세어 육지에서 배를 잡아끌 정도였다고 한다. 뒤에 하나라 임금 소강(少康)에게 죽임을 당한다. 탕주(盪舟)는 힘이 세어 육지에서도 배를 끌 수 있다는 뜻이다.
  不得其死然은 제 명에 죽지를 못하고 남에 의해 피살당하는 것을 말한다. 선진 12에서도 자로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임을 말하면서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우(禹)는 하(夏)나라를 건국한 시조이다. 원래 순(舜) 임금의 신하였으나, 황하의 치수에 공을 세워, 순으로부터 왕위를 선양(禪讓)받았다. 직(稷)은 주(周)나라를 창건한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시조로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주자에 의하면, 남궁괄은 예와 오를 당대의 권력자에, 우와 직을 공자에 비유하였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남궁괄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물러가자 남궁괄이 우와 직의 덕을 숭상하고 있음을 칭찬한 것이라고 한다.   

7, 子曰 君子而不仁者有矣夫. 未有小人而仁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로서 어질지 못한 자는 있을 수 있으나, 소인으로서 어진 자는 없다.”

  <해설> 有矣夫는 늘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군자는 항상 인(仁)에 뜻을 두고 노력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인은 이익에 매달려 항상 남과 다투려고 하기 때문에, 인(仁)에 가까이 갈 수 없다.

8, 子曰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랑한다고 해서 걱정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충성한다고 해서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해설> 청(淸)의 유보남은 『논어정의』에서 노(勞)를 우(憂), 즉 걱정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고주의 공안국은 노(勞)를 위로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회(誨)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다.

9, 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里子産潤色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정나라에서는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 비심이 초안을 만들고, 세숙이 검토하여, 외교 담당인 자우가 첨삭한 후, 동리의 자산이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었다.”

  <해설> 비심(裨諶) 이하의 네 사람이 모두 정(鄭)나라의 대부(大夫)이므로, 정나라의 이야기다.
  위명(爲命)은 제후에게 보내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비심(裨諶)은 정나라의 대부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초창(草創)은 초안(草案)을 만드는 것이다. 세숙(世叔)은 정나라의 대부로 본명은 유길(遊吉)이다. 『춘추좌씨전』에는 자대숙(子大叔)으로 나와 있다. 토론(討論)은 검토하여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행인(行人)은 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다. 자우(子羽)는 정나라의 대부로 본명은 공손휘(公孫揮)다. 수식(修飾)은 글자를 더하거나 빼 고치는 것이다. 동리(東里)는 고을 이름이다. 자산(子産)은 정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공손교(公孫僑)로, 공야장 15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공자가 평소 존경하던 선배 정치가이다. 윤색(潤色)은 문장을 아름답게 다듬는 것이다.
  정나라는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나라였다. 따라서 외교는 나라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중신들이 이와 같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많은 마찰을 피해 갈 수 있었다.

10,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問子西. 曰 彼哉 彼哉.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어떤 사람이 자산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자서에 대해 물으니, 말씀하시길 “그 사람 말이냐, 그 사람?”
  관중에 대해 물으니, 말씀하시길 “어진 사람이다. 그가 백씨의 병읍 삼백 호(戶)를 빼앗았기 때문에, 백씨는 거친 밥을 먹게 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해설> 자산(子産)은 바로 앞 장에서 나온 그 자산이다. 혜인(惠人)은 다산에 의하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 공야장 15에서 공자는 자산에 대해 평가하기를 “백성을 부양함에 은혜를 베풀었고, 백성을 부림에는 의로웠도다(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라고 하였다. 자서(子西)에 대해서 고주의 마융은 정나라의 대부라고 하나, 주자는 초(楚)나라의 공자 신(申)이라고 하고 있다. 彼哉彼哉는 주자에 의하면 사람을 도외시하는 표현이다.
  관중(管仲)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팔일 22에도 나온 바 있다. 人也의 인(人)은 청의 주빈(朱彬)의 『경전고증(經傳考證)』에 의하면 인(仁)이다. 옹야 24에서도 사람을 나타내는 인(人)을 인(仁)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대에는 인(人)과 인(仁)이 서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人也에 대해서는 다른 해설도 많다. 주자는 人也의 인(人)을 이 사람(此人)이란 뜻으로 풀이한다. 고주에서는 『시경』 진풍(秦風) 겸가(蒹葭)와 소아(小雅) 백구(白駒)편에 보이는 이인(伊人), 즉 현자(賢者)라고 풀이한다. 우리 나라의 다산은 人也 앞에 글자 하나가 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백씨(伯氏)는 제나라의 대부이다. 병읍(騈邑)은 지명이다. 반소사(飯疏食)는 거친 밥을 먹는 것이니, 곤궁한 생활을 뜻한다. 몰치(沒齒)의 치(齒)는 년(年)으로 죽을 때까지란 뜻이다. 백씨의 병읍을 빼앗은 관중의 조치가 정당하였기에, 그것을 수긍한 백씨는 평생토록 원망의 말이 없었다. 관중의 정치가 공평무사했음을 나타낸 말이다.

  <참고> 관중에 대해서는 팔일 22, 헌문 17, 18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11,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만,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해설>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은 사람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가난하면서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군자가 아닐까?(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술이 15)
  안연은 가난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을 하는 즐거움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옹야 9). 또한 자공은 부유한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았다(학이 15). 이런 안연과 자공을 두고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서 진(晉)의 강희(江熙)는 안연의 원망이 없는 경지는 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나, 자공의 교만하지 않는 경지는 가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참고> 학이 15에서 자공은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여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겠냐고 공자에게 묻고 있다.
  
12, 子曰 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맹공작은 조씨나 위씨의 가신이 되기에는 충분하지만, 등나라나 설나라의 대부는 될 수 없다.”

  <해설> 맹공작(孟公綽)은 노나라의 대부이다. 바로 뒤의 13장에 의하면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조(趙)와 위(魏)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지방인 진(晋)나라의 대부이다. 커다란 영지를 갖고 있던 상당히 유력한 가문으로, 나중에 진(晋)나라를 분할하여, 각각 전국(戰國) 시대 칠웅(七雄)의 하나인 조(趙)나라와 위(魏)나라를 세웠다. 노(老)는 가신(家臣)이다. 등(滕)과 설(薛)은 각각 노나라의 이웃에 있던 작은 제후국이다.
  조씨와 위씨는 비록 그 차지하고 있는 영지가 크다고 하나, 제후의 가신일 뿐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집안 일이 있을 뿐이지, 나라의 일(國事)은 없다. 그러나 등과 설은 비록 영토는 작다고 하나, 분명한 제후국으로서 국사(國事)가 있다. 맹공작은 그 그릇이 작아 국사를 담당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말이다.
 
13, 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冉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 曰 今之成人者 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자로가 성인(成人)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만일 장무중의 지혜와 공작의 무욕(無慾), 변장자의 용기, 염구의 재주를 갖추고, 예(禮)와 악(樂)으로써 꾸민다면 가히 성인(成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지금의 성인(成人)이야 어찌 그렇겠는가? 이익을 눈앞에 두고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내놓으며, 오랜 약속에 대하여 평소에 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成人)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해설> 성인(成人)은 완전한 사람(全人), 즉 인격이 완성된 사람을 말한다. 장무중(臧武仲)은 노나라의 대부 장손흘(臧孫紇)이다. 공작(公綽)은 바로 앞의 12장에서 나온 그 맹공작이다. 변장자(卞莊子)는 노나라 변(卞)읍의 대부이다. 염구의 재주에 대해서는 옹야 6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求也藝). 문(文)은 꾸미는 것이다.
  지혜와 청빈, 용기, 재주를 갖춘 후, 예로써 절제하고 악(樂)으로써 조화를 꾀한다면 가히 완전한 인격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見利思義는 이익을 눈앞에 두고,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見危授命의 위(危)는 나라의 위급한 일, 수명(授命)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이다. 구요(久要)는 오랜된 약속이고, 평생지언(平生之言)은 평소에 한 말이다.
  공자는 옛것을 숭상하는 사람이다. 그의 이상향은 멀리 주공(周公)이 다스렸다는 그 시대이다(술이 5). 따라서 그에게 오늘날의 사람이란 항상 옛사람들에 비해 부족하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성인(成人)은 위와 같이 높은 자격이 요구되었지만, 오늘날의 각박한 현실에서는 그렇게까지 요구할 수 없다. 그저 사욕에 눈이 어둡지 않고,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며, 말에 신의가 있으면 족히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今之成人者 이하는 현실에 대한 그러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신주에서 호인(胡寅)은 今之成人者 이하를 자로가 한 말로 본다. 
  한편 다산은 이 장(章)을 공자가 자로를 꾸짖은 말로 보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장무중의 지혜, 공작의 무욕, 변장자의 용기, 염구의 재주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로는 자신이 이 네 가지를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이에 공자가 네가 비록 보잘 것은 없으나, 만일 예악으로 나아간다면, 능히 성인(成人)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가르친 것이라고 한다.

14, 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공자께서 공숙문자에 대하여 공명가에게 물으시기를 “정말입니까? 그분은 말씀이 없고, 웃지도 않으며, 재물을 받지도 않으신다는 말이.”
  공명가가 대답하여 말하길 “그 말을 전한 사람이 지나쳤습니다. 그 분은 때가 된 연후에야 말씀하시므로, 사람들이 그 분의 말씀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즐거워할 만한 이치가 있은 연후에야 웃으시므로, 남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것임을 아신 연후에야 재물을 받으시므로, 남들이 그 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단 말입니까? 어찌 그럴 수 있으리오.”

  <해설> 공숙문자(公叔文子)는 위(衛)나라의 대부로 고주의 공안국에 의하면 공손발(公孫拔), 주자에 의하면 공손지(公孫枝)다. 문(文)은 시호(諡號)다. 공명가(公明賈)는 위나라 사람이란 것 이외에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其然 豈其然乎는 의심하는 말이다. 공숙문자의 사람됨이 비록 훌륭하다고 하나, 공명가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다산은 其然은 공자가 공명가의 말을 듣고 그 실상을 알게 됨이 기뻐서 한 말이고, 豈其然乎는 지난 날 들은 말(不言不笑不取)이 사리에 맞지 않았음을 깨달아 한 말이라고 보고 있다. 다산을 따라 해석한다면 “그렇겠지요, 어찌 그랬을 리 있겠습니까?”가 된다.
 
15,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무중은 방(防)읍에서 농성하며 노나라에 자신의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비록 남들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강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나는 믿지 못하겠다.”

  <해설> 장무중은 앞의 13장에서 지혜가 출중한 인물로 언급한 바 있다. 방(防)은 장무중의 집안이 대대로 이어받은 영지(領地)다. 위후(爲後)는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고, 요군(要君)은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장무중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맹손(孟孫)씨의 참소를 받고 주(邾)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영지가 있는 방(防)으로 몰래 잠입하여 그곳을 점거하고, 조상의 제사를 이을 수 있도록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말은 공손하였지만 여차하면 반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요구는 받아들여져 배 다른 형인 장위(臧爲)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무중은 방읍을 떠나 제(齊)나라로 망명하였다. 노나라 양공(襄公) 23년의 일로 『춘추좌씨전』에 기록되어 있다.
  누군가가 말하길 무중이 온순한 말로 자신의 후계자를 세워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임금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던 것 같다. 이에 공자가 그 실상이 방읍을 근거로 삼아 임금에게 강요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16, 子曰 晉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진(晋)나라 문공은 권도를 쓰고 정도를 쓰지 않았다. 제(齊)나라 환공은 정도를 쓰고 권도를 쓰지 않았다.”

  <해설> 진문공(晋文公)은 이름은 중이(重耳)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인 진(晋)나라의 군주였다. BC 636년에 즉위하여 628년에 사망하였다.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제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覇者)가 되었다. 제환공(齊桓公)의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지금의 산동성 일대인 제(齊) 나라를 BC 685년에서 643년까지 다스렸다. 춘추오패의 시초이면서 또한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다.
  휼(譎)은 권(權)으로, 일상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시의에 따라 경중(輕重)을 헤아려 행하는 권도(權道)를 말한다. 주로 일상적인 원칙이 통용되지 않는 비상시에 많이 쓰인다. 정(正)은 평상시에 쓰는 정치의 상도(常道)이다. 즉 진문공은 비상시의 권도(權道)에는 능했으나 일상적인 정치의 상도에는 취약했고, 제환공은 정치의 상도에는 능했으나 권도에는 약했다는 뜻이다. 청(淸)의 왕인지(王引之)의 『경의술문(經義述聞)』, 송상봉(宋翔鳳)의 『논어발미(論語發微)』,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 등 주로 청유(淸儒)들이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고주와 신주에서는 휼(譎)을 사(詐)나 궤(詭)로 풀이하여 남을 속이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진문공은 남을 속이고 올바르지 않았으나, 제환공은 올바르고 남을 속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 고주의 정현은 진문공이 지금의 하남성 영양(榮陽)현 일대인 천토(踐土)로 천자를 불러 들여 제후로 하여금 알현케 한 후 회맹(會盟)을 맺은 것을 들고 있다. 즉 진문공이 천자와 제후들을 기만하였다는 것이다.
 
17,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자로가 말하길 “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은 함께 따라 죽었으나, 관중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환공이 제후를 규합하되, 무력에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 관중의 공이었다. 누가 그의 인(仁)만 같겠는가? 누가 그의 인(仁)만 같겠는가?”

  <해설> 공자 규(糾)는 제나라 희공(僖公)의 아들로, 환공과 함께 양공(襄公)의 동생이다. 신주의 정자(程子)는 환공이 형이라고 하나,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의하면 규가 형이다. 양공이 포악무도하여 공자 규는 관중, 소홀(召忽)과 함께 노나라로, 후일의 환공인 공자 소백(小白)은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거(莒)로 망명하였다. 양공이 죽자 소백이 먼저 제나라로 돌아가 군주가 되었다. 그가 제환공이다. 공자 규는 노나라의 지원을 받아 환공에게 도전하였으나 전쟁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소홀 또한 공자 규의 뒤를 따라 자살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포로가 되어 제나라로 압송되었다. 평소 관중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포숙아는 관중을 죽이기는커녕 환공에게 천거한다. 마침내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환공을 도와 패업(覇業)을 이루었다.
  구합(九合)의 구(九)는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규(糾)이다. 즉 흩어져 있는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주자의 설(說)이다. 그러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는 환공의 주도로 이루어진 아홉 번의 회맹(會盟)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병거(兵車)는 무력이다. 如其仁은 주자에 의하면, 誰如其仁, 즉 아무도 관중의 인(仁)에 비견될 수 없다는 뜻이다. 고주도 같다.
  성격이 단순한 자로는 관중이 소홀처럼 자신이 섬기고 있던 공자 규를 따라 순사하지 않은 것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신의를 저버린 것으로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리라.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자로의 기대와는 달랐다. 비록 자신이 섬기던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지 못한 잘못은 있다고 하나, 무력에 의하지 않고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그 공은 실로 크다. 작은 절개(小節)는 잃었으나, 천하의 큰 공(大業)을 세운 것이다. 천하 만백성의 삶을 안정시켰으니 이것보다 더 큰 인(仁)이 어디에 있겠는가?
  작은 절개(小節)와 큰 공(大業)에 관한 문제이다.

  <참고> 관중에 대해서는 팔일 22, 헌문 10, 18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18,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자공이 말하길 “관중은 어질지 못한 사람이지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일 때 따라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돕기까지 하였으니 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하고, 천하를 하나로 바로잡았다. 백성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입고 있다. 만일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랐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고지식함과 같겠는가?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죽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해설> 패제후(覇諸侯)는 뭇 제후들의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고, 일광(一匡)은 하나로 바로잡는 것이다. 미(微)는 무(無)로, 만약 …이 없었더라면의 뜻이다. 피발(被髮)은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이고,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것으로, 모두 오랑캐의 풍습이다. 다산은 피발을 변발(辮髮), 즉 만주인들처럼 머리를 뒤로 길게 따 늘인 것이라고 한다. 춘추오패(春秋五覇)라 불리우는 패자들은 모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치로 내세웠다. 존왕(尊王)이란 주왕실을 받들어 천하의 정치를 안정시키는 것이요, 양이(攘夷)란 제후들과 힘을 합쳐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다. 一匡天下,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는 바로 그 존왕양이를 나타내고 있다.
  필부필부(匹夫匹婦)는 보잘 것 없는 서민을 말하며, 량(諒)은 작은 신의에 얽매이는 고지식함이다. 경(經)은 목을 매는 것, 구독(溝瀆)은 작은 도랑이다. 주자의 해설을 따랐다. 그러나 명(明)의 왕부지(王夫之)는 『사서패소(四書稗疏)』에서 구독(溝瀆)이 지명으로, 소홀과 공자 규가 죽은 곳이라고 주장한다. 청의 황식삼(黃式三)은 왕부지의 주장을 이어받아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바로 구독에서 죽은 소홀을 지칭한다고 『논어후안(論語後案)』에서 밝히고 있다.
  자공도 자로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관중이 공자 규와의 신의를 저버린 일이 당시 꽤나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공자의 대답은 시종 같다. 관중의 작은 허물을 보지 말고 그가 천하 만백성에게 끼친 큰 공을 생각하라고.
  팔일 22를 보면 공자는 관중이 그릇이 작다고 하면서, 그가 사치를 좋아했고, 예 또한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관중은 공자 규와의 신의도 지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하 만백성에게 끼친 공적은 실로 지대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주의 정치 체제를 안정시켰으며, 오랑캐로부터 중국을 보호하였다. 그는 진실로 천하 만백성에게 널리 베푼 것이다. 옹야 28에서 공자는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능히 무리를 구제한다면 인(仁)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인(聖人)일 것이며, 요순도 그것을 어려워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큰 공을 작은 허물에 가리워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작은 절개에 연연하지 않는 공자의 넓은 기풍을 알 수 있다.  

19, 公叔文子之臣大夫僎 與文子同升諸公. 子聞之曰 可以爲文矣.
  공숙문자의 가신인 대부 선이 문자와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였다. 공자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시길 “가히 시호를 문(文)이라고 할 만하다.”

  <해설> 제(諸)는 之於를 줄인 것이고, 공(公)은 공조(公朝) 즉 제후의 조정이다.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인 대부 선(僎)이 유능함을 알고, 그를 조정에 천거한 것이다. 문(文)이라는 시호(諡號)는 시호 중 최상의 것 중 하나로 학문에 공적이 있거나, 덕으로 백성을 평안하게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청(淸)의 육롱기(陸隴其)의 『사서곤면록(四書困勉錄)』에 인용된 오인지(吳因之)의 말에 의하면 남의 신하가 된 자에게는 두가지 병폐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후배가 현명하여 이후 나보다 공이 많을 것을 꺼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스스로를 존대하고 남을 천하게 여겨 자기와 동렬에 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신주에 인용된 홍흥조(洪興祖)의 해설에 의하면 공숙문자가 대부 선을 조정에 천거한 것은 첫째로 남의 능력을 알아 본 것이요, 둘째로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 것이고, 셋째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다. 따라서 그 시호를 문이라 할 만한 것이라고 한다.

20, 子言衛靈公之無道也. 康子曰 夫如是 奚而不喪. 孔子曰 仲叔圉治賓客 祝駝治宗廟 王孫賈治軍旅 夫如是奚其喪.
  공자께서 위령공의 무도함에 대해 말씀하시자, 계강자가 말하길 “그러면서 어떻게 임금의 지위를 잃지 않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숙어가 외교를, 축타가 종묘의 제사를, 왕손가가 군사를 맡아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어찌 임금의 지위를 잃겠습니까?”

  <해설> 상(喪)은 임금의 지위를 잃는 것이다. 중숙어(仲叔圉)는 공야장 14에 나온 바 있는 공문자(孔文子)이다. 축타(祝鮀)는 옹야 14에서 나왔다. 말재간이 좋다고 하였다. 왕손가(王孫賈)는 팔일 13에서 나왔다.
  공자 시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제사와 군사 문제였다. 제사는 국가의 공동체적 일체감의 조성을 위하여 필요하였고, 군사 문제는 국가의 존속을 위한 것이었다. 외교는 군사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 사항이다.
  위령공이 비록 무도하였으나, 위와 같이 유능한 사람들이 각각 외교, 제사, 군사 문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지위에서 쫓겨나지 않았던 것이다.

21, 子曰 其言之不怍 則爲之也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말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 그것을 행하기가 어렵다.”

  <해설> 작(怍)은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말이 진실하면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주를 따랐다..
  주자는 “말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 말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해석한다. 말을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이다. 

22,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 公曰 告夫三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之三子告 不可.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진성자가 제나라 간공을 시해하였다. 공자께서 목욕재계하시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에게 말씀드리길 “진항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였습니다. 청컨대 그를 토벌하십시요.”
  애공이 말하길 “저 세 사람에게 말해 보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대부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임금께서는 ‘저 세 사람에게 말해 보시오.’라고 하시는구나.”
  세 사람에게 가서 고하셨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대부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설> 진성자(陳成子)는 제(齊)나라의 대부 진항(陳恒)으로, 전상(田常)이라고도 불리운다. 그가 자신의 임금인 제간공(齊簡公)을 시해한 것은 공자가 죽기 2년 전인 BC 481년, 노나라 애공(哀公) 14년의 일이다.
  목욕(沐浴)은 목욕재계하는 것이다. 공자가 목욕재계한 것은 임금을 시해한 자를 토벌하는 것이 그만큼 국가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자(三子)는 노나라의 실권자들인 삼환(三桓), 즉 계손(季孫)씨, 숙손(叔孫)씨, 맹손(孟孫)씨를 가리킨다. 애공이 실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삼환씨에게 미룬 것이다.
  以吾從大夫之後는 대부의 말석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권한은 없지만, 나라의 정치에 책임이 있는 대부의 신분으로서 공자는 진항의 시역(弑逆)을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君曰 告夫三子者는 애공에 대한 공자의 실망감을 나타낸 말이다. 애공이 직접 삼환에게 지시하면 될 일을, 공자보고 찾아가서 고하라고 시킨 것이다. 임금의 명이라 따르면서도 공자는 정녕 내키지 않았으리라.
  삼환씨가 거절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진성자와 마찬가지로 노나라의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성자를 토벌하는 것은 자칫하면 자기 자신에게 활시위를 겨누는 꼴이 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거절의 대답을 들은 공자는 다시 말한다. 자기가 고한 것은 그래도 대부인지라 나랏일을 못 본 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공자의 답답한 마음을 나타낸 말이다. 
  아무튼 진성자의 시역이 있고 약 100년이 지난 후 제나라는 결국 진씨(田씨라고도 불리운다)에게 찬탈당하고 만다. 진성자의 증손자인 전화(田和)가 강태공(姜太公)의 후예로부터 제나라를 빼앗아 스스로 임금이 된 것이다.
 
  <참고> 以吾從大夫之後라는 표현은 선진 7에도 보인다.    

23, 子路問事君. 子曰 勿欺也 而犯之.
  자로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속이지 마라. 그리고 임금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옳은 말을 간하여라.”

  <해설> 기(欺)는 속이는 것이다. 범(犯)은 안색(顔色)을 범하는 것이니, 임금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옳은 말을 간하는 것이다.
  『예기』 「단궁(檀弓)상」편에 부모를 섬기는 데는 감추는 것은 있으나 범(犯)하는 것은 없으며(事親 有隱而無犯), 임금을 섬기는 데는 범(犯)하는 것은 있으나 감추는 것은 없다(事君 有犯而無隱)는 말이 있다. 부모는 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임금은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24,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

  <해설> 고주에서는 상(上)을 본(本), 하(下)를 말(末)이라고 하고, 황간의 『논어의소』에서는 인의(仁義), 재리(財利)라고 한다.
  다산은 상달(上達)을 풀이하기를 군자가 나날이 덕으로 나아가 마침내 최상(最上)의 단계에 오르는 것, 하달(下達)을 풀이하기를 소인이 이(利)를 추구하다가 나날이 퇴보하여 마침내 최하(最下)의 단계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 헌문 37에 下學而上達이라는 말이 있다.

25,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날의 배우는 자는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고, 지금의 배우는 자는 남을 위하여 공부한다.”
 
  <해설> 위기(爲己)는 자신을 위하는 것, 즉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것이고, 위인(爲人)은 남을 위한 것,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갈고 닦기 위해 공부하였으므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며(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학이 1), 허물을 자기에게서 찾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위령공 20). 오늘의 학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공부하므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하며, 허물을 남에게서 찾는다.

26, 蘧伯玉使人於孔子. 孔子與之坐而問焉曰 夫子何爲. 對曰 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使者出. 子曰 使乎 使乎.
  거백옥이 공자께 사신을 보냈다. 공자께서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시면서 묻기를 “그 분께서는 어찌하고 계신가?”
  대답해 말하길 “그 분께서는 허물을 적게 하고자 애쓰고 계십니다만 아직 잘 안되고 있습니다.”
  사자가 물러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훌륭한 사자로군, 훌륭해.”

  <해설> 거백옥(蘧伯玉)은 위나라의 대부, 거원(蘧瑗)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주로 거백옥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與之坐는 사자에게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부자(夫子)는 신분이 있는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使乎使乎는 사자로서 훌륭함을 칭찬한 말이다.
  거백옥의 사자는 주인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다. 이에 공자가 그를 칭찬한 것이다.
 
27,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지위에 있지 않고서는, 그 정사를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 태백 14에 같은 말이 있으며, 바로 뒤의 헌문 28에서는 같은 내용의 말을 증자가 하고 있다.
 
28, 曾子曰 君子思不出其位.
  증자가 말하길 “군자의 생각은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설> 바로 앞 장과 같은 내용의 말이다.
  『주역』 간괘(艮卦) 상전(象傳)에 君子以思不出其位라는 말이 있다. 이(以)가 더 있을 뿐, 똑같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증자가 『주역』을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술이 16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마 당시 전해지던 숙어(熟語)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고> 태백 14, 헌문 27에 같은 내용의 말이 있다.
 
29, 子曰 君子恥其言而過其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그 말이 그 행동보다 지나친 것을 부끄러워한다.”

  <해설> 주자는 치(恥)를 감히 다하지 못하는 것, 과(過)를 남음이 있는 것으로 풀이하여, “군자는 그 말은 다하지 않고, 그 행동은 남음이 있고자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무리가 있다.

  <참고>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학이 14, 위정 13, 이인 22, 24, 헌문 21 등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30, 子曰 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子貢曰 夫子自道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에게 도(道)가 셋 있으나, 나는 능히 실천할 수 없다. 어진 자는 걱정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의혹에 빠지지 않으며,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공이 말하길 “선생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해설> 夫子自道也의 도(道)는 말하는 것(言)이다.
  공자가 자신은 능히 실천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겸손의 말이다. 역시 자공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참고> 자한 28에도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라는 말이 있다.

31, 子貢方人. 子曰 賜也賢乎哉. 夫我則不暇.
  자공이 남을 비교하여 평가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는 현명도 하구나. 나는 그럴 여가가 없는 데.”

  <해설> 방(方)은 비(比)로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말재주도 좋고(言語宰我子貢―선진 2), 돈 버는 데도 뛰어났던(賜不受命而貨殖焉―선진 18) 자공은 남의 인물됨을 비교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좀 별스러운 취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선진 15에서도 자장과 자하를 비교하여 누가 더 나은가 공자에게 묻고 있다. 그 때는 공자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스승으로부터 호되게 야단맞고 있다. 자신을 연마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거늘 어찌 남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가질 여가가 있느냐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자기보다는 남에게 더 관심이 많았기에,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도저히 안회를 쫓아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공야장 8).
 
32,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무능함을 걱정하라.”

  <참고> 같은 취지의 말이 모두 4번 나온다. 학이 16, 이인 14, 위령공 18, 그리고 여기다. 그만큼 공자가 중요시한 것이다.

33, 子曰 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경계하지 않고, 또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억측하지 않으면서도, 먼저 깨닫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해설> 不逆詐의 역(逆)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미리 예견하는 것, 사(詐)는 남이 나를 속이는 것으로,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경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不億不信의 억(億)은 억측하는 것, 불신(不信)은 내 말을 남이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내 말을 남이 믿지 않을까 미리 억측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실한 사람이라면 남에게 거짓을 말하지도 않지만, 또한 남의 말에 대해 의심을 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남이 자기를 속이려 하거나 또는 남이 나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 아닐까? 신주에 입각하여 풀이했다.
  고주의 공안국은 抑亦先覺者 是賢乎를 신주와는 정반대로 “인정을 먼저 깨닫는 자를 어찌 현명한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오히려 남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34, 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與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
  미생무가 공자를 보고 말하길 “구(丘)는 어찌하여 그렇게 정처 없이 다니는가? 말재주나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감히 말재주나 부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루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해설> 미생무(微生畝)는 미생(微生)이 성이고, 이름은 무(畝)이다. 공자를 구(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공자보다 연장자라고 생각된다. 서서(栖栖)는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에 의하면 황황(皇皇)으로 정처 없이 다니는 모양을 나타낸다.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후에게 유세를 다니는 모습을 미생무가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위녕(爲佞)은 말재주나 부리는 것이고, 無乃 … 乎는 …이 아닌가라는 뜻의 구문이다. 질(疾)은 미워하는 것이고, 고(固)는 고루(固陋)함이다.
  미생무는 세상으로부터 은거한 은자(隱者)로 추측된다. 현실의 추악함으로부터 도피한 사람이다. 그런 미생무의 입장에서 볼 때, 공자는 되지도 않을 일을 갖고 돌아다니면서 말재주나 부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의 대답은 온순하다. 세상이 고루해서 그 고루함을 고치려고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고(固)를 세상의 고루함이라고 본 것은 고주의 포함(包咸)의 설을 따랐다.
  주자는 고(固)를 한가지를 고집하여 통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한다. 미생무의 고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미생무에게 따끔하게 반격을 가한 것이 된다.

  <보충> 헌문 편과 미자 편에는 미생무와 같은 은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공자의 현실에 대한 의욕을 비웃는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식인의 냉소적 현실도피주의다.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점차 발전하여 후일 전통 시대 중국 사상계를 유가와 더불어 양분한 도가(道家) 사상으로 합류하여 간다. 공자 당시의 세상이 이미 공자 자신조차도 떠나고 싶어할 정도로(道不行 乘桴浮於海―공야장 6) 어지러웠기 때문에, 아마 이렇게 도가 사상의 선구자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술이 16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공자가 노자로부터 예를 배웠다던가, 노자가 세상을 은거하기 위하여 함곡관(函谷關)을 나서면서 『도덕경(道德經)』을 지었다고 하는 일화는 전설에 불과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우선 논어 안에 노자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공자가 자신 이전과 그리고 그 당시의 수많은 인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고 어찌 보면 노자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은자들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면서, 자신에게 예를 가르쳤다는 노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수긍이 안 된다. 공자가 노자를 몰랐다는 것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역사학계에서는 노자를 가공의 인물로 보고 있으며, 『도덕경』의 성립 연대를 공자 이후인 전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공자가 노자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설화는 도가의 사상가들이 사상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논어에 언급된 이들 은자들이 도가의 사상적 원류임은 분명하나, 이들에 관한 설화도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우선 그들 은자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공자의 사상과 배치되는 이들 은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왜 논어에 실려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논어에 나오는 이들 은자들은 하나같이 고고한 자세로 공자를 아래로 내려보고 있다. 논어 안에서 공자보다 이들 은자들이 더 당당하고 고고해 보인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은자들에 관한 설화를 전부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부 인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은 더욱 더 곤란한 일이고. 

35, 子曰 驥 不稱其力 稱其德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천리마는 그 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칭찬하는 것이다.”

  <해설> 기(驥)는 천리마이다. 칭(稱)은 칭찬하는 것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루에 천리를 가서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천리마가 달리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천리마라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아무리 좋은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위하여 그 좋은 재주를 쓰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36,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어떤 사람이 말하길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다면 덕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갚겠소?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덕으로 덕을 갚아야 합니다.”

  <해설> 以德報怨은 지금 전해지는 노자의 『도덕경』 63장 은시(恩始)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혔듯이 아마 당시 전해 오던 숙어였을 것이다. 덕(德)은 여기서는 선의(善意), 은혜(恩惠)의 뜻이다. 직(直)은 사랑하고, 미워하며, 취하고, 버림에 있어, 한결같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보통 이상의 인격, 아니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그 드넓은 사랑에 아마 감동했으리라. 그러나 공자는 달랐다. 그 말이 갖고 있는 맹점을 짚은 것이다. 그렇다면 덕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갚아야 하느냐고. 덕과 원한에 대해 똑같이 대한다면 이 세상에 덕과 원한을 구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다.
  남의 은혜를 모르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다. 따라서 덕에 대해서는 반드시 덕으로 갚는다. 그러나 원한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선의로 대하거나, 또는 반드시 그만큼 응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정하게 있는 그대로 살펴본 후 그에 맞는 대응을 취해야 한다. 남의 고의적인 악의(惡意)에 대해서까지 무조건 덕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의(義)를 해치는 것이다.
  『도덕경』에 이 구절이 실린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도가(道家)에 의하면 인간 세상의 모든 선악(善惡)은 모두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것은 없다. 모두 자연(道)의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을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으로 분류하고 판단할 뿐이다. 도(道)를 터득한 사람이라면 자연의 이치에 따라 행동하므로 누구에게 해(害)를 가할 리도 없고, 또 누구에게 원(怨)을 품을 리도 없다. 성인(聖人)이 하는 일은 그 모두가 도(道)이며, 덕(德)이다. 따라서 원(怨)이거나 덕(德)이거나 간에 모두 자연의 도(道), 즉 덕(德)으로 대하는 것이다.
  도가의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는 입장과 유가의 현실 중심적 윤리관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또한 以德報怨은 마태복음 5장 39절의 “누구든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 대라”는 예수의 말을 연상케 한다.    
 
37,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자공이 말하길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남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달하였으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뿐이리라.”

  <해설> 유명한 공자의 막지지탄(莫知之歎)이다.
  하학(下學)은 아래로 인간 세상의 일(人事)을 배우는 것이고, 상달(上達)은 위로 천명(天命)을 깨닫는 것이다. 즉 인간 세상의 일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그 근본 원리인 천명(天命)을 깨우쳤다는 뜻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려던 공자의 꿈은 세인들의 몰이해 속에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누구도 공자의 그 높은 이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절망감 속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말년의 공자를 모시고 있던 자공이 그런 공자를 위로하려고 말한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자는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불행한 자신의 운명(天)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도 탓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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