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와 걸었던 거리, 이젠 온 가족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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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와 걸었던 거리, 이젠 온 가족이 함께
  • 서진완
  • 승인 2016.08.3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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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까지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스페인의 중부를 관통해서 포르투갈까지


안도라 국경으로 가는 길. 지나는 곳곳이 절경이다. © 서진완


안도라(Andorra)공국으로 가는 길도 국도를 이용했다. 눈이 덮인 피레네산맥 사이로 이어진 꼬불꼬불 산길을 조심조심 운전했다. 지나는 곳곳이 절경인지라 여러 차례 차를 세워서 카메라에 그 절경을 담았다. 안도라는 피렌체산맥에 형성된 7개 마을에 8만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공국이다. 면적은 작지만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아름다웠고 평화롭다. 주민 전체가 카톨릭교를 믿는데, 관광이 국가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아빠, 술 안사세요?” 면세혜택으로 인해 인근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이곳으로 쇼핑을 많이 온다고 했는데 과연 가게마다 술과 담배가 가득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약 4만 불에 육박한다고 하니 꽤 높은 생활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라고 하기에는 정말 작은 규모다. “기름도 넣고 가지요?” 면세지역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마을을 내려오자 스페인 국경이 나타났고, 도로에 표시된 제한속도가 낮아졌다. 이곳에서 완만하게 피레네산맥을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레이다(Lleida)까지 이어졌다. 레이다에서도 그랬지만 사라고자(Zaragoza)에서도 꼭 성당을 보고 가기로 했다. 특히 사라고자는 옛 아라곤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시내 중심가를 흐르는 에브로(Ebro)강변 옆에 위치한 바로 필라(Pillar)대성당은 4개의 탑으로 둘러싸여 있고 특히 교회돔에 장식된 독특한 색채타일이 특징적인 곳이다. 이 대성당은 세계최초로 성모마리아가 나타난 장소로서 그 의미를 담아 성모마리아에 헌정된 성당으로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에브로강에서 바라본 필라대성당의 모습 © 서진완

아이들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물었더니, 비밀이란다. 대성당 내부에는 고야의 프레스코화와 시민전쟁 당시 지붕을 뚫고 떨어졌으나 기적적으로 불발된 두개의 포탄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고야의 작품인지 그리고 떨어진 포탄은 어디에 있는지 엄숙한 곳인지라 물어볼 수도 없다. 광장으로 나오자 고대 로마극장의 흔적과 사라고자의 상징물인 사자상이 위치해 있는 석조다리가 보였다. 큰아이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조개모양 이정표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반가워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스페인 중부지방의 황량한 들판이 오히려 다정하게 다가왔다.

마드리드(Madrid), 톨레도(Toledo), 리스본(Lisbon)은 5년 전 큰아이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걸을 때 함께 왔던 곳이기 때문에 그 때 함께 갔었던 장소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한편, 우리 가족 전체가 함께 보는 것으로 동선을 잡았다. 

 

마드리드 왕궁의 모습이다. © 서진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앞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 서진완

우리는 시벨레스광장(Cibeles Square)에 있는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광장으로 나왔다. 마드리드 시내의 상징적인 곳으로 마드리드광장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이곳에서 독립광장(Independence Square)으로 걸어가서 광장에 있는 알깔라문(Pueta de Alcala)을 보면서도 큰아이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도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당시 이곳에서 6시 이후 무료입장이라는 것 때문에 그때가지 기다리면서 이 주위를 둘러본 기억을 되살렸다. 빵과 음료수를 먹으면서 기다렸던 바로 그 잔디밭에 이번에는 우리 모두 함께 앉았다. 그리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시내를 걸으면서 무척 좋아했다. 날씨도 적당하게 구름이 햇볕을 가려줘서 걷기에 좋았다. 녹음이 짙은 마드리드의 거리를 아이들 모두와 손을 잡고 걸었다. 스페인 국왕이 살고 있는 왕궁에서도 큰아이는 메트로를 타고 이곳에 내려 거꾸로 시벨레스광장까지 걸어갔던 장면을 기억했다. 아이들은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해 왕궁이 초라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내부 장식과 천장의 벽화, 대리석 기둥, 그리고 방마다 특징적인 디자인의 채색 등은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교할 만큼 화려하고 정교했는데 말이다. 

 

톨레도의 전경 ⓒ 서진완


톨레도에서는 의도적으로 성 안에 숙소를 정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성 안이지만 좁은 거리가 미로처럼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큰아이가 지도를 들고 우리가 갔었던 길을 중심으로 아내와 작은아이에게 톨레도를 소개했다.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아내는 신나게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톨레도 성안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대성당을 만나게 된다. 13세기 고딕양식으로 스페인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성당을 쳐다보면 숙연한 느낌을 갖게 된다. 

지도를 든 큰아이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열심히 다녔다. 톨레도는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스페인에서 하루밖에 머무를 시간이 없다면 어디를 가면 좋겠는가를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질문에 응했던 사람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톨레도를 추천했고, 이곳에서 미로 같은 골목을 꼭 걸어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톨레도는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왕국의 과거 수도로서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독교문화, 이슬람문화, 그리고 유태인문화가 이곳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큰아이와 이곳에 왔을 때, 아내와 함께 다시 오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가족이 함께 이곳 골목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간밤에 고양이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며, 아내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났다. 요즘은 한번 잠을 깨면 다시 자기가 힘들다. 창문을 열었다. 맑은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리스본까지 가야한다는 마음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났다. 아이들에게 포르투갈(Portugal)의 역사와 오늘날 포르투갈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고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잘 살펴보라고 얘기해주었다. 

언덕이 많은 리스본 시내를 다니면서 활기가 넘쳐야할 시가지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도로는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 많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트램길이 곳곳으로 이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전체 구 시가지를 돌아보면, 과거의 영화에 머물러있는 현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리스본의 얼굴이라고 하는 벨렘타워(Belem Tower)가 바라보이는 거리에 주차를 했다. 탑의 모양이 마치 나비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당시 포르투갈의 배들은 이곳을 등대삼아 먼 항해 끝에 이곳을 찾아오기도 했다고 했다. 과거에는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고, 한때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등대처럼 생긴 작은 요새의 외벽에는 다양한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큰아이는 이곳에 왔을 때 인상 깊었던 그 느낌을 엄마와 동생에게 설명했다. 

 

리스본의 벨렘타워는 한때는 감옥으로 쓰인, 등대처럼 생긴 건물이다. ⓒ 서진완


16세기에 건축된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은 큰아이와 왔을 때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도 큰 아이는 그 느낌을 열심히 전해주려고 애썼다. 이 수도원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해외원정으로 벌어온 돈으로 건설했다고 하는데, 당시 새롭게 개척한 인도항로를 통해 포르투갈이 동서양 교역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정말 화려하네요” 아내는 감탄했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던 큰아이도 흐뭇해한다. 1502년에 마누엘 1세가 짓기 시작해 약 170년에 걸쳐 지은 신 고딕 양식의 이 수도원 내부의 화려한 조각은 지난날 포르투갈의 화려했던 역사와 영광을 한 눈에 보는 듯했지만, 현재의 어려운 이곳 상황을 보면 이곳 사람들에게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특별한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스페인으로

스페인의 국경을 넘어서 코르도바(Cordoba) 근처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아이들과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곳으로, 며칠 전부터 계획했던 곳이다. 그동안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였기에 휴식도 취하고 고기를 먹게 할 수 있는 방갈로를 예약했었다. 인터넷이 없는 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캠핑장 사이로 산책도 하고, 빨래도 해서 널어놓고, 아이들과 놀 수도 있어서 캠핑장 방갈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카드놀이로 설거지 당번을 결정했다. 막내 당첨! 아이들은 오랜만에 찾은 캠핑장을 정말 좋아하고 나도 마음 편하게 맥주 한잔하는 여유를 찾았다. 

코르도바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특히 로마인과 무슬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로서 수세기에 걸쳐 흘러들어온 다양한 문화가 이 도시에 녹아있는 곳이기에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코르도바대사원(Mosque-Cathedral of Cordoba)은 중세시대 이슬람 사원이었다가 이후 기독교 성당으로 사용된 곳으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물인 동시에 이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양사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특이한 곳이다. 

 

코르도바 대사원의 모습이다. ⓒ 서진완

우리는 대사원 내부에서 흰색과 붉은색의 벽돌로 만들어진 아치형태의 구조를 보면서 어느 부분이 이슬람 모스크이며, 어떤 부분이 기독교 성당에 해당하는지를 찾아보았다. 서로 이질적인 두개의 문화가 멋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과 시내 골목을 걸으면서도 확인했다. 코르도바는 이질적인 두개의 문화가 어우러져 도시가 오히려 더욱 풍성해졌다. 

코르도바에서 충분히 쉬었다는 느낌 때문인지 그라나다(Granada)로 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라나다는 이슬람 왕조의 왕궁이자 요새인 알함브라(Alhambra)궁전과 요새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과 기독교세력의 갈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로마인 이야기를 이곳에 오기 전에 읽도록 했었다. 

언덕 위에 또 다시 높은 요새를 건설했으니, 그 위에서 바라본 그라나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알함브라 내에는 몇 개의 궁전이 있고, 우리는 곳곳을 둘러보았다. 예쁜 정원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그리고 많은 분수들은 옛날 화려했던 이슬람왕국의 영화를 재현한 듯했다. 아내와 여유 있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궁궐내의 사원, 이슬람식 목욕탕, 그리고 다양한 왕궁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는데 베르사이유, 마드리드에서 본 왕궁과는 또 다른 모습의 궁전이었다. 

운전하는 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자면, 혼자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식구들이 모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열었다. “우리 고함 한번 쳐볼까?” 그리고 동시에 모두 함성을 외쳤다. “야~~~” 텅 빈 고속도로위에서 우리들의 고함소리는 분명히 스트레스와 함께 바람결에 날아갔다. 어제 타라고나(Tarragona)의 캠핑장에서 충분히 쉬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Barcellona)로 들어갈 때는 훨씬 상쾌한 기분이었다. 큰아이는 지난번 산티아고 길을 갔을 때, 가우디(Gaudi)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가고 싶어 했었지만 열차표를 구하지 못해, 리스본으로 갔었던 기억 때문에 바로셀로나를 가장 기대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큰아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가우디의 흔적을 찾기로 했다. 바로셀로나는 생각했던 것 보다 더 깨끗했고 아내는 마드리드보다 더 좋아 보인다고 했다.
 

가우디만 보면 어떨까요?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구엘저택(Palau Guell)을 찾았다. 큰아이와 나는 이미 아스트로가(Astroga)에서 그의 작품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집 내부의 장식, 세련된 디자인, 직선과 곡선의 조화, 화려한 색감 등은 기존의 건축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기하학적 부조화의 조화를 느끼게 했다. 옥상위에는 평평한 바닥과는 달리 굴곡이 있고 파격적인 선과 면 그리고 색감 등이 불협화음을 보이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조화롭다. 아내와 아이들도 열심히 건축물의 내부를 보면서 신기하다고 했다. 

까사밀라(Casa Mila) 또한  인상적이었다. 가우디가 이 건물을 설계할 때 터키의 카파도키아에 있는 바위산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보자 그대로 이해가 되었다. 파도처럼 부드럽게 굽이치는 외부의 곡면은 마치 바위산 같기도 했다. 이 건물은 당시 신흥부촌인 이 지역에서 중산층들을 위한 아파트 형식의 다가구 주택으로 지어진 것이다. 실제 이 건물을 보면 '신이 만든 창조물에 직선이 없다'라는 가우디의 신념이 건물에 그대로 나타나 전체 건물이 마치 바위산의 모습처럼 곡선으로 아름다운 외관을 현실화시켰다. 자연을 연상케 하는 건물의 모든 것들은 기존의 건축물에서 볼 수 없는 가우디만의 것이었다. 

 

가우디의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 서진완

무엇보다 가우디의 걸작은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83년 공사가 시작되고 그가 1884년부터 건축 책임을 맡으면서 설계와 건축 작업에 전 재산을 바쳤으며, 1926년 죽을 때까지 공사 현장에서 생활했다고 하는데 이 성당은 그 이후 1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계속 건축 중에 있다.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데 그가 죽은 이후 입장료 수익으로 지어지고 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그가 만든 작품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성당내부를 보는 것과 첨탑까지 올라가는 것을 구분해서 입장권을 구입했는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성당과는 정말 차이가 많다. 성당 내부는 너무나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 때문에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앉아서 감상하고 또 감탄했다. 첨탑에 올라가면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려올 때에 반드시 걸어서 내려오는 것을 권한다. 달팽이의 모습을 본 떠 만든 계단은 첨탑 위에서 내려다본 시내 모습을, 내려오면서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첨탑을 내려와서도 한참을 성당 외벽을 보고 또 보았다. 밖에서 보면 그 규모가 크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내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를 실감하게 된다. 성당의 기둥은 나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외벽은 벌집을 본떠 만든 것이며, 예수의 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은 아래로 내려뜨린 곡선을 거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성당 천장은 나뭇잎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니, 그의 작품을 보면 비정형적인 모습이 갖는 것이 바로 자연이 만든 과학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그대로 건축에 접목한 것으로 해석된다. 바르셀로나는 역시 가우디만 만나도 충분했다.   


서로 다른 관심... 그래도 좋은 것은 좋다.

니스(Nice)에서 아침을 맞았다. 어제 저녁에 정신없이 잤다. 아내와 아이들은 새벽 2시까지 얘기하며 놀았다는데, 난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아침에 길을 나섰다. 프랑스 남부 해안은 높은 산들이 많아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 산과 산을 연결한 다리와 산을 관통한 터널로 반듯하게 이어진 고속도로를 지나 모나코(Monaco)로 들어섰다. 푸른 지중해 바다와 가파른 언덕 위에 가득 들어찬 집들과 좁은 골목길에 있는 고급차들은 차에 관심이 많은 큰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곳 모나코는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외국기업에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세천국으로 유명하며 카지노 수입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독립국이면서도 국방권과 외교권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어서 프랑스의 영향이 지배적인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세련된 프랑스인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시가지를 둘러보고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가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모나코의 전경은 절경이었다. 그러나 큰아이는 고급차가 즐비한 이곳 거리에서 말로만 듣던 각종 고급차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느라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설명에도 관심이 없다. 
 

모나코 전경 ⓒ 서진완

모나코를 나와 고속도로를 타자 바로 이탈리아 국경으로 이어졌다. 작은아이는 벌써 마음이 들떴다. 표지판에서 피사(Pisa)를 본 것이다. 조용하고 아담한 피사 시내로 들어가자마자 대성당 옆으로 기울어진 탑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 탑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원통형으로 높이 58.36m로 8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사진으로만 보던 것에 비해 꽤 규모가 웅장했다. 현재에도 계속 기울어지고 있다는데, 생각보다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유적지 보존을 위해 시간과 인원을 제한하고 있는데, 아내와 작은아이만 탑 위로 올라가고 큰아이와 나는 잔디밭에 누워서 탑을 감상했다. 29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내는 계단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을 뿐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작은아이는 갈릴레이의 낙하실험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며 신나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이 녀석이 이탈리아에 오면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었고, 직접 올라가 보았으니 그 느낌이 더 달랐을 것이다. “정말 좋아하네요!” 큰아이는 이런 동생의 모습이 세삼 신기한 모양이다. 

플로렌스(Florence)로 가는 길에 차들이 많이 붐볐다. 이탈리아로 들어오면서 운전하는 사람들의 습관이 과격해지고, 급해졌다. 뒤에서 바짝 붙어서 오지를 않나, 신호 없이 추월을 하거나, 심지어 경적을 울리기까지 했다. 잠시라도 틈이 보이면 무섭게 추월하고 위협적인 운전까지 서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다녔던 유럽의 다른 곳보다 더 과격하고 무질서한 모습을 보았다. 플로렌스시내로 접어들자 정체는 더 심해졌고, 차선을 지키지 않거나 신호등을 무시하는 차들이 왕왕 보였다. 심지어는 경찰이 있는데도 그냥 지나가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보다 더 심하네요!” 아이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눈앞에 보이는 플로렌스는 로마시대부터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가 12세기 무렵부터는 유럽의 상공업 및 금융업의 중심이 되었고,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의 지원으로 르네상스문화의 중심이 된 도시이다. 단테와 메디치가를 떠올리게 되는 이 도시는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독특한 고딕 양식의 두오모 대성당 ⓒ 서진완

시내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에게 대략적으로 이 도시에서 우리가 봐야할 것들과 중요한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도시 전체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는 곳인지라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베키오(Vecchio)다리, 시청사와 광장에서는 다비드상을 보았고, 넵튠상이 있는 분수도 보았다. 우피치 미술관도 보고, 다시 독특한 고딕 양식의 두오모(Duomo)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햇살이 비추고 있어서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골목을 걷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거리 전체가 마치 야외 박물관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이곳에서는 직접 걸으면서 보아야 한다. 수많은 관광객들 속에서 손을 잡고 걷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보았던 많은 유적과 역사를 이 도시에서 확인했다. 그리고 플로렌스를 떠나기 전, 아내가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중세의 한 순간에 머문 듯한 착각이 드는 이곳을 내려다보면서도 아이들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반응이 달랐다. “좋은데요!” 큰 아이의 반응에 작은 아이는 피사에서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뭐가?” 역사의 현장이라도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흥미를 갖는 작은 아이에게 앞으로 펼쳐질 이탈리아는 어떻게 비칠까 점점 궁금해졌다. 

<정리 = 이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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