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들어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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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들어온 사람들
  • 이세기
  • 승인 2016.09.2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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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섬으로 들어온 사람들 - 이세기 / 시인
장봉도 푸른학원 전경_지금은 푸른신협으로 바뀌었다



섬과 깊은 관련을 맺은 사람 이야기이다.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덕적도·소야도·문갑도·백아도·굴업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貝塚)와 빗살무늬토기 등의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서 꽤 오래 전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섬사람들은 대개 갯벌에서 조개류와 낙지, 갯바위 등에서 굴, 파래, 돌김, 미역, 톳 등을 채취해서 먹었을 것이다. 물살을 이용해 돌살로 물고기, 게 등을 잡거나, 낚시 도구를 만들어 만조 시에도 물고기를 낚지 않았을까.

섬에서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이 발견된 것을 보아도 인간이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를 비롯하여 덕적도, 백아도 등지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동은 주로 물살이 센 사리를 피해 물살이 잔잔한 조금에 뗏목 등을 이용해 옮겨 다녔을 것이다. 섬에 움집이나 초막을 지어 계절별로 굴이나 산나물 등을 채취하면서 터를 잡고 정착했을 것을 것으로 보인다.

섬 둘레는 가파른 경사지가 많아 물과 토지가 부족해 농사를 짓기에 어려움이 많다. 어로와 밭농사가 주업일 수밖에 없다. 물이 적은 교동도는 ‘물꽝’이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논농사를 지은 섬으로는 승봉도, 자월도 등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농지가 몇 마지기 안 되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상태다. 부족한 양식은 가까운 김포, 당진, 서산 등지에서 굴 등 어패류를 쌀과 교환했다. 그 외 교동도, 강화도, 덕적도, 백령도 등은 후대에 간척사업을 대대적으로 하여 논으로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교동도의 경우에는 고려 이후 간척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찍이 농사를 지었던 섬이었다. 『택리지』, 「덕적서」등을 보면 섬에 대한 인식이 해산물이 풍부하고 물이 좋으며, 약초 등이 많은 ‘살기 좋은 땅’으로 인식된 경우가 많다. 섬과 바다가 주는 경제적 이익이 섬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섬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뱃길로 교류가 이루어지자 경향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대개 덕적군도의 사람들은 뱃길의 영향으로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말을 쓴다. 서해5도의 경우에는 황해도, 평안도 말씨가 주류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한 후예들이 많다. 강화도나 교동도 사람들은 “밥 드셨시까”라고 하는데 이 말투는 황해도 말투이다. 역시 뱃길로 이어져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기만 인근의 섬들은 16세기 이후 왕족의 유배지나 임란, 정유, 병자, 갑오년 등 왜란, 호란, 동학란 등을 피해 섬으로 들어온 집안이 많기 때문에 인적, 물적 교류도 많았다. 섬에서 발견되는 호적이나 준호구가 이를 말해주거니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섬들의 입도조가 대개 전란 등을 피해 피난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동도는 경기도·황해도·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던 곳이라 수군장교들이 뱃길을 잘 알고 있어 이들이 섬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입도조들은 대개 황해도, 김포, 강화도, 대부도, 당진 등을 출발지나 경유지로 이용하여 들어왔다. 이주 경로로 ‘강화도→장봉도’, 강화도→덕적도’, ‘대부도→영흥도, 자월도, 승봉도’, ‘승봉도→이작, 소야도→덕적도’ ‘소야도→덕적도’ 등으로 들어왔거나, 덕적도에서 먼 바다에 있는 울도, 백아도의 경우 ‘당진, 서산→울도→백아도’, ‘울도, 지도, 소야도, 황해도→문갑도’로 이주 경로로 삼았다. 자연 뱃길로 이어진 생활권이 형성되었다.

고려시대 때, 원(元)나라 황족의 유배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대청도이다. 원나라 순제(順帝)인 토곤 테무르(1320~1370)가 태자 시절에 유배된 곳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은 대청도 안골이라고 불렀던 내동(內洞)에 궁궐을 짓고 뽕나무와 옻나무, 쑥, 꼭두서니 등을 심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 온다. 이들 황족이 머물며 명명했다는 삼각산, 남산, 장안, 매막골 등의 지명이 지금도 대청도에 전해 오고 있다.  『택리지』를 비롯하여 『원사(元史)』 순제기(順帝紀)에도 순제가 고려로 쫓겨나 대청도에 살았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동도는 고려나 조선 왕실의 유배지였다. 주로 폐왕과 친족들이 많이 유배 왔는데, 고려시대 희종(熙宗)을 비롯하여, 폐위 되어 유배된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이 있다. 이밖에도 교동에 유배된 왕족 종친으로 양평대군, 임해군, 능창군, 경안군 등도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교동도가 이들 폐왕이나 왕족의 유배지로 적합했던 것은 한양과 가까워 그만큼 감시와 통제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구 뱃길을 이용할 수 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교동도는 천혜의 감옥이었던 셈이다.

시대가 험해 난을 피해 섬으로 피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섬으로 피신한 사람으로는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아명이 ‘배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선생(船生)이다. 병자년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교동도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배에서 태어났다. 서포 김만중만큼 섬과 드라마틱한 연관을 맺은 사람도 드물다. 그는 앵강만의 작은 섬 노도(櫓島)에서 죽었으나, 서해 섬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의 본적이 강화도요, 그가 태어나 머문 곳이 교동도요, 잠시 피신했다는 곳이 대부도와 소연평도이다. 소연평도 은골짜기에는 서포의 피신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나는 서포 김만중이 머물렀다는 연평도에 조촐한 초가라도 장만해서 그를 기억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분도 신부(1973년)


섬사람들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최분도(1932~2001) 신부도 빼놓을 수 없다. 최분도 신부는 미국 미네소타 주 출신의 벽안의 신부다. 그의 미국명은 베네닉트 즈에버(Father Benedict A. Zweber)이다. 그가 한국 이름 최분도를 얻고 섬에 정착한 것은 1962년, 연평도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이다. 이후 그는 덕적도 서포리에 있는 덕적 성당에서 자립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섬 개조 운동을 펼친다. 현대식 병원을 짓고, 발전기를 들여와 초롱불을 없애고, 수로를 놓고, 빈민 퇴치 운동을 벌인다. 섬사람들은 그를 ‘슈바이처’, ‘서해의 별’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공덕비가 덕적도 서포리 송정밭에 세워져 있다. 최분도 신부는 인천에 이주해 살았던 중국 산둥성 출신의 이주민들을 위해 덕적도에 양로원을 지어 주기도 했다. 섬으로 이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한다. 마땅히 의지할 곳이 없었던 이들 산둥성 출신의 중국인 역시 섬과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무교회주의자 송두용(1904~1986)도 장봉도의 곳배를 타는 뱃사람 아이들을 위하여 푸른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은사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조선인 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아 김교신, 함석헌 등과 함께 성서연구잡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고 오류학원을 만들었다. 1968년도에 장봉도로 들어와 섬에서의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의 삶은 1984년에 끝났지만, 그의 섬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가난한 섬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섬만큼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인 곳도 많지 않다. 섬이야말로 경향각지의 사람을 거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섬사람들이 폐쇄적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소외로 인한 경계로 보아야한다. 섬사람이 폐쇄성이 강하고 고집 세다는 것은 잘못된 편견이다. 그것은 섬사람들과 깊은 유대가 없는 실없는 말에 불과하다. 내가 겪은 바로 말하자면 섬사람만큼 사람을 그리워하고 속정이 깊은 사람도 없다. 왕래가 드문 섬에서 살다보니 인간에 대한 정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섬이 좋아 섬으로 들어가 섬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섬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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