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 진촌 잿등길 위 면사무소, 그리고 면장님
상태바
백령 진촌 잿등길 위 면사무소, 그리고 면장님
  • 최정숙
  • 승인 2016.09.23 0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 섬섬섬]
(15) 백령도 이야기, 여덟번째

<지붕색깔과 하늘색이 똑같이 푸르른 잿등길가 집. 아크릴, 캔버스  53x33cm>


백령 진촌 면사무소가 있는 위치는 좀 높은 지대이어서 그 아래쪽 마을을 잿등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살던 집에서 가까운 잿등 길은 진촌1리와 진촌2리와의 경계지점이지요. 면사무소 뒤쪽에 좀 높은 등성이산이 보이는데 두룡산입니다. 백령진지 산천조에 “황해도 장연 장산곳에서 용이 바다 밑으로 구불구불 비스듬이 틀어 동쪽으로 와서 두룡산이 되었으며 동서남북 모든 산줄기의 기원으로 백령도의 조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두룡이 용의 머리이니 용머리가 백령 섬의 중심인 것은 풍수적으로 맞네요. 그 산 등성이 밑으로 내려온 줄기이어서 잿등이라 불렀는지, 면사무소 밑으로 주욱 경사진 비탈길이랍니다. 그 길로 내려가다 보면 백령섬의 가장 번화한 곳인 진촌시장 동네에 닿아요.

 

<백령면사무소 모습. 심전도지위에 먹, 펜 드로잉>


백령 면사무소는 저와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면사무소 정문 오른쪽 골목길로 담이 있는데 바로 그 담 안 터에 할머니집이 90여년 가까이 있었지요. 할아버지께서 용기포쪽에 사시다가 이 터에 집을 짓고 1930년대 초반 경, 아버지 10대 중반에 이주를 하셨습니다. 7남매의 장남인 아버지 나이 19살에 백령면 서기로 들어가셨는데, 옛적에 섬에서야 면사무소 공무원이 최고의 출세 길이었지요. 아버지는 1945년 해방이 되기 넉달 전인 4월15일 황해도 장연에 살던 어머니와 혼인식을 하셨습니다. 결혼 이듬해 아버지는 3대 백령 면장이 되셨습니다. 8.15 광복 전에는 일제 점령기라 면장직을 자치위원장으로 시무하게 하였고 해방 후부터 정식으로 면장직을 실시하였답니다. 이러한 자료는 1979년 샘터사에서 발행한 저자 오백진의 「백령도」 라는 책을 작년에 우연히 보았는데, 최경림 아버지는 25세에 면장을 맡으셔서 7년 가까이 하셨음을 이 기록으로 알게 되었답니다.
 
1대 우태헌 면장(1945.10.1.~1946.4.1.)
2대 함성항 면장(1946.4.2.~1946.9.10.)
3대 최경림 면장(1946.10.11.~1953.4.7.)


 
<면사무소 바로 아래 백령면 유일의 파출소>
                                          

해방 이후부터 6.25동란이라는 민족적 대격동기에 자신의 고향 백령섬 면장으로서 겪은 삶이 어떠하셨는지, 자식들은 젊어서는 저 살기 바빠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해방된 해 백령도는 경기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 공산당원들이 섬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당연히 면장도 죽이려 하였답니다. 아버지는 전쟁나기 며칠 전 학교 건축자재로 육지에 나가셔서 뱃길이 끊겨 못 들어오시고 떠돌아다니시다 9.28수복이 되어 들어오셨답니다. 그래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셨다지요. 그들은 대신 어머니를 끌고가 죽음 직전까지 가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1953년 휴전이 되기 전까지 북한에서 피난민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들어왔답니다. 1946년에 면장이 되신 아버지는 산비탈 등에 나무를 심어 놓았었는데 그들의 머물 곳을 위해 나무들은 중요하지 않으셨답니다. 당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그 곳들을 월내도촌, 달동네마을이라고들 아직도 부릅니다. 추석명절엔 부모 가족을 찾는 게 우리의 전통이자 도리이지요. 이 글을 쓰는 한가위 연휴 날, 잿등 동네 추억을 떠올리며 면사무소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진촌집 마당에서 보이는 아버지의공적비가 있는 동산>


면사무소에서 보이는 월내도촌 남쪽 동산에 오르면 백령도 옛적에 선정을 베풀었던 수령들의 공을 기린 선정비들이 있습니다. 그 비석들 중에 제 아버지의 공적비도 세워져 있답니다. 아버지의 비석은 원래 가을리 간척지 벌판에 1972년도에 세워져 있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져있던 것을 백령도 유적재건위원회가 백령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들과 반공유격전적비와 함께 이 동산에 모아놓은 것입니다. 제가 가족들을 데리고 2007년도에 찾아 뵈었더니 아버지 최경림 공적비 뒤편에 새겨놓은 비문은 세월에 마모되어 드문드문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예기치 않게 오백진님의 책에서 아버지 공적비 전문이 59쪽에 실려져 있는 걸 발견했답니다. 이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사람, 백령도에서의 고단한 삶을 사신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겐 의미가 없지만, 이제사 나이들어 자식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함으로 다가옵니다.
 

<백령파출소건너편 60여년넘게 그 모습 그대로의 잿등길 은수슈퍼>


그 비문 내용을 적어봅니다.
 
최공경림 공적비
약력 및 공적
 
1919년 8월 10일 최창순씨 장남으로 탄생되어 일찍이 대청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향토개발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웅지를 품고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약관 25세의 젊은 면장으로서 제반난관을 극복하고 오직 향토발전을 위하여 온갖 정열을 경주하기 십개성상 그간 향토교육발전을 위한 중학과정의 고등공민학교(현 백령중농고 전신)를 설립하였고 민족의 수난기였던 6.25사변을 전후한 반공청년운동에 헌신가담하였으며, 특히 1.4후퇴 이후 운집해온 수만의 피난민과 원주민의 민생고를 민원으로 해결하였다. 직을 사한 후에도 불타는 의욕으로 동지를 규합하여 1958년 4월 7일 장장 105m에 이르는 제방과 260정보의 농지 간척지공사에 착공, 빛나는 노력의 결정으로 1971년 드디어 대공사의 준공을 보게 되었으나 지나친 심신의 과로로 발병, 1970년 5월 18일 불치의 병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이제 전 향토민은 추모의 의를 표하는 동시에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고 생전의 공적을 높이 치하하기 위하여 이 공적비를 건립하였음.
1972년 9월 19일 건립위원 윤양숙, 이형곤, 곽영



<은수슈퍼 돌아서면 큰 고모님의 큰 따님의 큰딸인 동갑내기 조카가 살던 현덕이네 집>



<잿등 비탈길가 드럼통 집 >

  
<면사무소 서쪽마을 두룡산촌에 있는 진촌 교회>
                                                                                                  (2016 0923    글, 그림  최정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