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역사를 지나, 동화를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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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역사를 지나, 동화를 만나기까지
  • 서진완
  • 승인 2016.10.2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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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밀러가 우리 옆집에 있었다니!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 간의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 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드레스덴 ⓒ 서진완


전쟁은 절대...

독일 국경을 넘기 직전부터 안개는 더욱 심해져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무리하게 운전할 필요가 없어서 드레스덴(Dresden)으로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도시의 거의 대부분 건물들이 무너지거나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흔적을 남기면서 복원이 이루어진 도시이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면 화재로 그을린 건물 벽들과 폭격으로 붕괴되었던 교회(Frauen Kirche)가 지금도 온전히 남아있다.

당시 폭격이후 남은 교회의 일부분과 무너져 내린 교회 돔의 일부는 그대로 교회 앞 광장에 보존돼 있다. 지금의 교회 모습은 독일 전역의 모금과 전후 미국, 영국의 지원으로 완벽하게 복원되었다고 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벽화를 보면서 시내를 걷다보면, 작센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의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성당과 건물들 벽은 여전히 까맣게 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전쟁의 상처 또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전시용으로만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 ⓒ 서진완


전쟁에 관한 얘기는 베를린(Berlin)에서도 이어졌다. 베를린장벽(Berlin Wall)에 도착했을 때는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1961년 8월 이곳에 살던 동서독 주민들을 순식간에 이산가족을 만든 바로 그 장벽이 1989년에 무너졌던 바로 그곳이다. 동서독 시민들은 장벽위에 올라 서로 껴안고 환호했고, 우리도 그 곳에 섰다. 총 길이가 155km에 이르는 이 장벽이 이제는 전시용으로 일부만 남겨두고 있다. 장벽과 함께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학살의 범죄와 관련,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의 범죄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둔 곳이 있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당시 선전용으로 사용하던 신문과 책자, 그리고 사진들을 보면서 부끄러운 역사를 이렇게 전시하고 후손에게 그 교훈을 남겨둔 독일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부끄러웠던 자신들의 역사를 이렇게 고백과 반성하는 것이 대단하네요!” 아이들의 말처럼 이런 것이 오늘날의 독일을 만든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히틀러로 대표되는 어제의 독일과 통일된 오늘의 독일이 함께하는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에서 더 거세지는 비를 피했다.

무거운 역사 이야기를 뒤로하고, 동화 속 세상을 보기위해 쉬베린(Schwarin)으로 떠났다. 다행이도 날씨가 맑아졌다. 호수에서 바라본 쉬베린 성은 TV에서 많이 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호반을 끼고 조성된 공원을 따라 걷다보면 호수에 비친 그림같은 성이 눈 앞에 나타난다. 햇살이 따사하게 내리고 적당하게 바람까지 불어서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성문 앞에 서자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  

쉬베린은 호수 옆에 성이 있고 그 앞으로 더 큰 호수를 끼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시내로 들어가면 성당과 조그만 골목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아담하고 푸근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도 많지 않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호수가 나오고, 호반 벤치에 앉아서 쉬다보면 여유를 찾게 된다. 하루만 이곳에 머물기에는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드는 곳이다. “생일 축하해요!” 아내는 오늘이 나의 생일인데 제대로 된 생일 음식을 해주지 못한데 대해 미안해했다. 난 오늘이 내 생일인지도 몰랐다. “아빠 생신이라서 날씨가 좋아진 것 같네요!” 


인어공주가 어디 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창을 열어 날씨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이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다. 비가 오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얼마만인가!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푸트가르덴(Puttgarden) 부두에 도착했다. 덴마크(Denmark)로 들어가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 돌아가야 하는 육로를 이용하기 보단 페리를 이용하는 이 길을 선택한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데크에 올라서 멀어지는 독일 부두를 바라보았다. 



덴마크 농가의 모습 ⓒ 서진완

잔잔한 북해 바다 위를 출발한 페리는 45분 정도의 항해 끝에 덴마크 영토인 로드비(Rodby)에 도착했다. 주위에는 풍차도 보이고, 넓은 들판에는 평화롭게 젖소와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낙농업이 발달한 덴마크답다. 우리는 시골 농가를 개조한 숙소를 선택했다. 호수를 끼고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다. 한적한 시골길은 걷기에 좋다. 호수에는 수초가 가득하고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언덕에 풀을 뜯는 소들만 보이고, 간간히 방울소리만 적막을 가른다.  

다음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찾았다. 셸란(Sjalland)이라는 섬에 위치해 있는 코펜하겐은 스웨덴의 항구도시 말모(Malmo)를 통해 스칸디나비아반도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코펜하겐 시내로 들어가자 현대적 감각으로 지어진 건물 사이로 오래된 건물들이 보였다. 거리의 가로등은 특이하게 도로변이 아닌 도로 중앙위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 가족들에게 코펜하겐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인어공주 상이다. 구 시가지를 지나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서 있는 이 인어공주 상 하나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예상대로 실제 인어공주 상은 작고 평범했다. 아이들 그림책에서 보던 미인의 모습도 아니다. 기대를 하고 본다면, 더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작고 평범했던 인어공주상 ⓒ 서진완

오히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주변 공원을 걷는 것이 훨씬 좋다. 앞으로는 툭 트인 바다가, 뒤로는 수로가 있는 이곳 공원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유모차를 끌고 나온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을 하거나 쉴 수 있다. 코펜하겐 시내는 거리마다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양복을 입은 신사와 힐을 신은 아가씨까지 머리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자전거를 타고 있다. 바람은 적당하게 불고 햇살은 따뜻하게 내리쬐는 벤치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바닷냄새까지 난다. 참 좋다.


함부르크의 말러와 브레멘의 과학박물관


함부르크, 말러의 집 앞에서 ⓒ 서진완

 

함부르크(Hamnurg)역 근처 주택가에 예약한 숙소를 찾다 깜짝 놀랐다. 세상에, 말러(Gustav Mahler)가 이곳에 있을 때 거처했던 집이 우리가 묵을 숙소의 옆집이라니! 말러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투브에서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Titan)’을 찾아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말러의 거인을 그가 기거했던 옆집에서 듣다니! 
 


함부르크는 매년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될 만큼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 서진완


체코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했던 말러가 함부르크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있었을 시절에 살던 곳이 바로 여기다. 실제 함부르크는 매년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될 만큼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침울하고 어두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중세의 분위기를 부분부분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도 잘 정리되어 있으며,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가면 지저분할 것 같았던 항구도시의 이미지와는 달리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화재로 전소되어 새로 옛 시청사 자리에 세워졌다는 신 르네상스 양식의 고풍스런 시청사 건물을 지나 부두를 둘러보면 코펜하겐보다 더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찻길 옆에 위치한 숙소인지라 기차소리에 일찍 잠을 깼다. 커튼이 얇아서 햇살이 바로 비치고 소리까지 크게 들리니 더 이상 잘 수가 없다.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다시 틀었다. 

 


브레멘 대학 근처의 박물관에서 작은 아이는 신이나 이곳저곳을 체험하기도 했다. ⓒ 서진완


아침부터 작은아이는 들떠 있다. 브레멘(Bremen)에서 작은아이가 추천하는 ‘유럽에서 가장 큰 과학박물관’을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브레멘대학교 근처에 있는 이 박물관은 금속으로 된 유선형의 특이한 외형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내부는 과학의 원리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시설이 갖춰져, 역시 이름만큼이나 다른 곳보다 비교적 규모가 큰 것 같았다. 작은아이는 들어가는 순간부터 신이 났다. 체험시설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우리도 아이를 따라 이것저것 직접 체험해 보았지만, 이내 지쳐 쉬어야만 했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브레멘 시내에 들어서자 단연 시청사 건물이 눈에 띈다. 시청사는 고딕양식으로 만든 벽돌 건물로 외벽의 화려함은 물론 그 웅장함에 압도된다. 아이들은 시청사 건물 옆 모퉁이에 브레멘 음악대를 상징하는 네 마리의 동물상을 쉽게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당나귀의 발과 코 부분을 만진 탓에 그 부분만 하얗게 변해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우리도 발과 코를 만졌다. 날씨는 너무나 맑고, 따스한 햇살 덕분에 광장은 더 없이 따뜻했다. 아내는 드레스덴에서 아쉬워했던 것처럼 브레멘을 떠날 때 많이 아쉬워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찾았다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쉽다!” 
 


브레멘 동물 음악대를 형상화 한 동물상이 세워져 있었다. ⓒ 서진완

 

베네룩스 3국, 작지만 대단한 나라들
 


네덜란드의 상징, 풍차를 찾았다. ⓒ 서진완


네덜란드 국경을 통과해 더 넓은 들판을 지나, 물의 도시 암스테르담(Amsterdam)에 도착했다. 베니스처럼 곳곳에 운하가 있어서 도시의 운치를 더하고,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친다. 운하에는 작은 배들이 한가롭게 다니고 그 옆으로 자전거들이 줄지어 다녔다. 과연 듣던 대로 자전거 천국이다.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안네 프랑크(Anne Frank)의 집을 찾았다. 그녀가 세계 2차 대전 중 나치의 점령 하에 있던 이곳에서 은신하면서 일기를 썼던 바로 그곳이다. 그녀를 통해 수백 만 명에 달하는 나치의 희생자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그들의 인권이 얼마나 유린되었는지, 아이들이 직접 보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를 통해 이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운하가 흐르는 아름다운 시내에서 그녀는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오늘도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녀를 찾고 있다. 
 


안네 프랑크가 머물렀던 곳,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 서진완


마약에 관대하고 동성간의 결혼과 성전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며, 성판매를 직업으로 인정하는 나라. 어쩌면 도덕성 보다는 합리성으로 다져진 자유분방한 곳이다. 암스테르담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시내를 둘러보고,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Rembrandt)를 보여주기로 했다. 현재 시내에 남아 있는 풍차는 몇 개 밖에 되지 않아서, 시내 가장 중심에 위치한 풍차를 찾았다. 낡아보였고 생각보다 높이가 높았지만 사진에서 보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암스텔 강가를 자주 찾았다는 렘브란트를 풍차와 함께 조성된 조그만 공원에서 만났다. 아직도 유유히 흐르는 암스텔 강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강가에는 조정경기 연습을 하는 사람들과 요트를 타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이 강 너머 땅은 지금 서 있는 이곳보다 2m나 낮고, 바다는 이 강보다 높다. 결국 인공적으로 만든 기적이 지금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브리쉘의 아토미움(위)과 그곳에서 내려다본 브리쉘 시가지의 모습(아래) ⓒ 서진완


작은 아이는 브뤼셀(Brussels)을 찾으면서 아토미움(Atomium)을 먼저 선택했다. 1958년 엑스포를 기념하고자 만들어졌고, 지난 2006년 개조공사를 마치고 일반에게 다시 공개된 곳으로, 높이가 100미터에 이르는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평탄한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한데, 원소입자를 1500억 배 확대한 형태를 하고 있다. 9개의 구체 중 일부에 전시관이 있고, 꼭대기에 있는 구에는 파노라마 전망대가 있어, 브뤼셀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브뤼셀에서 꼭 보고 가야하는 곳이 있다고 했지만, 작은 아이의 관심은 오로지 이곳뿐인 것 같다. 

시내에서 본 ‘오줌누는 아이’상은 높이가 60센티미터에 불과하다며, 결국 아이들에게 “인어공주상 보다 더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빅토르 위고가 최고의 광장으로 극찬했던 그랑 플라스(Grand Place)도 우리 부부에게 감동이 있을 뿐, 작은 아이에게는 큰 감흥이 없는 듯 보였다. 오히려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초콜릿 가게다. 광장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도 초콜릿을 선택한 이후에야 그 소리가 귀에 들어왔을 법하다. 벨기에에서는 화이트 초콜릿이란다! 

기름 값이 가장 싼 곳이라는 룩셈부르크(Luxemberg)에 들어서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었다. 브뤼셀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룩셈부르크는 우리 눈에 벨기에와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가자 조용한 시가지에 깨끗한 도로가 이어졌다. 룩셈부르크에 오면 꼭 봐야할 아돌프(Adolphe) 다리 근처에 차를 세웠다. 이 다리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로 계곡을 이은 45미터 높이에 위치하며 1904년에 건축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아치형 다리였다고 한다.

언덕 위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편안하네요” 룩셈부르크에 대해 아내가 한 말이다. 아이들이 장난치는 동안 아내와 나는 공원을 산책하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룩셈부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석양에 물든 하늘과 언덕아래 펼쳐진 시가지를 배경으로 우리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좀 더 가까이!” 큰 아이의 주문으로 우리 부부는 서로 보면서 웃었다. “더 이상 짓궂게 하기 없기다!”


다시 독일로


쾰른 대성당의 내부 모습 ⓒ 서진완


숙소를 떠나 쾰른(Cologne)으로 향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미 많은 성당을 보았지만 이 성당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 아내와 나는 이미 여러차례 보았지만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쾰른은 시저(Caesar)가 라인 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할 때 점령당한 바 있고, 식민지라는 의미의 현재 도시 이름이 붙여지게 된 곳이다. 북유럽에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는 가장 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전면을 가진 교회로 기록되고 있는 성당을 보고 아이들도 이번에는 그 크기에 놀라워했다. 성당내부에 들어서자 미사가 진행 중이었고, 마침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시작되어 더욱 엄숙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우리 가족을 위해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누군가에게 우리를 의지하게 된다. 건강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쾰른에서 프랑크푸르트(Frankfurt)까지 라인 강변을 따라 달렸다. 라인 강변을 따라 이름 모를 성들이 낮은 언덕 위에 그림같이 서 있고 포도밭은 가파른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열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간 적은 있지만 자동차로 달려보기는 처음이다. 이럴 때는 이어폰을 빼고 자연의 소리와 냄새를 함께 듣고 맡으며 느껴야 한다. 아이들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온 몸으로 받았다. 바람결에 고함소리도 더 이상 퍼지지 않는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서 13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대학선배와 출장 온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나는 친구는 우리 가족의 여행에 힘을 실어주겠다며 한국식품점에서 라면이랑 김치를 사서 차에 실어주었다. 스위스로 돌아가는 친구와는 며칠 후 스위스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고맙다, 친구야! 

밤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자 더 세게 내렸다. 프랑크푸르트의 뢰머광장에 도착하자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관광객도 보이지 않고 뢰머광장은 더 크게 느껴졌다. 빗방울은 더 거세졌다. 구시가지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우산을 서도 바람 때문에 소용이 없을 정도였다. 그칠 줄 모르는 비에 거리는 더욱 한산해졌다. 성당에서 울러 퍼지는 종소리에 광장 전체가 흔들리듯 더 크게 들렸다. 강가로 나오자, 불어난 강물 때문에 강변도로가 통제되어 우회를 해야만 했다. 
 


하이델베르그 성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서진완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 가까워지자 비는 그쳤다. 하이델베르그는 노벨상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한 독일의 명문대학이 있는 곳이며, 독일의 대학도시 중 대표적인 곳으로 14세기 건축된 붉고 예쁜 고성이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고, 강 옆으로 대학캠퍼스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아내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하다. 언덕 위 고성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빨간 지붕의 집들과 그 사이를 도도하게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행이 날이 맑아졌고, 성채도 둘러보고, 성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술통을 보고 직접 위에 올라가도 보았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의 모습만으로도 과거 이 성이 얼마나 세련된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성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풍경은 비가 오고 난 이후라서 더 시원하고 깨끗하게 멀리까지 보였다. 성벽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아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멋지네요!” 



 
<정리 = 이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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