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흑자 내는 그린피스 자율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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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흑자 내는 그린피스 자율냉장고
  • 김연식
  • 승인 2016.10.2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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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신뢰의 가치


<신뢰로 뭉친 그린피스 선원들. 그안에서 서로는 서로를 배려한다>


# 그린피스 환경감시선 휴게실에는 자율냉장고가 있다. 음료와 맥주, 와인 등이 담겨있는데 판매원이 따로 없다. 선원들은 필요한대로 꺼내 먹고 제 이름에 그 수량을 적는다. 아무도 감시하지 않고 나중에 따지지도 않는다. 오직 각자 양심에 맡긴다. 냉장고를 관리하는 선원은 때때로 물건을 채우고 수금하는 게 전부다.
신기한 것은 월말에 정산하면 매번 흑자다. 그때마다 남은 만큼 공짜 맥주가 나오는데, 선원들은 한결 기쁜 마음으로 그 맥주를 즐긴다. 그 맛은 남다르다. 우리를 더 단단하게 엮는다. 서로의 믿음을 다지고, 공동체의 신뢰를 쌓는다. 이들과 같이 있는 것에 자부심을 더한다. 그러니 생일을 맞거나 휴가를 떠나는 선원들은 한턱낸다며 왕창 계산을 해놓기도 한다. 서로 믿고 냉장고를 열어놓는 정책과 넉넉한 나눔, 그리고 양심을 지키는 선원들 덕에 생긴 아름다운 사례다.

 
# 지난 2012년 배를 타고 북유럽 라트비아(Latvia)라는 나라의 수도 리가(Riga)에 갔을 때의 일이다. 버스에 탔는데 종이 승차권을 수거하는 장치가 없는 것이다. 운전수에게 어찌할지 물으니 그냥 승차권을 갖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버스에 올랐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소리 없이 내렸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영문을 알았다. 느닷없이 검표원이 타더니 불시검표를 했다. 대부분 승차권이 있었는데, 부랑자로 보이는 남자가 승차권 없이 탄 사실이 발각되어 검표원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승객중 하나가 “불시검표는 흔치 않지만 만일 무임승차한 사실이 발각되면 무거운 벌금을 내야한다”고 설명했다.
리가에서는 버스 삯을 승객 자율에 맡겼고 이는 퍽 잘 지켜졌다. 덕분에 버스에는 복잡한 개찰장치가 없었다. 승객들은 편리하게 차에 오르내렸고, 운전수도 운전에만 집중했다. 만일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검표원도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이 양심을 잘 지킬수록 사회적 비용이 절감되고 생활은 더욱 편해진다.
 

# 이런 사례는 멀지 않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국토 종주 자전거 길에는 종종 양심판매대를 설치한 구멍가게가 있다. 자전거 종주객을 위해 얼음상자에 차가운 물과 요금통만 갖다 놓았다. 덕분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손님들은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든 목을 축일 수 있다.
양심판매대가 사라지지 않고 오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종주객들이 퍽 괜찮은 사람이며, 이를 이용하는 나 역시 그 중 하나라는 뿌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종주객들 사이에 믿음과 연대감을 낳는다. 양심판매대에는 그런 힘이 있다.
 

사회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일까. 양심은 커녕 법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를 보면 하나같이 위장전입이나 탈세 경력을 달고 있다. 법과 양심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바보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양심을 지키는 것에 회의감이 들게 한다. 마음은 각박해지고 주변과 나를 단절시킨다. 어떻게든 내 밥그릇만 지키고 싶게 만든다. 그런 사회에 무슨 연대가 있고 나눔이 있겠는가.
법과 양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바람에 가진 자의 재산은 쑥쑥 늘어나고 하늘아래 집 한 채 없는 사람은 막막하게 하는 현실. 그런 불공정한 현실은 열심히라도 살려는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슬픈 현실이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어서 이 땅을 떠나 환경감시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가차 없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를 떠나 낙원 같은 저 배로 말이다.

 
양심판매대는 생각보다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에서 양심판매대를 이용하면서 나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감지했다. 이전에 판매원에게서 물건을 살 때면 어떻게든 주머니의 돈을 적게 쓰려고 안달했다. 쿠폰이나 할인카드를 악착같이 챙겼다. 어떻게든 아끼고 아껴 돈을 쌓는데만 여념 없었다. 남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이웃과 사회는 나와 무관한 존재일 뿐이다.
양심판매대를 이용하다보니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낀다. 그러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임금을 받지 않고 승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맥주 값을 몰래 계산하고, 때때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 흥청망청한다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해 쌓는 데만 안달하기보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신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건 어쩌면 이 작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웃을 믿고, 나 역시 그 믿음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 나와 네가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믿음, 그 와중에 상황이 여의치 못한 이들을 배려할 여유를 갖는 것. 그로인해 더 끈끈하게 연대하고 나눌 수 있는 것 말이다.
대통령의 신뢰, 공직자의 신뢰, 언론의 신뢰, 그리고 개인 간의 신뢰. 신뢰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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