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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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송수연
  • 승인 2017.01.0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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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1)나, 다니엘 블레이크

<인천in>이 이달부터 ‘송수연의 영화 읽기’를 연재합니다.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한달에 1회씩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송수연 평론가(42)는 인천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6회 계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평론부문을 수상 등단하였으며, 계간 <작가들> 편집위원, 인하대 프론티어 학부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까만 화면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대화의 내용은 대번 답답증을 유발한다. 심장에 문제가 생겨 일을 할 수 없게 된 주인공에게 던지는 복지 담당 공무원의 질문은 가관이다. 앉았다 일어설 수 있습니까? 혹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신 적 있나요? 모자를 쓰듯 양팔을 높이 올릴 수 있나요? 팔을 어깨 위까지 들 수 있나요? 사람을 숫제 바보 취급하는 저 질문들 속에서 주인공은 답답함과 불쾌함을 느낀다. 자신은 심장이 좋지 않은 것이지 다른 곳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대답과 질문은 번번이 무시된다. 암전 속, 주고받는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첫 시퀀스는 의미심장하다. 소통 없는 매뉴얼의 세계. 효율과 합리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가진 매뉴얼이 휘저어 놓은 사람들의 삶.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질문을 던진다. 저 매뉴얼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매뉴얼로 대변되는 복지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사회파 감독 켄 로치에게 두 번째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사회파 감독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켄 로치는 그간 영국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 사회 문제를 자신의 앵글에 담았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세계 5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영국이 급변하는 시류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니 저 치욕스러운 질문의 의도에 맞춰 응답했다면, 아마도 그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네. 앉았다 일어설 때 고통을 느껴요. 아! 팔을 어깨 위까지 들어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등등. 거기에 약간의 신음과 상대의 동정을 바라는 간절한 눈까지 착장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얄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목수라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으며, 허투루 살지 않는다. 그러니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심장 얘기를 하자는데 안 통하는 지금이 그렇소.” 결국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격심사에서 떨어진다.

영화에서 다니엘 블레이크가 찾아가거나 전화로 만나는 어떤 공무원들도 그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서로 떠 밀거나, 매뉴얼에 적힌 천편일률적인 질문과 대답만 읊어댈 뿐이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각종 매뉴얼과 고투하는 사이 그의 삶은 점점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마침내 그는 가구와 집기까지 팔기에 이른다. 여기서 처음의 질문을 다시 상기해보자. 바보 같은 질문들로 이루어진 저 매뉴얼과 규칙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각종 복지 수당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저 질문들 앞에서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영화의 첫 시퀀스부터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복지 시스템의 민낯은 복지의 매뉴얼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대상화 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매뉴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능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매뉴얼은 내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내담자에게도 인격과 존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별자에 대한 고려가 없는 매뉴얼의 폭력은 매뉴얼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로봇에 가깝지만, 당연히 그들 중에도 매뉴얼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공무원이 있다. 물론 이 공무원은 그 인간미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 상사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여러 번 동일한 문제로 물의 아닌 물의를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 장면은 다른 많은 공무원들 역시 처음부터 로봇은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듯 매뉴얼은 매뉴얼을 둘러싼 그 누구에게도 인간다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매뉴얼이 사람들에게 이토록 폭력적인 것이라면, 빵과 치욕을 마땅히 함께 받도록 설계된 것이라면 이 매뉴얼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저 거대한 시스템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분노했고, 불안했고, 그럼에도 기대했다. 시스템의 폭력은 나를 분노하게 했고, 어쩔 수 없이 시스템에 종속된 주인공과 케이티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불안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기대를 끝까지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분노와 불안 기대는 나 자신 역시 시스템에 속한 자라는 스스로의 실존에서 비롯한 현실적 고민 그 자체이기도 했기에, 영화의 결말은 나에게 단순한 감동을 넘어서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도 빠듯한 상황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케이티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시혜자의 시선 없이, 케이티가 부끄럽지 않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돕는다. 스스로 존엄자인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존엄을 읽고, 그들을 존엄자로 대한다. 이것이 다니엘 블레이크가 사는 방식이다. 분노하고 돌은 던지기는 쉽지만,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영화의 결말은 나에게 질문을 남겼다. 나는 시혜자의 시선을 넘어 그 누구와도 빵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니엘 블레이크는 다니엘 블레이크로 살다가 다니엘 블레이크로 죽었다. 그는 외압 때문에 스스로를 왜곡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기 자신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다니엘이 될 케이티를 남겼다. 황금종려상 수상 후 인터뷰에서 켄 로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만 한다.”라고. 희망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는 사고의 영역이 아니다. 윤리는 실천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정확하다. 아무리 가난해도, 볼품없어도 지켜져야만 하는 품위가 있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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