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래지는 모래톱, 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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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래지는 모래톱, 사동
  • 유광식
  • 승인 2017.03.1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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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광식 / 사진작가
▲ 유광식_인천여상 경계벽에서 내려다 본 사동(일부)_2014


동인천역에서 지하상가를 통해 남쪽으로 걷는다. 용동마루를 넘어, 지하상가의 맨 끝(약 700m/도보 10분)에서 지상으로 나오면 답동 사거리다.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남으로 가야 나오는 곳, 사동沙洞이다. 현재 행정동은 신포동이나, 사동의 이름은 삼거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숨 쉬고 있다. 사동에서 즐길 수 있는 풍경이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주변에 눈에 띄는 큰 건물이라 봤자 인천여상과 씨티은행 건물, 티브로드 방송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가끔은 여객선의 하얀 옆구리가 눈앞을 가린다. 

바람 보태어진 흐린 날씨에 간혹 들러 보면, 삼거리 앞으로 쉴 새 없이 오고가는 대형 컨테이너 트럭과 중국 무역 상인들의 소규모 화물, 관광객을 위한 선물가게가 보이고 검은 캐리어가방을 끌며 나는 ‘끽!끼이~ 끽!기이~‘, 자동차공업사 에어드릴의 ’휘끽! 휘킥!‘ 소리가 번갈아 들려온다. 티브로드 방송국 옆으로는 새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도 많고 중소기업과 숙박업소, 식당들이 모여 있다면, 인천여상(뒤편) 아래로는 다양한 건축양식의 주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물론 이 주택가 사이길이 재미있다. 마당 안의 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고 언제 짖을지 모르는 개를 염두에 두면서 휘젓고 다니곤 했다.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집(불 탄 집도 있다.)도 있고 부수다 만 집도 있으며, 빈 터 작은 텃밭에는 채소도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양적으로는 그 구성이 부족할지언정, 봄철의 개나리 무리가 보이기라도 하면 반갑기 그지없다. 작은 동네라 그런지 몇 번 만에 길목은 훤해진다.


▲ 유광식_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입구 앞 도로변_2012


사동.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니 중소 중국무역상가가 눈에 많이 띈다.(갈매기특송이 특히 재미나다.) 그 뒤안길로 들어서니 일본풍 건축물이 나타난다. 지그재그 골목길을 빠져 나오자 이번엔 한국풍 기와 얹은 집이다. 중국풍 테라스가 있는 집도 남아 있다. 길 건너엔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이 있다. 그래서다. 물건 실어 나르기 좋은 위치이기에 무역상이 많다. 지금이야 몇 군데 보이지 않지만 중간 중간 환전소도 있다.(인가를 받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는 여객터미널 앞 횡단보도에 캐리어를 끌며 검정 가방 등을 안고 신호를 기다리는 외국인 무리를 적잖이 볼 수 있다. 나 또한 이들 무리 속에서는 외국인일 뿐이다. 현대에는 비행기를 통한 입국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 전만 하더라도 배로 오는 이들이 상당수 많았을 거란 생각이고, 그 첫 관문이 내항(항동)에 닿은 후 사동(=신포동)이 아닌가 싶다. 


▲ 유광식_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입구 앞 철로변 영세공장과 환전소(현재 철거되었다.)_2012


고일의 <인천석금仁川昔今, 경기문화사, 1955> 책을 통해 옛 개항장 부근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 특별히 사동의 언급이 있는 건 아니나 알고자 하는 것보다 느끼고픈 게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무언가 뜨겁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다. 어떤 유입의 흔적이 많아 보이기에 자연스레 문화의 흐름, 관련 인물의 동선이 상상되는 곳, 사동이다. 지난 2006년에 <사동 30-53번지> 특유의 장소성을 해석, 경험적 관망을 펼쳐놓은 전시(사동 30번지-양혜규 개인전/2006.8.19~10.8)가 기획되기도 했다. 직접 가보진 못했으나 그 흔적을 나중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모래톱 위에 얹힌 삶이 어찌 순탄대로였겠는가. 가난하고 고단한 몸을 뉘이던 예술인들 또한 많았다는 얘기는 신포동을 배회하는 바람이 들려주었다. 일본이 세운 신사자리인 인천여상 아래로 펼쳐진 낮고 위태로운 곳에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진 않았을 것 같다. 그저 없고 쫓겨서 온 이들의 사연이 밀려와 파도에 쓸려가곤 했을 것이다. 간혹 작품이 되어 출세했을 수도.


▲ 유광식_사동 30-53 빈집(냉장고에 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_2011


시절 이야기와는 다르게 언제인가 인천여상 아래쪽을 지나다가 괴팍하게 출현을 밀치는 행태를 겪은 적이 있다. 으레 그런 분 등 뒤로는 주인을 지키려는 건지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등장한다. 한편 외국인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는 주변의 환전소를 물었는데, 순간 은행으로 착각해 잘못 알려 주었던가 했던 기억도 있다. 사동 삼거리는 이제 수인선 재개통으로, 신포역으로 역할이 성장했다. 2번 출구의 인천세관 건물은 옆걸음쳐 40m를 옮겨 세웠는데 원위치에서 출구로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2번 출구는 세관모양이긴 한데 이상하다.) 신포역은 최근 불거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불판에 올려진 거론의 대상이기도 하다. 

무역인부, 관광객, 봇짐상과 숙박시설이 즐비해 주변에는 오래된 음식점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중국집과 백반집(복된식당, 인천집), 요리집(향원, 이조복국, 선미정), 다방 등 모든 게 이제는 시대의 산물이다. 얼마 전엔 칼칼한 된장찌개가 일품이었던 식당 한 곳이 이전을 했는지 문을 닫았는지 사라지고 내부 공사 중이었다. 간판만 남아 서너 번의 맛을 기분 좋게 간직하게는 되었지만 식당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을 넘어 그립기까지 했다.(나는 정녕 소멸의 아이콘? 가던 곳들마다ㅠㅠ) 주변 일용직 아저씨들의 퇴근 후 저녁식당인 듯도 했는데, 신포역 개통으로 인한 세 부담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 원망해 본다. 


▲ 유광식_소라된장찌개가 맛있었던 복된식당(휴업인 줄 알았는데 언제인가 뜯겨졌다.)_2017


매 주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가’를 외치고, 다른 한편에선 서울시청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나'를 외치고 있다. ’가‘구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한 예술인들의 분노와 표현의 동조가 무척 많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존재와 실력을 분출하며 시대의 저항을 쌓고 있다. 본 행사 이전에 행해지는 난장에 문화계 종사자들의 움직임이 상당하다. 미술, 연극, 사진, 서예, 무용, 음악, 문학, 전통 등 문화계 전반의 활동가들이 눈에 띄지 않는 낮은 곳, 낮은 처지에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광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벅차고 더 없는 행복감도 엿보인다. 개항시절 사동의 모습도 이처럼 활개구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만국공원에서 바라보면 동남쪽 위태로운 지대에 자리 잡았으나 일제에 대한 반감에 나라와 문화를 걱정하던 의지야말로 지금의 처지와 다르지 않단 생각에 이른다. 조금 과장하자면, 혼란의 시대 혼탁한 물속에서도 파릇파릇 생기 있게 뿌리내려 자라는 미나리, 촛불의 공간으로 비친다.   

사동은 그리 큰 면적은 아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다양한 업종과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금융, 음식점, 숙박업소, 철도역사, 인쇄, 무역상사, 환전소, 종교시설, 방송국, 주택 등 정말 다양한 공간감이 있다. 겉이긴 해도 작은 공간 속에 여러 다른 성질이어서 상상이 배로 깊어진다. 방송국 옆 모란장은 영업은 끝났지만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난민들의 애환을 달래줄 작정은 아니었을까 자꾸만 나는 소설을 쓴다. 모래톱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기쁨과 울분은 자꾸만 달궈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금 창백해지는 그 느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기억과 현상을 잘 여며야겠다. 여객선 뱃고동이 울리고, 어느새 동인천역이 가까워졌다. 


▲ 유광식_티브로드 옆 모란장 건물(모텔, 사무실로도 이용되다 아예 문을 닫았다.)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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