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앞에 선 자의 용기 있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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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앞에 선 자의 용기 있는 선택
  • 송수연
  • 승인 2017.06.29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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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연의 영화읽기] (6) '24주'
‘송수연의 영화 읽기’는 남구의 예술영화관 ‘영화공간주안’과 송수연 평론가의 협약하에 <인천in>에 개봉영화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매월 ‘영화공간주안’이 상영하는 예술영화의 예술적 가치 및 의미를 되새기며, 특히 영화와 아동청소년 문학의 접점을 독자와 함께 읽고자 합니다.





살아온 시간들을 되짚어보면 인생의 전환점이라 부를만한 굵직한 몇몇 사건들이 있었고 그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싶은 순간들 투성이라 아득하지만 그 때 그런 선택을 한 것이 ‘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왜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 것은 그런 성격을 가진 나였기 때문이었으니, 그 선택이 곧 나 자신인 셈이다.

여기 가히 운명이라 할 만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이 있다. 영화 <24주>(앤 조라 베라치드 감독 2017)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 놓인 여성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아스트리드는 독일의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씩씩하고 예쁜 아들, 동반자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남편과 함께 사는 그녀는 직업적으로도 인정받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중인 여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시련이 닥친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아스트리드와 남편은 힘들지만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데 시련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이의 심장에 문제가 있고 태어나자마자 가슴을 열고 수술을 해야 하며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수술이 반복될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지켜 볼 수밖에.” 자신의 일인데, 자기 아이의 생사가 달린 일인데,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절망하는 그녀에게 의사는 말한다. “이건 운명입니다. 그냥 운명이에요.” 그렇다. 실제로 우리네 인생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들이닥친다. 그래서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말들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오는 그것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찾아온 운명을 보내는 방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이 선택은 보통 양자택일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차악(次惡)의 선택지라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보다 늘 좋다는 보장은 없다. 아스트리드의 경우 아이를 낳으면 아이와 자신의 삶 모두가 녹록치 않은 것이 될 것이고, 낳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해도 그녀는 모종의 죄의식으로부터 아마도 일생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아스트리드는 낳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가 선택을 하기 까지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싸우고 몸부림치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러니까 <24주>는 ‘생명 윤리’나 ‘여성의 주체적 선택권’ 같은 정답을 정해 놓고 어느 한 쪽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게 이 영화는 운명에 맞서 도망가지 않는 자의 선택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삶에 관한 이야기로 보였다.

영화와 영화 속 인물들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최종 선택권은 아스트리드에게 넘긴다. 그녀는 만류하는 남편을 뒤로 하고 홀로 병원에 간다. 수술을 앞두고 찾아온 남편에게 그녀는 말한다. “날 위해서 이기도 해. 아기만이 아니라.” 이 장면은 그녀가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중에 방문한 병원의 장면과 짝을 이룬다. 낳는 쪽을 선택한 부모들의 아기들이 인큐베이터에서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이는 곳에서 한 커플이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의 선택은) 모든 여성들에게 모범이 될 거에요.” 그녀는 대꾸한다. “만약 내가 못하겠다면요?”





아스트리드는 누군가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바람을, 자신의 삶을 왜곡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대(對) 사회적 이기와 이타의 범주가 아닌 개인적 용기와 비겁의 범주로 해석해야 한다. 전자는 해석이 아니라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지 않으면 이기적인 것인가? 반대로 낳는 것이 모범이 된다면 낳지 못하는(않는) 사람들에게 그 사례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 모든 옳고 그름은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가끔 타인에게 묻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되는 질문들이 있다. 그런 질문은 스스로에게만 던져야 한다. 아스트리드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선택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진다. 낙태 직후 병원에서는 그녀에게 낙태했다고 사실 그대로 말해도 되고, 유산됐다고 해도 된다고 말한다. 실제 자연 유산이 되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그녀는 공인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영화에 정확히 그녀가 낙태임을 밝히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지만(맨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정확하게 말한다. “저는 7개월 전에 낙태했습니다.”) 이후의 장면들은 그녀가 유산이라 말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말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남편도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느냐고, 넬레(아들)가 받을 영향은 생각해봤냐고 묻고, 첫 복귀 무대를 앞두고 가진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작년에 큰 결정을 하셨죠. 어떻게 공개할 생각을 하셨어요?” 라고 묻는다. 아스트리드의 선택을 이기(利己)가 아닌 용기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해 내린 결정이 가져올 여파를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는다. 누군가는 그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자신과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기에 그녀는 도망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낙태 이후 집에서 쉬던 그녀의 뱃속에 5살짜리 넬레가 들어가 있는 숏(shot)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고 뭉클하다.

그녀가 낙태를 결정하고 병원에 누워 산파와 이야기할 때 아이의 태동을 강렬하게 느꼈던 것처럼, 어쩌면 사는 동안 그녀는 가끔 없는 아이의 태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환상지통(幻想肢痛). 때로 그것은 깊은 슬픔이 되거나, 지워지지 않는 회한으로 남아 그녀를 눈물짓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선택을,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한 상처와 아픔을 다른 것으로 덮어버리지 않았다. 운명이 던진 실존 앞에서 이만큼 용기 있는 선택도 드물지 않은가. 내 선택이 나 자신의 것이었음을, 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의 것이었음으로 그 결과 역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양자택일이라는 차악의 덫에서 벗어나는 길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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