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방가르드 거장’은 인천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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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방가르드 거장’은 인천 출신이었다
  • 배영수 기자
  • 승인 2017.08.2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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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뮤지션의 음반들 ⑤ - 강태환, 故 김대환
 
기자가 소장 중인 강태환과 김대환의 음반들 중 일부. 모두 발매 직후 구입한 것이기에 현재 시점에서는 구입이 힘들다. 특히 일본에서만 나온 ‘여로역여뢰(如露亦如雷-좌측 아래)’는, 직접 구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까지 타야 했다. ⓒ배영수

 
한때 인천은 부산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음악 신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록 음악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록 음악의 보고’로 불릴 만큼 중요한 자산이 있어 왔고, 이는 지난 1997년 IMF로 인한 경제 한파 이전까지도 유효했다. 경제위기 등의 원인으로 그 신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및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 조성 등을 통해 인천의 음악예술 판 일부도 서서히 다시 일어나고 있다.
<인천in>은 록뿐만 아니라 음악 장르 전체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천 출신의 인물들이 남긴 음악적 결과(주로 음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주류 및 비주류 음악 신에서 인천 출신 뮤지션들이 발표해 오고 있는 여러 결과물들을 매주 한 번씩 연재한다. 이는 <인천in>의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의 자료이기도 하겠지만, 훗날 인천의 음악 자산을 다루게 될 여러 작업이 진행된다면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인천 출신으로 세계 아방가르드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두 명의 전설, 강태환과 고 김대환 두 명을 조명하는 것으로 연재를 마감한다. 비록 이 두 명인은 대중음악계가 아닌 예술 영역의 ‘아방가르드’ 부분에서 활동해온 지라, 불특정 다수에게 음반을 추천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 유독 찬밥 취급을 받고 있는 인천 출신의 음악가 중에 이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드높인 사례도 있었음을, 시민들도 아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글의 배경이기도 하다.

 

색소폰 주자 강태환의 연주 모습. (이미지 출처 = 유튜브)

 
◆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자유연주가, 강태환 (1944~)
 
프리 재즈(악보 혹은 약속된 연주 패턴 없이 자유연주로 모두 채우는 재즈 음악의 한 장르) 계열에서 한국이 자랑하는 색소폰 연주자는 올해 일흔 넷의 강태환을 단연 꼽을 수 있다. 영국의 에반 파커(Evan Parker), 미국의 네드 로덴버그(Ned Rothenberg)와 함께 ‘세계 3대 프리재즈 색소폰 연주자’로 거론되는 그가 인천의 신흥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은, 인천시민들은 물론 이쪽 계열을 꽤 듣는다는 ‘재즈 팬’들도 잘 모르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어렸을 때는 클라리넷을 배웠지만, 서울예고 졸업 이후 알토 색소폰으로 주력 악기를 전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언제나 소위 ‘가부좌’ 자세를 먼저 잡고 색소폰을 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공연을 하든, 음반을 녹음하든 언제나 같아서, 흔히 서서 연주하는 형태의 공연에 익숙할 그의 모습에 처음엔 갸우뚱하는 관객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기 전 앉아있는 그가 왜 그런 자세를 취하는지, 공연이 끝난 뒤의 관객들은 대부분 알게 된다. 그만큼 그의 음악이 ‘무형태’의 것을 추구하면서도 심오한 무언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얘기다.
 
강태환의 음악 경력은 1970년대를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아래 서술할 김대환(드럼 등 타악기)을 비롯해 훗날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치게 되는 최선배(트럼펫-사실 이 세 명이 모두 일본에서 ‘넘버 원’ 급의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다)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리 재즈 그룹인 강태환 트리오로 활동했고, 활동 당시 [Korean Free Music Live Improvisation]라는 긴 이름의 음반도 발표했다. 김대환, 최선배와의 연주는 훗날 강태환이 같은 악기편성을 유지하면서 앨범을 발표하는 일종의 ‘모티브’로 봐도 될 것 같다.
 
199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쳐 보였다. 1991년 일본에서 발표한 ‘도깨비’를 비롯해 1995년 일본의 같은 계열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Satoh Masahiko)와 타악기 주자 토가시 마사히코(Togashi Masahiko)와 도쿄 신주쿠 재즈 클럽 ‘피트인’에서 공연을 해 이 실황을 ‘Asian Spirits’라는 이름의 음반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 앨범은 당시 한국의 음반 기획사 ‘애드 포르테(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총감독이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남편인 인재진씨가 세웠던 레이블임)’를 통해 발매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그의 음악 활동은 지금까지 왕성하다. 1990년대서부터 음악 활동을 함께 하기 시작한 타악기 주자 박재천과 그의 아내 미연(피아니스트)를 만나 색소폰-피아노-타악기의 편성으로 된 트리오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세 명의 연주로는 음반도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2003년의 ‘Improvised Memories’와 2006년 ‘오디오가이’ 레이블에서 500장 한정반으로 나온 ‘Isaiah’ 등은 그의 대표적인 2000년대 명반이다. 2011년에는 무려 두 장의 CD 분량을 색소폰 한 악기만으로 녹음된 ‘소래화(素來花)’라는 이름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2013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재즈 & 크로스오버 최우수 연주부문’을 수상키도 했다.
 

타악기 연주자 故 김대환의 생전 모습. (김대환 앨범 ‘흑우’ 표지)

 
◆ 한국 음악사(史) 최고의 타악기 거장, 故 김대환 (1933~2004)
 
지난 2004년 작고해 한국은 물론 범아시아적인 추모 열기가 이어졌던 타악기 주자 김대환 역시 인천이 자랑하는 아방가르드 계열의 뮤지션으로, 생전에는 앞서 언급한 강태환만큼 아방가르드 계열에서는 세계구급 지명도를 가진 ‘한국의 자랑’이었다.
 
태어난 곳은 충남 태안이었으나 곧 인천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유년시절을 인천에서 보냈는데, 일부 인천시민이나 재즈 팬들은 그가 동산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도 가끔 있다. 실제로 그는 동산고에서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이미 드럼 등 타악기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인천 출신의 진보 정치가 죽산 조봉암(출생 당시엔 경기도 강화군) 선생과 만나 그의 영향으로 정계 입문을 꿈꾸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치인보다 예술인으로서의 두각을 먼저 나타냈던 그는 미8군에서 드럼 연주를 하면서 프로 연주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이때가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미군부대에서의 연주를 통해 대중음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신중현의 밴드 ‘퀘션스’를 비롯해 최이철(전 사랑과 평화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및 조용필 등과 함께 ‘김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는 등 음악적인 역량을 뽐냈다.
 
그런 그가 강태환을 만나 본격적인 프리 재즈로 전향했던 것은 1970년대 중후반 정도였다. 양 손에 6개의 굵은 스틱을 들고 활동하는 그의 열정적인 연주가 만개한 것도 강태환, 최선배 등 동료 프리 재즈 뮤지션들을 만난 이후였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긴 시간을 국제적 수준의 무대에서 세계 유수의 음악 관계자 및 팬들과 만나면서 그는 어느새 범아시아권을 능가하는 타악 연주자로서 명성을 쌓게 됐다.
 
그가 오른 대표적인 무대만 몇 군데 이야기해도 이전부터 프리재즈 계열의 시장이 조성돼 있었다는 일본의 간사이 페스티벌을 비롯해 세계 최고의 프린지 축제로 유명한 영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미국의 산타페 페스티벌까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수준이다. 그의 대표 음반인 ‘흑우(黑雨)’ 역시 세계를 드나들며 가장 왕성히 활동하던 1990년대 초반 나왔던 결과물이었다.
 
사실 김대환의 이름이 국내의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음악이 아니라 소위 ‘세각(細刻)’이라 부르는 것으로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어 기네스북에 오른 과거 때문이었다. 전문용어로 ‘백미실물세서(白米實物細書)’라고 부르는 이 활동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지만, 사실 ‘뮤지션’으로서의 그는 국내에서 그만한 대접을 비교적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에서 ‘전설’의 평가를 받아, 2004년 그가 서거한 그해 그를 추모하는 성격의 앨범 ‘여로역여뢰(如露亦如雷)’가 일본 현지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여로역여뢰(如露亦如雷)’는 정작 우리나라에선 그 어떤 이들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하물며 정식 수입한 음반사조차 한 군데도 없었다. 앞서 언급한 강태환과 최선배를 비롯해 해금 연주자 강은일 등이 참여한 ‘한국인의 앨범(물론 수록곡 중간 유스케 야마시타, 카즈미 와타나베 등 일본 연주자들과의 협연도 있기는 하다)’이 정작 국내에서 외면을 받았다는 것은, 다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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