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야 한다는 부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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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야 한다는 부담감
  • 김국태
  • 승인 2017.11.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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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화 - 김국태 / 인천가현초교
 

나는 1학년 담임이다. 이제 11월이 중반을 넘어서 1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벌써 8개월이 넘었다. 담임으로서 나는 1학년 아이들과 지내면서 정말로 다양한 생활모습을 보게 된다. 밝고 명랑하게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아이들이 많지만, 수줍음이 많아서 늘 말없이 혼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다. 교사에게 활발하게 말을 시키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아이들이 많지만, 늘 부드러운 표정으로 묻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자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아이도 있다. 늘 밝게 웃으면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쉬는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이 많지만, 늘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림처럼 앉아서 쉬는 아이도 있다. 과제가 어려우면 옆의 짝에게 웃으며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과제를 혼자서 진지하게 해결하는 아이도 있다. 수업시간에 번쩍 번쩍 손을 들면서 앞에 나와 발표를 즐기는 아이들이 많지만, 생전 손 한번 들지 않고 조용히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도 있다. 어쩌면 극단적인 두 유형이 언제나 우리 교실에는 존재한다.

 

아마도 학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삶은 자신의 성격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성격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밝음-우울, 혹은 내향성-외향성 스펙트럼 중의 어디쯤에 위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친구와 짝을 선택하고, 대화를 풀어나가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달라진다. 나중에 직업에도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편향된 유형에 점수를 준다. 바로 밝음의 외향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울하고, 말이 없고, 조용하며, 수줍음이 많은 어두운 아이들은 그렇다는 사실만으로 인간 실격의 취급을 받는다. 1학년을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X학생은 우울한 느낌이 들어 걱정이에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다수의 교사들도 ‘밝은’ 학생을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1학년 담임으로 학부모 상담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조용한 성격으로 수줍고 밝지 않다는 점을 큰 걱정거리로 받아들인다. 담임인 교사들도 “자기표현이 부족하고,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생각이 많아 학습속도가 느려터지고” 등등의 말을 하게 된다. 나 자신도 아이들에게 긍정적으로 ‘밝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밝은 아이들을 더더욱 칭찬하고, 생활태도에서 좋은 시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수들도 입학시험 면접에서도 ‘뽑고 싶지 않은’ 학생을 열거하는데 그중 단연코 으뜸은 ‘어두운’ 학생들이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밝은 사람과 밝은 분위기를 종아 할까? 밝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아이들도 ‘밝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 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소외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하고 깊은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바로 자신이 본질적으로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가정을 해버린다. 그저 밝지 못할 뿐인데 말이다.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나도 초등학교시절부터 밝은 편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늘 그림자처럼 지내왔다. 중학교 때부터 그저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억지로 밝고 쾌활한 분위기에 맞춰왔을 뿐이다. 아마도 나처럼 외향적인 척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마저 속이는 것도 납득이 간다. ‘밝아야 한다’는 신념체계에 따라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인간상도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존재일 거라고 다들 믿고 있다. 내향적인 특징(진지함, 수줍음, 우울함)들은 이류로 여겨지거나 실망스러운 아니면 병적인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밝음’의 이상을 떠받드는 세상에서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한다. 조용한 성격에 대한 선입견이 깊은 정신적 고통을 남기기도 한다. 물론 ‘밝음’의 성향은 대단히 매력적인 성향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적인 기준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인생 반 내려놓기」의 자지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어차피 죽음으로 끝나는 비참하고 잔인한 인생을 사는 자세로는 어두운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밝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거나, 아니면 연기를 하거나, 아니면 엄청 둔감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된 밝음’만 있는지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자연스러운 어둠’도 받아들이면 좋겠다. 밝은 사람과 우울한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인정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밝음의 외향성을 지향하면, 우울의 내향성을 풍성한 내면세계와 관련지어 정의하지 않고, ‘자기주장성’이나 ‘사교성’ 같은 자질이 부족하다는 시각으로 밝지 못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된다고 「콰이어트」의 저자 수전케인은 말한다. 이 점이 교사인 나에게 크게 다가왔다. 우울한 혹은 내향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겹핍의 존재, 문제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교사라면, ‘밝음의 이상’을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실수는 하지 말자. 물론 사교적이고 밝고 명랑하며 활발히 참여하는 학생들과 함께 잘 어울리면 좋겠지만 우울한 아이들, 부드러운 아이들, 조용한 아이들, 수줍음 많은 아이들도 잊지 말자. 「콰이어트」을 보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 예술, 발명품 중 진화론과 반 고흐의 <해바라기>애서 개인용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조용한 사람들에게서 탄생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조용한 아이들도 내일의 예술가이고 엔지니어이며 사상가다. 이런 아이들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느낌을 갖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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