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쉼터'…종교 전파 발자취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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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쉼터'…종교 전파 발자취를 따라
  • 이병기
  • 승인 2010.10.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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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⑤ 정신문화의 현장


옛 내리교회 모습

취재: 이병기 기자

중구와 동구에 남아 있는 대표적 근대 건축물 중에는 종교와 관련된 건축물을 빼놓을 수 없다.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중구 답동성당을 비롯해 성공회 내동교회와 내리교회가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북성동 의선당은 차이나타운 내에서도 중국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물질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문화 확장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던 개항장의 근대적 삶. 당시 사람들에게 '영혼의 쉼터'를 마련해 준 종교시설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한국기독교백주년 기념탑~내리교회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탑

인천역에서 파라다이스호텔을 지나면 한국기독교백주년 기념탑이 나온다. 이곳은 1885년 4월5일 부활절에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인천에 상륙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는 기념탑만 세워졌으나, 2008년 4월 주변에 쉼터을 조성했다.


첫 선교 수녀 도착지

중부경찰서 방면으로 300m쯤 지나면 첫 선교 수녀 도착지가 있다. 중부서 후문쪽에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고 쓰인 기념비는 1888년 4명의 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지 120주년을 맞아 2007년 7월 세워졌다.

다시 인천역 방향으로 조금만 되돌아 가면 우측 언덕에 해안성당이 위치해 있다. 도로에서는 모텔에 가려 위치를 찾기 어렵지만, 차이나타운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해안천주교 성당1958년 답동성당에 다니던 화교들이 건립한 해안천주교 성당은 이후 인천교구장의 재가로 1972년 한-중 합동 본당인 해안동 성당을 설립했다. 성당 앞쪽에 있는 성당 교육관은 1939년 중국인 주택 용도인 '사합원' 형태의 건물로 지어졌다.

차이나타운 길을 따라 인천역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왼편에 의선당이 나온다. 1893년 설립된 의선당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의 교화기관으로 건립된 사원이다.

의선당은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1970년대 화교사회가 위축되면서 함께 폐쇄됐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 지원으로 수리 후 다시 문을 열었다.

의선당에서 뒷편 길로 가다가 자유공원쪽으로 올라가면 인천중화기독교회가 나온다. 청국조계지가 철폐된 1914년 이후 경성중화교회 도움으로 1917년 6월 중국인 목사가 부임해 설립됐다. 현재는 교회 현관 안쪽에 '중화기독교회 1922년'이라고 쓰인 표지판만이 유리문 밖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다음으로 찾을 곳은 성공회 내동교회. 이곳에 가려면 자유공원을 넘어가야 한다. 선선한 가을바람 속에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짠 내음을 맡으며 공원 풍경을 감상하는 일도 운치를 더한다.


의선당


중화기독교 인천교회

1890년 영국 해군 종군신부 코프 주교와 랜디스 의사가 선교와 의료 활동을 위해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듬해  송학동 3가 3번지에 성미카엘교회를 지었으나, 6.25 전쟁으로 타격을 입어 누가병원 터(현 내동교회 위치)로 교회를 지어 이전했다.

내동교회는 중세풍 석조에 한국의 전통 목재 처마양식을 가미한 구조다. 6.25 전쟁 영국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고자 유가족들의 모금으로 건립한 전쟁기념 교회다.


성공회 내동교회

내동교회에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 보면 내리교회가 보인다. 이곳은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종교집회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지면서 한국감리교 최초의 교회로 유명하다. 당시 개신교를 전파한 서구 선교사들은 대부분 인천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 전국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현 내리교회

'내리의 아버지'라 칭송받은 존스 목사는 1892년 부임해 1903년 내리교회를 떠날 때까지 영화학당과 선교사 합숙소 등을 건립했다. 아울러 강화와 해주, 남양 지방의 전도도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 내리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현 건물을 신축했다.

답동성당~여선교사 합숙소


현 답동성당

신포동 방면으로 조금만 가면 왼편 언덕에 답동성당이 나온다.

1887년 조불수호조약 비준 후, 서구 천주교 선교사들은 인천에 정착해 선교활동을 하면서 교회 건립을 도모했다. 답동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 신부가 제물포성당을 창설한(1889)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됐던 건립작업이 1895년 정초식 이후 본격화했다. 이듬해 종탑을 짓고 축성식을 거행했다. 신자 수가 증가하자 제4대 드뇌 신부가 증축계획을 세웠다.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등 개축을 시작해 1936년 현재 구조를 완성했다.


성바오로 수녀원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성바오로수녀원은 1893년 인천에 부임한 마라발 신부가 수녀원 건립 필요성을 주교에 건의하면서 답동성당 안에 설립됐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초기 수녀원은 20명이 거주할 정도의 3층 벽돌건물이었다. 6.25 전쟁 때 파괴됐으나, 1952년 미군 원조로 지상 2층 건물로 재건했다.

동본원사 터신흥초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답동로얄맨션 자리가 예전 동본원사 터다. 1885년 설립된 동본원사는 인천 최초의 일본 사찰이었다. 초기에는 진종대곡파 본원사 소속으로 동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시작했다.

이후 신도 수가 점차 늘어나자 거류민들의 장례 의식과 육·해군, 일반인 묘지 관리도 맡게 됐다. 1899년 인천별원으로 개칭하고 1902년 화장터와 1925년 산문·납골당을 지었다. 1930년대에는 신도 수가 약 3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인 인천신사 터는 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에 위치해 있다. 인천여상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1개의 돌탑과 2개의 석축은 인천신사의 흔적이다.

신사 또는 신궁이란 일본에서 왕실 조상이나 고유의 신,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이다. 인천 내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자 1889년 하야시 겐스케 일본 영사가 기부금을 모금해 건립했다.

묘각사 터는 신흥동 주택가 근처에 달랑 비석만 하나 세워져 있어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돌로 만든 진입계단을 찾으면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다.

묘각사는 일련종의 사찰로 1893년 건립됐다. 1893년 5월 14명의 일본거류민단 총대표가 비석건축 신청서를 제출해 인가를 받았다.


인천신사 터


묘각사 터

다시 옛 시립박물관쪽으로 길을 건너면 언덕 윗편에 화엄사가 있다. 이곳은 1908년 중건된 일본 사찰로 1946년 이후 해광사가 들어서 있다. 현 명부전은 화엄사 시절 건물이다. 일본식 석물과 석축 등이 남아 있다.


화엄사(현 해광사)

마지막으로 둘러볼 곳은 창영동 여선교사 합숙소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18호이기도 하다. 미국 감리교가 1884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맥클레이 등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숙소를 마련하게 됐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자 선교사 숙소도 지었다. 여선교사 합숙소는 기능뿐만 아니라 서울과 평양에 있는 여선교사를 위한 여름휴가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 남선교사 합숙소 자리에는 동인천세무서가 들어서 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여선교사 합숙소는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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