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미추홀로, 주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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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미추홀로, 주안동
  • 유광식
  • 승인 2018.04.2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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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최종회) 유광식 / 사진작가
▲ 유광식_신기시장 주변 신기길 내 상가점포들(사람들이 정말 복잡하게 얽혀 산다.)_2014


서울은 나에게 있어 유년의 터전을 떠나 유입된 교육의 장소로, 마치 성장소설 같은 도시였다. 성인이 된 후에 살게 된 인천은 사회생활의 접점공간이 되었다. 이처럼 서울과 인천은 나의 인식 속에 대척점으로 존재한다. 주안은 내가 인천에 발을 디딘 첫 관문이었고 처음 인천에서 활동의 거점을 잡은 곳이 주안동의 주안역 근처였다.

이후 나는 주안에서만 세 곳의 사무실을 거치게 된다. 당시 근무지의 창문 밖 풍경은 주안5동 성당의 정문이었고, 서른 초반이던 나는 비가 올 때마다 창밖으로 성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한번은 근처 은행에 들렀다가 우연히 받은 고추 한 모를 정성스레(당시 내 처지와 같아 보였는지) 가꾸게 되었다. 큰 화분에 옮겨 심고 물도 줘가면서 키운 고추나무. 그 해 소나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고추 몇 개를 수확해 부침개를 부쳐서 사람들과 나눠(나눠 먹기까지?) 먹은 경험은 두고두고 생생하다. 10여 년 전에 나는 ‘주안’이니 ‘인천’이니 하면서 정주와 이탈이라는 파도에 출렁이는 신세로 처음엔 무척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과연 나는 그 파도 속에 있기만 했을까? 


▲ 유광식_주안5동 성당 앞 생활도로(2007년 내내 오가던 길이었지만 정이 들진 않았다.)_2018


노동과 문화 분야에서 서성이다 보니 당연하게 사건의 중심이던 주안동으로 오게 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기억하기로는 사라진 파파이스와 롯데리아 매장이 깊게 남는다. 지금의 청년들이 당시의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느꼈던 마음의 흔들림만큼은 같지 않을까? 서울에서 인천으로 유입된 나에게는 빠르게 변화하는 주안역 부근의 시각들이 인천의 첫인상이 되었다. 개항장이 아닌 주안이나 동암이 이 도시의 첫 인상으로 자리 잡힌 것이다. 덧붙여 인천의 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었던 책이 있었으니, 전)인천일보 조혁신 기자의 책들이었다. ‘뒤집기 한판’, ‘삼류가 간다’ 등을 읽으며 많은 공감을 했다. 당시 책으로 전해진 정보가 내겐 땡감을 우리는 과정과도 같았다.  


▲ 유광식_주안역 남서방향 버스정류장 뒤편, 내 나이는 된 듯한 신도아파트(개발논의로 분위기가 다소 살벌)와 길 건너 영화관 건물(삶은 CG로 재생될 수 없다.)_2017


인천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직통열차가 정차하는 역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주안역은 직통열차 정차역이고 지하상가도 있고 유동인구가 많다. 주안역을 중심으로 볼 때, 북쪽은 공단 쪽 문화가 강한 반면, 남쪽은 오락과 유흥, 시장, 문화시설들이 있다. 
주안역에서 북쪽 방향의 옛)주안염전 터(경인고속도로가 이 때 만들어진다.)에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출퇴근시간이 되면 인파의 꿈틀거림이 강하다. 낮이나 밤이나 사람은 많았고 나는 그곳이 ‘거대한 불기둥 같은 장소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공단종합시장이 있는데, 시장이라기 보단 다 쓰러져가는 맘모스창고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옆으로는 당시 나의 치아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훗날 다른 곳에서 AS를 해야 했다.) 원망스런 치과도 있다. 주안5동 성당 뒤로는 큰 사찰이 하나 있다. 용화사라는 곳인데,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제를 모시게 되었다는 어머니의 말에 공간적 인연이 묘했다. 


▲ 유광식_주안역 입구 사거리 옆 1980년생 공단종합시장(시장으로서의 기능보다 수출공단 역사의 증언자로 보인다.)_2018


비스듬한 언덕을 따라 꼭대기로 오르면 옛)인천시민회관 사거리가 나오는데, 당시 이곳에서 행사가 정말 많았었다. 한번은 어느 극단의 돔천막을 짓는 작업에 동원(?)이 되었는데 초여름 힘이 들만도 했고, 천막 안에서 방범을 목적으로 하루 노숙을 했는데 정말 먼지 가득히 ‘이게 뭔지?’ 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인천은 내게 시큼시큼 ‘아이셔’ 맛이었다. 그토록 많은 행사를 치른 그 곳엔 현재 나무도 곳곳에 심어지고 농구장으로 쓰이던 작은 공간에는 ‘틈 문화창작지대’라는 미디어콘텐츠 관련시설이 들어서 있다. 옛 시민운동의 중심축이었던 곳의 변화는 직통노선처럼 재빠르다. 


▲ 유광식_옛)시민회관 쉼터 자리 한 켠 농구장에서 뛰노는 아이들(2015년 '틈' 문화창작지대로 컨테이너시설이 들어섰다.)_2006

▲ 유광식_틈 문화창지대 다목적실에서 진행된 <30주년 인천 5.3민주항쟁정신 계승기념식> 일환으로 바람의 춤꾼-이삼헌님이 깃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_2016


좀 더 가보자! 멀리 남쪽으로 가면 제2경인고속도로 입구 못 미쳐 신기촌에 다다른다. 남부종합시장과 신기시장이 붙어 있는 이 곳 또한 어마무시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신기촌의 허름한 어느 주택에 잠시 거주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3개월 만에 갑작스러운 개축일정으로 나가야 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곳은 작은 카페로 변하였고, 이후 작업실로 이용되고 있다. 그 집 앞에 있던 집들이 다 흙집이었고 몇 년 전엔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훤한 동네공원이 되었다. 당시 집들은 문이 땅에서 허리를 다 펴지 못할 지점의 높이까지로 낮았고, 지붕이 축축하게 젖어 내려앉아 흐물흐물한 위태로움이 질퍽함으로 스며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의 몇몇 분들이 막걸리 파티를 여는 풍경이 일상이었고, 11시가 조금 넘으면 어김없이 야채장수 아저씨의 활기찬 목소리가 점심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곳으로 기억된다. 잠시 나의 작업실이 되어 준 그 집에서는 다음 해에 마치 살풀이라도 하듯 ‘신기시네마’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그곳은 짧았던 나의 ‘신기루樓’였다.) 


▲ 유광식_주안7동 주민센터 건너편 먹거리 상점(야구 하는 날이면 바빠진다던 닭강정집과 아는 사람만 안다던 생선구이집)_2016


주안은 인천의 산업화시대에 생산력과 비례한 노동운동의 현장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에 씁쓸한 시간을 읽어내기도 한다. 지금이야 당시 그토록 노렸던 탈출을 감행하여 곳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지만, 인천이라는 맛보기는 주안이란 사실을 안다. 탈출했지만 지금은 다시 찾게 되는 점 또한 신기한 노릇. 주안과의 재회에는 자주 찾는 ‘영화공간 주안’도 한 몫 하고 있고, 2호선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환승과 만남의 장소로서 주안을 더욱 자주 찾게 되었다. 염전이라는 기억으로서의 주안은 내게는 없으나, 인천으로 유입되던 첫 맛이 소금의 짜고 쓴맛처럼 느껴졌던 부분은 이제 돌이켜보니 소금이자 빛이 아닐 수 없다. 소금밭 주안이 올해 여름부터 ‘미추홀구 주안동’이라는 새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인천의 중심지역인 주안땅을 품기를 바란다. 언제 적 처음처럼 말이다. 


▲ 유광식_6월이면 다시 선거국면이다. 2017년 신기시장 사거리에 나붙은 대선후보 현수막(다시 불붙기 시작한 정치세계)_2017

※ 연재를 마치며
두 발로 인천을 두루 누비며 주섬주섬 인상들을 모아 글로 내비쳐 온 지 어느새 2년이 되었습니다. 작가인 저에게는 인천의 장소와 정서를 생각하고 정리해 볼 수 있었던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오래도록 가져주신 관심에 인천in 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튀어 오르고 있는 갖가지 도시개발공약이 자칫 오랜 정의로서의 ‘거주’의 의미에 흠집 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인천소요仁川逍遙]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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