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김포 곡창지대 물대던 8백㎞ 동·서부간선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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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 김포 곡창지대 물대던 8백㎞ 동·서부간선수로
  • 장정구
  • 승인 2018.05.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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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금파통수제와 신곡양배수장 - 장정구 /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

<서부간선수로(왼쪽)와 신곡양배수장, 굴포천(오른쪽)>
 
 
“매년 봄 신곡양배수장에서 금파통수식이 진행되는데 정말 장관이에요”
“올해로 96회째인데 얼마 전 행사가 취소되었어요”
 
굴포천 옆 부평평야의 논에서 만난 농부가 많이 아쉬워한다. 통수식은 한국농어촌공사 김포지사가 주관하는 행사인데 올해는 김포지역에 구제역이 발생하여 취소되었다. 6.13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지방자치단체들도 행사 개최에 부정적이었다고 후문이다. 김포와 부평평야에 가을이면 벼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이는 것 같아 금파(金波)라 명명했다고 한다. 금파통수제는 1923년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논농사는 오래전부터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수전(水田) 농업이 주를 이뤘다. 대규모로 한강물을 퍼올려 농업용수로 사용하면서 김포와 부평의 들판이 곡창지대가 되었다. 신곡양배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은 서부간선수로와 동부간선수로 등 8백㎞가 넘는 농업용수로를 통해 김포와 부천, 부평, 인천 등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로 공급된다.
 
신곡양배수장 앞에는 백마교라는 다리가 있다. 백마교를 건너면 막다른 길이다. 한강의 하중도(河中島)인 백마 도로 향하는 길을 군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마도에서 일산쪽으로 하얀 물거품의 띠가 보인다. 신곡수중보다. 신곡수중보 위에는 군초소로 보이는 직육면체의 인공구조물들이 서 있다. 1986년 준공된, 탱크가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폭이라는 신곡수중보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때 북한의 반잠수정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나름 설득력을 갖게 하는 광경이다. 1킬로미터가 넘는 신곡수중보는 높이 2.4미터 길이 883미터의 고정보와 수문 5개로 되어 있는 124미터의 가동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수중보로 인해 서울의 한강은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신곡수중보 가동보와 백마도 그리고 김포대교(오른쪽)>

 
신곡양배수장 앞 영사대교에 서면 3개의 물줄기가 보인다, 다리 밑에 하나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다리 밑, 한강을 향해 흐르는 물줄기는 굴포천이다. 한강 쪽에서 굴포천의 상류방향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각각 서부간선수로와 동부간선수로이다. 이 수로들의 물은 한강물이다. 신곡수중보 남측 백마도와 육지 사이에 있는 가동보는 열고 닫을 수 있는 갑문이다. 이 가동보에서 한강물은 신곡양배수장으로 흘러들고 지름 2미터짜리 대형펌프 5개로 농수로에 퍼올려진다. 초당 38톤의 한강물을 퍼올리는데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속에는 간혹 팔뚝만한 잉어들도 보인다. 신곡양배수장은 한 때 동양 최대를 자랑했던 양배수장이다. 양수는 물을 퍼올리는 것을 의미하고 배수는 물을 빼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이 중 하나의 기능만 하는데 신곡양배수장은 양수와 배수, 두 가지 기능 모두 가지고 있다. 홍수 시 굴포천 물을 한강으로 배제(排除)하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이다. 굴포천은 평상 시 신곡양배수장에서 약 1킬로미터를 한강과 나란히 수로를 따라 흐르다 한강으로 흘러든다.


<농번기에는 오른쪽 굴포천 갑문은 닫히고 한강물이 왼쪽 양수장으로 유입된다. 홍수기에는 오른쪽 갑문이 열려 배수장을 통해 굴포천 물이 한강으로 배제된다>

 
신곡양배수장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8년 이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자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추진한다. 1923년 부평수리조합이 설립되고 지금의 신곡양배수장 인근에 한강변을 따라 뚝을 쌓고 굴포천의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농수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부평과 김포 평야의 농경지는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 한강물은 팔당댐에서 취수(取水)되어 인천시민을 비롯하여 수도권 시민들에게 생활용수로 공급된다. 잠수대교 아래 잠수보에서도 또 다시 취수되어 인천과 서울의 시민들에게 공급된다. 여러 다리 밑을 지난 한강물은 신곡수중보를 넘어야 비로소 임진강을 만나고 예성강을 만날 수 있다. 댐과 보가 한강을 가로지르기 전 황어와 웅어는 물론 황해의 상괭이도 자유롭게 드나들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계양도호부부사로 부임했던 이규보는 망해지(望海志)에 ‘계양산 변두리는 삼면이 물에 잠기고 한 면만 육지로 통하여(唯一面得通於陸) 마치 섬에 온 것 같다(疑入島嶼中)’고 기록하였다. 또 과거 굴포천을 대교천(大橋川)이라 했는데 지금의 당미교와 박촌교와 사이 어디쯤에 큰 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지도와 기록 에 비추어볼 때 산곡양배수장과 농수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굴포천 하류 주변과 한강합수부 지역은 저지대 습지였을 것이다.
 
‘우순풍조 시화연풍(雨順風調 時和年豊), 비가 순하게 오고 바람이 고르게 부니 세월이 좋아지고 풍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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