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그리고 어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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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그리고 어떤 아이
  • 윤종선
  • 승인 2018.05.31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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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 윤종선 / 인항고등학교 교사




아침마다 교무실에 커피향이 가득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겐 아침에 갓 내린 원두의 향이 항상 편안함과 여유로 다가온다. 치열한 하루를 보내기 전의 숨고르기, 그것이 나에겐 커피이다. 원두를 먹기 시작한 건 20살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부터이다. 그 시절 사장님이 만들어주던 쓰디쓴 원두의 맛이 내 인생 커피의 시작이었다. 아침마다 가게를 가득 채우던 커피의 향기. 그때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장님과 나누던 커피는 지금처럼 나에겐 항상 편안함과 여유였다. 창밖으로 흐르는 계절과 커피, 그것만으로도 20대의 감수성은 충분히 충족됐다.
 
지금 내가 맡은 반은 문예창작반이다. 아이들 모두가 글을 쓴다. 요즘 아이들이지만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감수성이 나에겐 묘한 동질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사실 무척 즐겁다. 하지만, 아픈 손가락인 한 아이가 있다. 지금은 다행히 위탁을 통해 자신을 잘 다독이고 있지만 학기 초에는 학교에 적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4월이 되어 조금은 친해지자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읽어보라고 자신의 글을 들고 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일주일 정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겠다고 했다.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만든 그 아이의 글 속에는 매일매일 롤러코스터처럼 변화하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그 중, 하나의 짧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coffee house.
커피가 나를 재운다. 외로운 나를 재우고, 외로운 그대를 재우고, 외로운 나무를 재운다.
커피는 내가 파는 것이다. 원두를 사 누군가에게 커피를 만들어 준다. 카페는 스웨덴 동쪽에 위치해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 아무도 시끄럽지 않은 곳. 우리는 그곳에서 커피를 판다. 아침엔 조용함이, 점심엔 선선함이, 저녁에는 고요함이 이 자리를 채운다. 음악은 항상 흐르고 고요한 마음을 조용히 채운다. 그대가 나를 채우는지 비우는지 누가 알겠나. 그저 흘러간다. 레코드판 위의 시소가 돌아간다. 음악이 흐르고 조용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건 고요함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서 우리는 커피를 판다. 체드 베이커의 "ALMOST BLUES"가 흐르면 우리는 피아노가 우리에게 다가옴을 느낀다. 왜 그것이 나를 재우는지 모른다. 마음이 이미 선반에서 나가 있기에 우리는 파도가 온다. 파도가 온다. 가을은 모든 걸 씻는 계절이다. 비우다 보면 눈을 맞이하고, 다시 봄을 준비하고, 겨울 꽃이 피고, 그대의 마음에도 봄이 온다. 삶속에는 아픔이 녹아있고 고독과 외로움이 공존한다.



 

커피를 소재로 한 글이었다. 아이의 치열한 감정이 녹아있는 험한 글들 중에서 혼자 편안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 짧은 글. 나는 나도 모르게 글이 써진 종이를 꺼낸 후 책상 한 구석에 붙여 두었다. 나는 왜 이 글이 왜 맘에 들었던 걸까. 힘든 일상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나 또한 그 아이처럼 카페에서의 무료하며 여유로운 삶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침마다 맡고 있는, 혹은 20대 시절에 맡았던 커피향이 느껴진 것일까.

내가 글이 맘에 든다고 하니 아이는 무척 기뻐했다. 글이 맘에 드는 이유와 나의 커피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자 그 아이는 해맑게 웃었고 나 또한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웃었다. 기고 글을 쓰다가 생각 나 아이에게 간만에 전화를 했다. 위탁학교에서의 얘기, 일상 얘기 등 선생님과 학생이 할 수 있는 진부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유쾌하게 웃으며 통화를 했다.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커피 한 잔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특히, 커피와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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