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맘대로 붙일 수 없는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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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맘대로 붙일 수 없는 '주소'
  • 최종규
  • 승인 2010.11.01 0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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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사진찍기 ③] 골목집 작은 문패 1

 화평동 그림할머님 그림집에 붙은 종이쪽지. 이 종이쪽지는 이름패 노릇을 훌륭히 합니다.
 문패는 집에 붙이는 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패에는 주소를 적은 주소패하고 이름을 적은 이름패 둘이 있습니다. 주소와 이름을 나란히 적은 문패가 있고, 주소와 이름을 따로 적은 문패를 같이 걸거나 마주보며 걸곤 합니다. 집에 문패를 붙이는 까닭은 이 집이 누구네 집인가를 밝히는 한편, 우체국에서 편지를 옳게 갖다 주도록 할 생각이겠지요.

 집에 붙는 주소는 집임자가 마음대로 붙이지 못합니다. 관청에서 통계를 내고 조사를 해서 붙입니다. 관청에서는 틈틈이 동이름이나 구이름을 크게 갈아치우곤 합니다. 인천은 1910년에 인천부가 되고, 1949년에 인천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천직할시가 된 해는 1981년이고,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바뀝니다.

 저는 1981년에 경기도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바뀐 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천은 부산(1963년) 다음으로 대구와 함께 직할시가 되는데, 경기도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따로 서던 그무렵, ‘인천이 드디어 서울 그늘에서 벗어나고 경기도 손아귀에서 풀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기뻤습니다. 서울하고 가깝다는 까닭으로 언제나 ‘서울에서 쓸 물건은 인천에 공장을 세워 만들고 공장 본사는 서울에 있’는 한편, 경기도 인천시인데 경기도에서 인천이 수원보다 사람이 많으면서도 경기도청은 수원시에 있고, 인천보다 작은 경기도 다른 시에는 방송사 지국이 있어도 인천에는 아무것조차 없는 갖가지 푸대접을 이제는 말끔히 털 수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고작 일곱 살이었는데요.

 어쩌면 일곱 살 어린이조차 느낄 만큼 인천이 받은 푸대접이 컸다 할 수 있습니다. 큰 건설회사 간부로 있으며 강남에서 내로라하는 아파트에 살던 작은아버지네에 찾아간다며 서울마실을 할 때마다, 인천하고 서울이 얼마나 크게 벌어졌으며 서울사람이 인천사람을 어떻게 깔보는가를 쉽게 느꼈습니다. 같은 거리를 달려도 서울에서 인천으로 넘어오는 택시삯하고 인천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택시삯이 달랐고, 인천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전철삯은 비싸고 서울에서 더 먼 거리를 달리는 전철삯은 외려 쌌습니다.

 아무튼, 1981년에 경기도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바뀌며 꽤 많은 집이 문패를 ‘인천직할시’로 바꿉니다. 그런데 1995년에 광역시로 바뀔 때에는 문패를 바꾼 집이 그리 안 많습니다. 1981년에 행정구역이 바뀌었어도 예전 주소패를 그대로 두는 집이 있습니다. 1954∼55년 무렵이 지었다는 기와집에 처음 붙인 나무문패를 아직까지 건사한 집이 율목동에 있기도 합니다. 이 기와집 문패는 2010년 봄에 새로 ‘니스 세례’를 받아 비바람에 쓸린 오랜 자국이 그만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몇 해 앞서부터 정부에서는 ‘새 주소 사업’을 한다면서 새로운 주소 이름이 적힌 큼직한 주소패를 집집마다 붙였습니다. 그예 아무 자리에나 잘 보이도록 붙였는데 생김새나 빛깔은 영 꽝이었습니다. 집하고 하나도 안 어울리는 크기와 빛깔로 만든 주소패였습니다. 그리고 올 2010년에 ‘이제부터는 새 주소만 써야 한다’고 하면서 새로 만든 ‘새 주소패’로 갈아치웁니다. 이 또한 골목집하고는 하나도 어울리는 않는 크기와 모양과 빛깔입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분들로서는 ‘정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야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익히 아는 주소를 굳이 새 주소로 바꾸어야 하는 까닭을 사람들이 살갗으로 받아들이도록 차근차근 일을 꾸리지 않고 너무 섣불리 바꾸려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구나 주소 하나 새로 바꾼다며 쏟아부은 돈이란 얼마나 클까 궁금합니다. 주소를 새로 바꾸는 데에 들일 돈으로 지역 문화와 복지와 교육을 살찌우도록 마음을 쏟았다면, 인천을 비롯해 전국 곳곳 지자체 삶과 삶터와 삶결은 얼마나 아름다이 거듭났을까요.

골목집 문패 보기 1

11. 인천 남구 숭의2동. 2010.9.3.16:57 + F13, 1/100초
12. 인천 중구 율목동. 2010.9.18.11:38 + F6.3, 1/60초


 주소패는 인천시 남구 숭의2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인천시는 1981년에 인천직할시로 바뀌었습니다. 인천광역시는 1995년부터입니다. 골목집 문패를 들여다보면 1981년 인천직할시이기 앞서 ‘경기도 인천시’였을 때 붙인 문패를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981년이 되기 앞서 붙인 문패요, 적어도 1970년대에 붙은 문패라면 이 집 발자취란 서른 해는 훌쩍 넘어 마흔 해를 웃돈다는 소리입니다. 숭의2동 문패 옆에는 ‘정화조용량’ 검사를 마치고 붙인 쇠딱지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율목동 나무문패 옆 모눈 쇠창살은 지난날 방범창살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골목집 문패 보기 2

13. 인천 남구 도화2동. 2010.9.19.08:56 + F5.6, 1/40초
14. 인천 남구 주안2동. 2010.10.8.08:53 + F5.6, 1/40초


 주소패는 아주 작게 붙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주소만 알리면 되니까요. 이 주소패를 알아볼 사람은 이 집에 깃든 사람과 이 집 임자와 우체국 일꾼하고 택배회사 일꾼입니다. 주안2동 문패 옆으로는 인천 수도국에서 붙인 쇠딱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쇠딱지는 인천 중구와 동구, 그리고 남구 도화동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안동에는 몇 군데 안 남아 있는데, 남구 다른 동에서는 이 수도국 쇠딱지를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골목집 문패 보기 3

15. 인천 서구 가좌1동. 2010.9.19.12:54 + F5, 1/40초
16. 인천 중구 신흥동1가. 2010.9.18.12:14 + F7.1, 1/60초

 1988년까지 인천에는 ‘서구’가 없었습니다. 계양구라든지 연수구가 인천에 생긴 지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골목마실을 하다 보면 ‘부평구’ 아닌 ‘북구’ 주소패를 달고 있는 십정동 집을 곧잘 만납니다. 가좌동에서도 드문드문 ‘서구’ 아닌 ‘북구’ 주소로 되어 있는 오래된 문패를 만납니다. 신흥동1가 골목집 문패에는 연필로 ‘남자 어르신’ 이름 말고 여자 어르신 이름과 이 집 아이들(아마 이제는 아줌마 나이쯤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름을 조그맣게 적어 넣습니다. 식구 이름을 모두 적바림한 문패가 있으나, 이렇게 남자 어르신 이름만 새긴 문패가 훨씬 많아, 다른 식구 이름은 나중에 펜이나 연필로 보태어 적습니다.

골목집 문패 보기 4

17. 인천 남구 숭의4동. 2010.9.8.08:58 + F5.6, 1/40초
18. 인천 남구 숭의4동. 2010.9.8.08:59 + F5, 1/50초


 주소패와 이름패를 따로 붙인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을 따로 붙인다면 이름패에 이름 석 자를 훨씬 크게 새길 수 있어요. 그리고, 처음 문패를 붙이면서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잘 살아야지’ 하던 마음이나 살림이 바뀔 때에 문패를 파낼 수 있습니다. 숭의4동 골목동네 한켠에 서로 맞닿은 골목집 두 곳은 주소패만 덩그러니 남고 이름패는 파내었습니다. 한쪽 집 이름패는 곱게 파내었는데 옆집 이름패는 주소패가 다칠 만큼 거칠게 파내었습니다.

골목집 문패 보기 5

19. 인천 중구 전동. 2010.8.31.14:21 + F6.3, 1/60초
20. 인천 중구 전동. 2010.10.7.17:26 + F4.5, 1/40초


 골목동네 사람들 가운데 꽃과 나무와 푸성귀를 알뜰히 돌보는 분이 꽤 있습니다. 이분들은 웬만한 풀을 함부로 뽑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웬만한 풀이란 아스팔트나 시멘트 틈바구니를 뚫고 스스로 돋아난 풀을 가리킵니다. 아마, 꽃사랑 풀사랑 나무사랑을 않는 이라면 풀포기가 아이들 키보다 높이 자라고 어른 키 비슷하게 자라도록 놓아 두지 않겠지요. 무슨 잡풀이겠거니 여길 테니까요. 전동 골목집 임자는 붉은벽돌 담벼락 앞에 꽃잔치를 가득 벌여 놓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당신 집 앞 풀포기를 고이 건사했습니다.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돋아난 이 풀은 구월 끝무렵에 비로소 꽃을 맺는데, 맨드라미더군요. 모르긴 모르지만, 전동 골목집 분들은 이 풀포기가 어렸을 적부터 “이야, 맨드라미로구나. 어쩜 이 틈에서 이렇게 뿌리를 내렸을까?” 하면서 귀여워 하여 꽃까지 보도록 해 주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맨드라미 꽃 뒤로 ‘간첩신고’를 하라는 ‘주민신고쎈타’ 양철판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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