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극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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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극을 말하다
  • 정민나
  • 승인 2018.09.07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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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결과와 의도의 불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필자의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 마을에서 자란 필자는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커다란 자전거로 혼자서 자전거 타기를 배웠다. 발이 닿지 않아 한 발로 힘껏 밟아, 페달이 올라오면 다른 한 발로 또 힘껏 굴려 바퀴가 나아가도록 했다. 무릎이 깨지고 다리에 멍이 들면서 배운 자전거를 타고 바람이 일도록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당시는 탈 것이 많지 않아서 먼 거리를 다녀올 때 간혹 어느 고마운 할아버지가 우마차라도 세워주면 사람들은 감사하게 올라타 아픈 다리를 쉬기도 하였다. 필자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 다른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을 좀 태워 달라고 했다. 우쭐한 마음으로 선뜻 대답을 하고 그녀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비교적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기기 시작했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갑자기 자전거가 가벼워졌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자전거를 세우고 올려다 본 필자의 눈에 산비탈 중간 쯤 엎어진 아주머니가 보였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처참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우습지만 난처한 상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희비극’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 사회적인 문제나 불안을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시인이 있다. 노동시를 쓰는 ‘최종천’이 바로 그이다. 그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외 다수의 시집을 냈는데 2018년도 6월에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는 시집을 상재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대체로 노동이나 노동자의 가치에 대한 부정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정작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세계에 대한 희망이란 무엇인가’라는 ‘진정한 긍정’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얇은 철판을 때우다가

   빵꾸가 나면 메우려고

   계속 때우다 보면

   구멍은 더 커지고

   용접물이 쌓이는 것을

   떡치기 한다고 은유한다

   최 형 댁에 경사 났소?

   찹쌀떡이요 멥쌀떡이요?

   열 말은 되겠네 하는

   핀잔을 들으면

   시장기가 느껴진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시장기나 빵꾸나

   때우기란 마찬가지다

 

                          - 최종천, 「떡치기」 전문,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 2018 중에서

 

 

   얇은 철판을 때우다 보면 빵꾸가 나고 빵꾸를 메우려고 계속 때우다 보면 구멍이 더 커진다. 이 때 쌓이는 용접물을 지은이는 ‘떡치기’라고 한다. 일이 생각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유머로서 그 불편한 속을 달래는 것이다. “최형 댁에 경사 났소? 찹쌀떡이요 멥쌀 떡이요?”하는 우스꽝스런 농담은 슬픈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의도와 결과가 불일치하는 세계를 ‘부조리’라고 말한다면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불합리한 삶을 시에서 눙치듯이 표현한다. 가령 「마스크에 보안경에 귀마개에」란 시에서 그는 ‘도둑’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자신이 일을 할 때 쓰는 마스크와 보안경을 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지나치게 오른다는 뉴스”에 대해 시인은 “무엇이 노동을 익명으로 하여 누명을 씌워두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이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갖고 있는 그의 억울한 소회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와 임금격차도 있고 생활수준도 다르다.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일반화시키는 평판에 대해 그는 노여웠던 것일까. 그렇기에 개도 누명을 쓰지 않는데 하나의 누명이요 개평거리이요 안줏거리가 노동 계급이라고 화를 내는 것일까. 살펴보면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는 시집 제목부터가 역설이고 아이러니이다. 기계보다 못한 인간의 처지나 전도된 이 세계의 가치를 시인은 용접 일을 하는 노동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동물이나 무생물인 기계보다 못한 위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본주의의 아웃사이더로서 지켜보는 것이다.

 

 

   맞선을 볼 때 여자들은 먼저 손을 본다고 한다.

   보고만 마는 손을 이성민은 직접 잡아보았단다.

   그것도 여자가 먼저 잡아두더라나.

   이성민은 그날을 위해 손에다가

   유한양행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비닐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했다. 일반상식이라는 책도 읽었다!

   그러나 그는 낙방하고 말았다.

   손이 워낙에 고와서, 소개한 아주머니께

   직장도 없이 노는 사람 아니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노동하는 손을 잡아줄 여자 흔치 않다.

   부러워서 우리는 출세한 이성민의 손을 만져 보았다.

   여자의 손처럼 스르르 빠져 나갔다.

   그리고 나서 2년인가 뒤에

   또 놈은 맞선을 보았다.

   이번엔 거친 손 때문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노동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즐길 시간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지난번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직장이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어서,

   전과는 반대로 손이 거칠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할 때마저도 놈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놈이 그 재수 없는 손을 들고 나에게 오고 있다.

   나는 여자가 아니니, 저 놈의 손을 잡아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모르겠다

 

                   - 최종천, 「재수없는 손」 전문,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 2018 중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 이성민은 노동자다. 노동자이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 노동자 계급인 자신을 싫어할까봐 “유한양행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비닐 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끼고” 고운 손을 유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대 여성은 그런 손을 보고 “직장도 없이 노는 사람 아니냐”면서 거절한다. 다음 여성과의 만남에서 이성민은 있는 그대로 노동자의 손을 하고 나간다. 이번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즐길 시간이 없다”고 거절당한다.
 

   시인은 이성민의 손을 두고 “재수없는 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치에 대해 긍정할 수 없는 자, 쪽팔린다고 자꾸만 빠져나가는 자, 이 세계에 태어나 생성의 원인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자. 이 세계를 구성하는 헛된 관념에 휘둘리는 자,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에서 미끄러지는 자, 좌절하는 자…… 라고 미워한다. 이성민은 혹시 시인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에서 시인 역시 「이번 한 번만은」 이란 시를 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꽃을 못 본척하기가 부끄럽다.”고 적고 있다. 노동자인 이성민의 손을 ‘재수없는 손’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무기력한 자신의 정서 상태를 에둘러 말하지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이성민이 속으로는 더 인간답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힘든 노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에 대한 위무일 수 있다. 사랑을 포기한 삶, 기계의 부품처럼 반복되는 일상으로 복귀하는 삶이야말로 노예의 삶이 아닐까.


   편파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시스템이 한없이 노여운 화자는 태양의 온도와 버금가는 불을 다루는 일을 하지만 그 뜨거움이나 화를 시 쓰는 일로 다스린다. 그가 용접 일을 하는 것은 기실 그의 시장기를 때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니 그것이 ‘때우기’의 첫 번째 일이라면 거친 현장에서 일상의 소재를 들어올려 시를 쓰는 일은 빵꾸난 세상을 ‘때우는’ 그의 또 다른 일이 된다. “정신이 나타나려면 몸을 통해야” 하고 “정신은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 비존재”가 된다고 시인은 「노동의 십자가」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빛을 다루는 용접공의 ‘자기 언급’이요, “형상을 품은 에너지, 곧 시인의 ‘자기 언급”인 셈이다. 비록 “기계의 심부름을 하는” 노동자의 삶일지라도 그는 시를 쓰면서 “노동을 놀이’로 만든다. “잘못 자른 것은 다시 붙일 수 있고/붙인 것은 다시 자를 수 있는” 용접일이나 “손가락으로 마디마디를 눌러 짚으면/ 저마다 다른 음정이 날아오”르는 바이올린 연주나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지만 자유와 해방의 느낌을 선사하는 ‘시쓰기’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결국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시장기나 빵꾸는 때우기가 마찬가지”라고. “영어로 봄을 스프링”이라 하는 것처럼 “용수철도 스프링”이라고 한다. 그가 ‘ㄹ’을 쓸 때 스프링처럼 구부려 놓고 그만둔다고 하였는데 그처럼 그의 삶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 “모래 위에서 모래성을 천 번 쌓”는 노동자의 삶일지라도 유머가 있는 그의 시는 기계적인 삶을 벗어나 멜로디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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