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이 주는 특별한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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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이 주는 특별한 정서
  • 최일화
  • 승인 2018.09.14 08: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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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看月庵(간월암)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윤제림 시인은 제천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성장했다. 몇 살부터 인천에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다녔다면 그의 시엔 인천의 DNA가 섞였을 터다. 나는 그의 이런 이력을 전혀 모른 채 그의 시의 위트와 재치에 끌려 오래 전부터 그의 시를 읽어왔다. 윤제림 시인의 시는 대체로 짧고 간단하다. 촌철살인의 감동을 안겨 준다. 그런 장점이 그를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 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친근한 제제에 반짝이는 시상이 작용해 신선한 시 한편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흔히 우리는 길을 가다가 친숙한 가게 이름을 만나곤 한다. '철수네 방앗간' '영숙상회' '만수네 횟집' 등 아들딸의 이름을 딴 상호를 보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보고 넘어갈 이런 상호에 시인의 눈이 멎는다. 시인은 그것이 가정이 부유하게 되고 자식들이 크게 이름을 떨쳐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간판을 단 것이라는 것을 간파해 낸다. 얼마나 반짝이는 아이디어인가. 시는 이렇게 우리의 생활 곳곳에 널려 있다. 조금만 각도를 달리해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신선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빈집
 
울타리에 호박꽃 피었고
사립문 거적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안 갔다는 표시였다.
옛날엔.
 
그런 날이면, 들판을 지나온 바람이
대청마루에 누웠다 가곤 했다.
 
뒤꼍엔 말나리 피었고
방문 창문 저렇게 활짝 열려 있으면
주인이 멀리 갔다는 표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표시다.
지금은.
 
오늘 아침엔, 억수장마를 따라온
황톳물이 사흘을 묵고 떠났다.

 
빈집은 어떤 특별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빈집을 제목으로 그렇게 많은 시가 발표될 리 없다. 인천의 작고시인 이효윤(1949~1997)은 ‘빈집‘이란 시집을 남겨 놓고 떠났다. 김관식 시인의 <폐가에 붙여>란 시도 빈집을 노래한 시다. 이렇듯 심심치 않게 ’빈집‘ 혹은 ’폐가‘란 제목의 시를 만난다. 윤제림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를 읽다가 또 ’빈집‘을 만났다. 이 ’빈집‘은 어떤 빈집일까. 옛날과 지금의 빈집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다. 호박꽃이 피고 사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들의 시골 고향집을 연상하게 된다.

옛날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이 없어도 그냥 잠시 이웃집에 갔거나 논밭에 나갔으려니 여겨졌으나 지금은 저렇게 문이 열려 있으면 곧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고향에 주인 잃은 폐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는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들의 고향엔 왜 날마다 빈집이 늘어나는가. 이농현성이 왜 가속화 되었는가. 물론 경제적인 이유다. 먹고 살기 위해 모두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빈집엔 들녘바람이 들렀다 가고 지금의 빈집엔 황톳물이 사흘을 묵고 떠난다고 하여 옛날과 달리 이농현상으로 황폐화된 고향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친구의 집을 지나며
 
내 친구의 어머니는 더 이상 내 친구를 낳지 않는다
내 친구의 학교는 더 이상 내 친구를 가르치지 않는다
내 친구의 바다는 더 이상 내 친구와 놀지 않는다
 
친구네 마당엔 녹슨 경운기만 남고
친구네 학교엔 이승복 어린이만 남았다
학교 솔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수협창고는 파리나 키우고
자꾸 깎여나가는 해수욕장 모래밭은
파도만 키운다
 
친구는 집에도 없고 학교에도 없고
해 떨어지는 바다에도 없다.
친구는 이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서
오지 않는다.
 
친구가 없는,
심심한 마을을 지난다.


이 시도 앞의 시 <빈집>과 같은 이미지의 시다. 친구가 살던 고향집엔 친구도 친구의 어머니도 안 계시고 친구가 다니던 학교에선 더 이상 친구를 가르치지 않고 친구와 함께 놀던 바다도 더 이상 친구와 놀지 않는다. 친구의 옛집은 녹슨 경운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폐가가 되었고, 친구가 다니던 학교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가 무장공비에게 살해된 이승복 어린이 동상만 남아 있다는 구절에서 폐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더 이상 친구는 없고 쓸쓸한 기억만 남아 있는 고향 옆을 우리는 윤시인과 함께 지나고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수없이 했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옆을 지나며 옛 시절을 떠올리고 내가 근무했던 옛 직장 옆을 지나며 젊은 날을 회상하여 보기도 한다. 친구가 살던 마을 옆을 지나며 옛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정서 속에서, 추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런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시인 최일화



*윤제림:(1960~ ) 본명 윤준호. 축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천대건고, 동국대학교 졸업. 1987년 문예중앙에 시<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로 데뷔. 서울예술대학 광고창작과 교수. 1983년~1993년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시집에 『사랑을 놓치다』『삼천리호 자전거』『황천반점』『그는 걸어서 온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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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화 2018-09-14 18:46:05
세번 째 시 <친구의 집을 지나며>의 2연 셋째줄의 '사리'는 사이'의 오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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