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어(豊漁)의 바람'은 어디로 흩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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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어(豊漁)의 바람'은 어디로 흩어지고…
  • 김주희
  • 승인 2010.11.0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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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인천新택리지] 동구 화수2동(16)

취재: 김주희 기자


신명난 굿판이 벌어졌다.
모두 두 손을 모아 배 한가득 조기를 싣게 해달라고 빌었다.
언젠가는 모두가 떠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또 빌었다.


북성포구와 만석부두가 있는 만석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화수부두(화수동) 일대 역시 전쟁 통에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이 정착해 산 곳이다.

본디 이 지역은 1879년 화도진이 설치될 때까지만 해도 자연적으로 형성된, 초가 몇 채밖에 없었던 작은 포구였다. 나무나 실어 나르는 일이 고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것이 '개항'의 힘에 밀린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사방에서 일거리를 찾아 사람들이 또 몰려들었다.


1907년 세워진 화도교회에서 바라본 화수2동 전경.

중구가 특히 현 자유공원 일대 조계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큰 마을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라면, 동구는 조선인들의 마을이었다. 그들이 주로 산 지역이 화수동과 만석동, 송림동 등지였다.

어찌됐든 현 화수동 쪽으로 온 사람들은 '곶'(串)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고, 마을 이름을 '곶마을'(고잔리라고 했는데, 이는 곶의 안쪽 마을을 뜻한다)이라 했다. 사람들이 쉽게 부르기 위해서 '꽃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자로는 화촌(花村)이라고 썼다.

화수동은 이 화촌과 수유리(水踰里)의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화수2동 주민센터

수유리는 옛날 바닷물이 넘어 들어왔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순우리말로는 무네미, 또는 물넘이말이라고 했다.

두 마을 외에도 화수동은 신촌리(新村里)란 옛 마을과도 인연이 닿아 있는데, 신촌은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로 새말, 새마을, 신기 등으로 불렀다 한다. 화도진 설치 이후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생겨 부른 듯하다.

1914년 신촌리, 화도동, 수유리 등 세 마을의 이름을 따 신화수리라 해 인천부에 편입했다. 그러던 것이 1936년 일본식으로 화수정(花水町)이라 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일본식 동명을 바꾸는 작업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쳐 화수동이 됐다.

인구가 늘고 줄어듦에 따라 화수동은 분동과 통폐합을 거쳐, 화수1·2동으로 나뉘었다. 행정동으로서 화수1동은 화평동과 합쳐 화수1·화평동이 됐다.

화수동에는 개항기 일거리를 찾아온 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화수동 뿐 아니라 인근 만석동이나 화평동, 송림동 등지에도 일거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멈춘듯 화수부두 앞 마을의 정취는 1970년대 티를 벗지 못했다.

이들은 인천항 축항기 공사판에서 막노동으로, 공사가 끝난 뒤에는 부두에서 등짐을 져서 먹고 살았다. 일제가 바다를 매립해 공장을 들인 뒤에는 공장 노동자로도 일했다.

특히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이 일대를 군수기지화하면서 더 많은 공장이 들어서게 됐고 노동자 수도 따라 크게 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고 몇 해 되지 않아 터진 6·25 한국전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등 북한지역에서 온 난민들이 동구지역 곳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화수동에도 실향민들이 몰려왔다.

화수동에 있는 화수부두는 태풍이 와도 피해를 좀체 받지 않는 지리적 이점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인천의 대표적 포구이자 어시장으로 기능을 했다.

실향민들이 정착해 살면서 화수부두가 더 커져, 파시 때만 되면 100여척이 모여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던 국내 3대 어항으로 자리매김했다.

힘겨운 삶을 서로 의지하듯, 집들이 서로 의지하며 골목을 이어갔다.

주로 조기가 많았지만 새우젓 항으로도 유명했다.

300여 평 되는 공판장은 늘 활기찼다. 어부들은 만선의 기쁨을 누렸고, 경매인들은 싱싱한 어물을 사고파느라 새벽부터 분주했다. 덩달아 30여 곳에 이르는 주변 선술집도 호황이었다.

실향의 아픔은 만선의 기쁨으로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신명난 굿판이 벌어졌다.

황해도 출신 만신 김금화(국가 중요문형문화재 82-나호) 선생이 화수부두에서 옛날 법 그대로 대동굿판을 벌였다.

황해도 사람들은 배를 부리는 바닷가라면 어디든 고향 만신을 부르는 게 상례다.

근근이 화수부두에서 굿판이 벌어졌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명맥이 끊어질 뻔했다.

하루 종일 배위에서 사람들은 바다에서 무사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빌었다. 1983년 8월이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나. 굿판을 벌이며 만선을 바란 실향민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1974년 들어선 연안부두가 활성화하자 화수부두의 활기가 사라졌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두 앞 바다가 매립돼 철강공장이 되고 고철야적장이 들어서 수로가 좁아지고 물이 더러워졌다. 연평도 어장의 조기가 줄어드는 등 어획량마저 급감해 타격이 컸다.

공판장이 문을 닫고 연안부두로 이사했다. 시끌벅적 생기가 넘치던 공판장 주변 선술집도 하나둘 사라졌다.

국내 3대 어항 화수부두는 그렇게 사람이 찾지 않는 부두가 됐다. 두산인프라코어, 동국제강, 현대제철 등 큰 공장에 길과 바다가 막혀 포위된 채 그렇게 잊혀졌다.


화수부두는 바닷가 특유의 짠내와 비린내를 맡기 힘들었다.
대신 공장의 소음과 매연이 부두에 가득했다.

각종 개발 계획이 잇따랐다. 공장지대도 어촌도 아닌 어정쩡해진 화수부두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지방정부의 계획이 십수년간, 잊을 만할 때쯤 툭툭 던져졌다.

1990년 어항으로 가장 오래된 화수부두를 '어항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시장과 직거래장도 설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쇄빙장과 제빙공장도 만들겠다고 했다.

횟집과 고급식당가, 위락시설, 풍물시장, 공연장, 역사공원도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처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시비와 개발이익금 등 500억 원을 들여 하겠다던 사업이었다.


얼음공장 뒷편 접안시설에서 낚시꾼들이 망둥어와 숭어를 잡고 있다.

1997년에는 동구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물량장 보강공사' 등이 진행되며 화수부두 활성화를 꾀했다. 예산이 부족했고, 북항개발계획과 맞물리면서 계획은 계획에 그쳤다.

2007년 화수부두를 포함해 만석부두와 북성포구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며 당시 인천해양수산청이 74억 원을 들여 접안시설을 설치하고 준설 공사를 하는 등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다.

2년에 걸친 공사가 끝이 났지만 사진 동아리 회원들이나 그림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가끔 찾을 뿐, 화수부두를 통하는 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몇해전까지 지역의 사진작가들이 화수부두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그때 설치된 솟대가 외롭게 서있다.

배는 없어도 마을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서 여러 문화·시민단체의 노력도 있었다. 지역 내 사진작가들이 정기적으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화수부두에서 벌어졌던 굿판의 명맥을 이어 인근 북성포구에서 풍어제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화수부두에 정박한 어선은 40척이 조금 안 된다고 했다. 그나마 정상적으로 조업을 하는 숫자는 절반에 그친다. 어선의 출입을 통제하는 해경의 통제소도 민간이 위탁해 운영할 정도니 드나드는 배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 있다.

늙은 어부들이 간간이 부두 한편에서 낡은 어수를 손질할 뿐이었다.

늙은 어부는 바람이 세 조업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오랜 세월을 만진 낡은 그물을 다듬는 그이 뒷 모습이 화수부두를 닮았다.

점심식사 시간을 알리는 공장의 노랫가락이 부두에 울려퍼졌다. 인근 공장의 연구소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안전모를 쓴 채 어부들로 득실대던 골목길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화수부두 앞 골목은 인근 공장의 연구소 신축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의 차로 주차장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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