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건디시, 생명의 땅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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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디시, 생명의 땅을 거닐다
  • 정민나
  • 승인 2018.11.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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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바질리카 성당 안에는 아주머니가 망치로 무언가를 고치고 있다. 우리는 지폐 한 장을 성당 촛대 옆 모금함에 넣는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얼른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라크전쟁 때 폭탄이 떨어져 몸을 다쳤다는 그녀는 손짓과 표정을 섞어 중동언어로 무엇인가 말한다.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가난한 그녀가 조금의 돈을 바란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창세기 11장 1절 말씀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라인 강물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햇빛과 오리와 어린아이가 하나요 중국인과 인도인과 서양인이 나란히, 흰 이를 드러내는 미소가 하나였더라…….

성경 말씀에 발동하여 모처럼 비행기를 탄다. 흐르는 구름에 가만히 몸을 얹어 놓기만 해도 두둥실 꽃피는 마을까지 떠내려간다.
 
새로 돋는 풀잎처럼 루트한자 비행기, 새들의 날개처럼 그림자가 흰 구름에 비친다 둥글게 여름 창가를 일으키면서 풍경을 완성하는 휴일
 
S자로 구부러지는 도로 끝 오전 시장이 섰던 자리 말끔히 치워지고 스프링클러의 스위치가 돌아간다 묘하게 아름다운 날씨 길이 갈라져 있어도
 
목적지에 당도하면 아직 다 구르지 못한 심장 노랑나비 한 쌍 날아 오른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문 앞에서 그녀가 쥔 티켓은 촉촉하다
                                                                        - 정민나, 「흰 구름은 이동 중」 전문

 
사람을 죽이는 전쟁 이야기야 붉은 수련 잎처럼 몇 천 번을 이으며 이 지상에 다시 피어나는데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연꽃이 핀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집이 나온다.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임을 밝혀낸 학자의 집 안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약품이나 솜, 수많은 실험을 했던 기구들이 오래 된 시간의 형상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곳엔 『포도주의 발효』를 출간하여 미생물학의 아버지가 된 그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흔적이 남아 있다.
 
파스퇴르의 집 앞 호수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땅 밑에 감춰진 또 하나의 작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못엔 신비로운 정기가 서려있어 왠지 마음이 숙연해 진다. 예나 지금이나 빨래도 할 수 없고 발을 담가서도 안 되는 물이 사람들의 생명수로 관리되고 있다. 전쟁이 있던 옛날,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돌아오면 안에서 솟아나는 샘으로 깨끗이 씻어 주었고 타는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들은 지혜롭게도 밖이 혼탁할 때 안에다 맑은 물을 준비한 것이다. 세상이 어두울 때마다 밝은 연꽃을 피워 올리는 사람들의 마을로 엄마 오리가 여러 마리, 아기 오리를 앞세우고 돌아오고 있다. 생과 사를 가르던 계단에 오래된 이끼가 피어있고 지하에서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햇살을 만나러 여행객은 자꾸만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다. 비밀의 계단은 삐걱거리지만 오래된 성수를 고이 간직하는 사람들. 나는 그 곳에서 마음에 깊은 물을 길어올리고 건조한 몸을 축인다. 그러는 동안 ‘우리도 저런 배려가 있다면’ 하는 바람이 새싹처럼 고개를 내민다.
 
물가를 나오면 버건디시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난다. 이 바람은 마을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숙성시키기 딱 좋은 온도를 가졌다 이 고장 기후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와인숙성 장소가 개인적으로 지하에 있는데 몇 곳은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중세의 보도블럭을 밟으며 나는 발효되는 시간을 흠향한다.
 
이 버건디시에는 1443년에 세워진 병원이 있는데 그 때부터 이곳에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저것이 다 침상인가요?” 600여년의 시간을 헤아리며 아득히 서 있는데 환상 속 중세의 성곽에서는 백마 한 마리 다가와 아픈 사람들의 방문 앞에 석탄을 쏟아 붓는다. 마차 위 석탄가루가 주르르 마음의 아궁이로 흘러드는 시간. 얼마나 오랫동안 이 따스한 연통은 계속 이어졌을까.
루이 14세가 방문했을 때 남녀가 같은 룸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라 남녀 따로 사용하도록 마음을 써 주었다는 이 병원의 유지비는 버건디시 고장의 와인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그 때 사용한 환자들의 식기와 벽난로가 오래된 문양과 함께 남아있다. 나는 두레박을 드리우고 그 깊이까지 내려가 새로운 시간을 길어 올린다.
 
프랑스 청년 니콜라스는 와인동굴에서 시식할 때 쓰라고 준 접시 모양 컵으로 새집을 만들어 빵부스러기를 놓아준다.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오는 창가에 토마토와 호박 고추가 자라고 있다. 실내에 탐스런 호박이 달리는 이 신선한 도시. 연일 뉴스가 되던 폭염의 시간들이 이제 둥글게 돌아나간다. 그러면 다시 바젤 공항에서 뮌헨을 향하는 루프트한자 비행기는 자유롭게 펼쳐진다. 반듯한 농경지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지상에는 현재라는 시간이 푸르게 자라고 그 밑으로 중세의 시간이 또 검푸르게 흐르고 있어 그 사이사이 물고기를 낚아 올리듯 실한 마음들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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