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플레이오프(play-off)와 함께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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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플레이오프(play-off)와 함께 하다
  • 김희중
  • 승인 2018.12.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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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김희중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회원




저녁도 꽤나 늦은 시간에 기다리던 김치냉장고가 배달 되어왔다. 헌걸 들어내고 새것을 들여놓은 아내는 어린애처럼 좋아 한다. 대충 정리하고 나니 밤 열시가 다 되었다. 거의 두 시간동안 배추와 무를 손질한 그녀가 ‘아이구 허리야’ 하고 눕는 것은 당연했다. 사령관이 누워버리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어서 엉거주춤 커피를 끓여 아내에게 바쳐 올리고 돌아서서 나도 한잔 마셨다. 그녀의 눈 꼬리가 부드러워 졌다.

"오늘은 이만 했으면 좋겠는데···"
불쑥 말을 하고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아내의 눈 꼬리가 올라간다.
"나만 먹고 살자고 이러는 것 아닙니다."
이럴 때 말대꾸 하면 절대 안 된다. "지난 오십년…" 하고 그녀의 잔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당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퇴직 후 어느 날 슬그머니 우리의 갑을관계는 이렇게 뒤바뀌고 말았다.

"을이면 어때?" 나는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나저나, 벌려놓은 건 어떻게 하나? 이러다 무리해서 내일 못 일어나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이 앞선다. 거실 바닥 가득 김장거리를 준비한 아내의 성격에 여기서 중단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 대충 정리를 하고 물먹은 솜덩이 같은 몸을 아내 옆에 뉘었다. 재작년부터 밀려나서 각방을 쓰고 있지만 오늘만은 물러설 수가 없다. 하지만 ‘밤 새 안녕’이라고 끙끙 앓고 있는 아내가 정말 눕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고슴도치처럼 움츠린다.
 
강한 햇살이 눈부셔서 눈을 뜨긴 했는데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실눈으로 시계를 보니 열시를 넘어가고 있다. 이럴 때 아내는 오죽 하겠는가 생각하며 돌아본다. 어느새 일어난 그녀가 벌써 일을 벌려놓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
삼십 포기를 넷으로 나누었으니 백 이십 쪽이다. 어제 밤에 절여서 씻어 놓았는데 아직 물이 덜 빠진 것 같다. 그래도 파김치, 갓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동치미까지 재료는 준비가 되었다. 마늘, 생강 다지는 걸 지시하고 아내는 김치 속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러구러 오후 네 시 쯤 김장은 마무리가 되었다. 오늘 저녁 문학 경기장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가을야구 플레이오프, 넥센과 SK의 마지막 5차전 경기가 있다. 사용했던 큰 그릇들을 깨끗이 씻어서 다용도실에 원위치 하고, 청소를 끝내면 두 시간, 별일 없으면 여유 있게 시작부터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계산대로 되진 않았다. 독립해서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딸 몫으로 한 보따리, 상처하고 혼자 사는 처남 녀석이 아내의 김치를 좋아해서 한보따리… 여기저기 나눠줄 몫을 새지 않게 비닐봉지에 조심스럽게 담는다. 플라스틱 통에 넣고 잘 묶어서 다시 종이상자에 넣어 단단히 포장한다. 택배준비를 끝내고, 아슬아슬하게 게임 시작 직전에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시작부터 팽팽한 투수전이 지루하게 계속되더니 6회에야 점수를 내기 시작했다. 2승 뒤에 2연패 했으니 넥센은 물이 올라있다. 하지만 나는 허리가 아프고, 팔도, 무릎도 온 몸이 끊어질 것 같다. 택배아저씨가 김치 상자들을 가지고 갈 때쯤에야 아내의 끙끙 앓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먼저 안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잠이 든 것 같다.

9회 초! “어라, 어라” 하는 데 두 점이 나고··· 기어코 박병호가 한방 꽝! 9대9! 8회 말까지 9대 4로 앞서서 여유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5점을 따라잡혔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꿈쩍 않고 바로 앉아서 제대로 TV에 시선을 꽂는다. 9회 말인데 어떻게 눈을 뗄 수가 있겠는가? 넥센의 상승세에 기가 꺾인 SK는 9회 말을 힘없이 넘기고 10회 초, 다시 한 점을 내주어 10대9. 10회 말에 점수 못 내면 끝이다. 손에 땀을 지고 나는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홈런! 또 홈런!
 
홈런 두 방으로 넥센을 꺾고 내가 응원하는 SK가 이겼다. 김치투성이가 된 체 쑤시고 아프던 내 온몸이 솜털같이 가벼워졌다. 온 동네가 환호성으로 떠들썩하더니 옆집 영호 할아버지도 보고 있었는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다며 소주병을 들고 들어선다. 우리는 티비 앞에 소반을 가져다 놓고 판을 벌렸다. 김장 겉절이를 안주로 목 줄기를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주의 맛이 일품이다.
 
떠들썩한 소리에 아내가 안방에서 나왔다. 분위기에 덩달아 몸이 풀렸는지 밝은 얼굴이다. 그녀가 가벼운 걸음으로 어느새 돼지고기를 삶아 내온다. 김장김치에 싸먹으라고 내 놓다 말고 내 얼굴을 보고 피식 웃는다. 김장했으니 고춧가루 묻은 게 당연하다며 나는 알록달록한 몸으로 한 잔을 들이켰다. 소주는 어느새 영호 할머니가 가져온 맥주로 바뀌었다. 무슨 일인지 한동안 아내와 냉담(冷淡) 했던 영호 할머니까지 같은 편이 되어 두 집 노인네들의 파티는 익어갔다. 플레이오프(play-off)와 함께 실로 오랜만에 우리는 통쾌, 상쾌한 김장을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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