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며 참다이 살고 있기에 책을 안 읽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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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며 참다이 살고 있기에 책을 안 읽습니까?
  • 최종규
  • 승인 2010.11.1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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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소노 아야코,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님 책을 틈틈이 챙겨 읽는다. 새롭게 옮겨지는 책도 있고, 예전에 한 번 나온 뒤 다시 나오지 못하는 책이 있다. 나는 스물여섯 나이에 《계로록》으로 이분 책을 처음 만났지만, 헌책방에서 《누구를 위하여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두 번 만나 두 번 사서 두 번 읽은 뒤로 곰곰이 헤아려 보니, 훨씬 예전부터 ‘曾野綾子’라는 이름이 새겨진 책을 읽었구나 싶다. 아직 철이 잘 들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만, 훨씬 철이 덜 들었을 무렵에는 ‘曾野綾子’하고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맞대어 헤아리지 못했다. ‘三浦綾子’하고 ‘미우라 아야코’ 또한 마찬가지. 두 이름을 한꺼번에 살피지 못하며 책을 읽어 왔다.

 소노 아야코 님이 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은 글자가 꽤 크며 글이 짧다.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면 읽어치울 만한 책이다(더 빨리 읽어치울 수도 있겠지). 아무래도 나이든 분들을 헤아려 이렇게 큰 글자로 책을 엮었지 싶은데, 여느 젊은 사람이 읽을 만한 글자로 책을 엮었다면 쪽수나 부피가 훨씬 줄겠지. 더욱이, 글자를 꽤 크게 하며 내놓을 만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같은 소노 아야코 님 책은 ‘금세 읽어치우고 덮’으면 뭔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삭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무리를 하면 피곤해져 인간성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미움을 사면 미워하라고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여 칭찬을 받는다 한들 또 비난을 받는다 한들 다 부질없는 일이다(22, 26쪽).” 같은 이야기를 꾸밈없이 받아들일 만한 이 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려나. 잘못 알면서 잘못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재미로 사는 사람마저 있다. 뭐, 한국뿐 아니라 일본부터 엉터리 삶인 사람이 많으니까 일본사람 소노 아야코 님은 일본사람 들으라고 이런 말을 하겠지. 미움을 사느니 마느니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면 된다는 소리이다. 내가 아름다이 살아가는지, 또는 착하게 지내는지, 아니면 참다이 삶을 꾸리는지는, ‘나를 잘 모르거나 잘못 보는’ 사람이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 굽어살피니까 애써 마음쓸 대목이 없다.

 “자신의 추한 부분, 불쾌한 부분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또 그것에 비애를 느낄 때라야 그 사람의 정신은 자유로워져 정신 자세도 자연히 건전해진다고 여겨진다(55쪽).”는 이야기를 열 살 어린이나 스무 살 젊은이가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서른이나 마흔 나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맞아들이지 못한다고 느낀다. 어쩌면 쉰이나 예순 나이가 되어도 못마땅하게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하지 않을까. 나한테 한 번 주어진 이 삶을 고맙게 섬기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루하루 재미난 나날이라고 헤아리며 두 손 곱게 모아 비손을 하기란 얼마나 힘들까.

 “나는 잘못된 일 처리나 뇌물 수수, 배임 횡령의 기사 따윈 신문에서도 거의 읽지 않으므로, 별로 그 일을 떠들썩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70쪽).”는 소노 아야코 님인데, 나는 신문을 아예 안 읽는다. 집에 텔레비전을 안 들여놓고 살아온 지 열다섯 해가 넘는다. 도시에서 전철을 탈 때면 책을 읽으며 전철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광고판을 안 보려 한다. 눈을 쉬게 하고프다. 손전화 걸고 받으며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어 책을 펼친다. 요사이는 아이랑 씨름하느라 둘레 사람이 떠들든 말든 아랑곳할 겨를이 없다. 아이하고 버스나 전철을 타면 이런 대목이 퍽 쏠쏠하다. 다른 데에 눈이나 마음을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더라도 숱하며 자잘한 이야기가 귓결에 스친다. 며칠만 지나고 보면 다 잊는 이야기를 놓고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참말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언론이란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아닌데, 온통 더 큼지막하게 써대려 하고, 된통 더 따갑게 부풀리려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란 무엇이기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기에. 깊어 가는 가을날, 또는 한창 무르익으려는 겨울날, 이리하여 차츰 다가오는 봄날, 앞으로 새삼스레 다시 찾아올 여름날을 그때그때 다 달리 껴안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알차며 사랑스레 북돋울 이야기를 신문이며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다루면 장사가 안 되는가. 언론이란 장사가 안 될 이야기를 다루면 안 되는가. 언론이란 삶을 다루는 이야기를 알뜰살뜰 채우면 안 될 노릇인가.

 책을 읽으면서 “좋은 일을 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것은 상행위와도 같다(91쪽).”는 대목에서 자꾸 걸린다. 자꾸자꾸 걸려 넘어진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이 대목을 거듭 곱씹는다. 내가 제아무리 아이하고 신나게 놀아 주었다 생각하더라도, 아이한테 내 사랑이 이어갔다고 여길 수 없다. 난 그저 얼마쯤 아이하고 놀았을 뿐이니까. 내가 쌀을 씻어 불린 다음 밥을 안치고 반찬이며 국이며 마련하여 밥상을 차려 놓는다 해서 아이가 아침과 저녁을 맛나게 받아먹으며 제 아버지한테 고맙다고 느껴야 하지는 않다. 고마움을 느끼라고 차리는 밥상은 아니니까. 사랑은 장사가 아니다. 삶은 장사일 수 없다. 사람을 사귀든 글을 써서 책으로 엮든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든 그예 삶이지, 장사이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이 정말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결코 여유 있는 사람도 아니며, 권력자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을 맛본 사람들일 게다(16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 님이 쓴 다른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떠올린다.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라는 책은 그리 사랑받지 못하고, 잘 읽히지 못한다. 적어도 이 책 하나쯤 찬찬히 헤아려 본다면,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를 한결 깊이 돌아볼 수 있을 테지만, 이렇게까지 책을 읽으며 고개를 숙인다든지 삶을 곱씹는 사람은 드물다. 안타깝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책읽기란 ‘처세’와 ‘자기계발’이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삶읽기로 자리잡는다면 책을 읽는 사람은 늘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게 마음밥을 얻어먹는다고 느낀다. 마음밥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고, 언제나 새삼스레 거듭난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이 더 아프고, 책을 덮고 나서 삶을 부대끼는 동안 내 몸이 더 슬프면서, 내 두 다리와 두 팔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까를 곱씹는다.

 “교육적이려면 좀 특별한 화제를 만들어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가정 내 대화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지는 거다(278쪽).” 같은 이야기란 누구나 뻔히 안다 할 만큼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낀다. 그래, 참 시시한 이야기이다. 소노 아야코 님 이 책은 참말 시시한 이야기를 구지레하게 담았다 말해도 좋다. 삶이란 시시하지 대단하지 않다. 수다란 시시하지 대단할 구석이 없다. 책이란 시시하지 거룩하지 않다. 앎이란 시시하지 거룩할 까닭이 없다.

 시시하면서 수수한 삶이다. 시시하기에 홀가분하게 웃고 떠드는 수다이다. 시시하니까 스스럼없이 쥐어들어 마음껏 펼치는 책이다. 시시한 만큼 머리에 가두지 않고 몸으로 신나게 풀어 놓는 앎, 곧 슬기이다.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라는 책에는 ‘머리를 쓰며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더 힘껏’ 쓰면서 ‘좀 어리석거나 바보스레’ 살아가자는 이야기를 다룬다. 뭐 그리 잘난 삶이라고 용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뭐 그리 똑똑한 삶이라며 어깨를 우쭐거리며 지내야 하는가. 너무 무거운 내 머리를 가볍게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좋은 소리와 궂은 소리 모두 귀담아들으며 살아가면 넉넉하다. 된장찌개나 미역국 한 그릇으로 얼마든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 다 알 만한 이야기를 담은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으레 다 알거나 알 만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또는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다 알거나 알 만하다 말하는 사람은, 이 땅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참다이 살아가는가. 몹시 궁금하다. 이까짓 이야기 훤히 꿰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내 삶과 네 삶을 고이 어루만지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덧말 한 마디 붙인다면, 소노 아야코 님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으로 적어야 했을 텐데.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글,오경순 옮김,리수 펴냄,2005.6.2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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