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터가 가장 좋은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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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터가 가장 좋은 놀이터
  • 최종규
  • 승인 2010.11.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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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앨리스 맥레란·바바라 쿠니, 《록사벅슨》

 그림책 《록사벅슨》을 보았습니다. 부드러운 그림결에 따스함 감도는 이야기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집 아이도 이 그림책을 좋아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에는 온통 언니랑 오빠랑 그득그득 쉴새없이 나오거든요.

 그림책 《록사벅슨》에 나오는 언니랑 오빠는 그림책에서는 언제까지나 어린이입니다. 그림책에서는 어린이인 이분들은 ‘살아 있다’면 아흔을 훌쩍 넘기거나 백 살 즈음 되겠구나 싶습니다. 퍽 까마득한 옛날 옛적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라 할 텐데,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는 동안, 이 그림책 이야기는 그리 머나먼 지난날을 다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어린이요, 어린이로서 다 함께 오순도순 놀이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는 제가 1970∼8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 그리 다르지 않는데다가, 애 엄마가 1980∼9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도 썩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제 어린 날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애 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이런 좀 지나간 사진을 아이가 들여다볼 때, 우리 아이는 그냥 ‘어린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보는 아이들은 그저 사진에 담긴 그 나이 그대로 언니이거나 오빠이거나 동생이거나 동무입니다. 구태여 예전 모습이라 토를 달 까닭이 없고, 예전 모습이라 하지만 굳이 금을 그어 갈라 놓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고, 다시 넘기며, 거듭 넘기는 가운데 조용히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은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 같은 삶을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을 장만하여 스스로 읽거나 아이한테 읽힐 어버이 또한 ‘되찾거나 마주하기 어려운 지난날 발자취와 이야기’라고 여길 만하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다들 이렇게 놀았지.’ 하는 말마디를 겨우 들려줄 만하구나 싶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서는 ‘골목놀이’이든 ‘숲속놀이’이든 누리거나 즐길 수 없어요.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는 자동차하고 건물하고 아스팔트만 있습니다. 마음껏 뛰놀 논밭이 아이들 보금자리 둘레에 없습니다. 신나게 물장구를 칠 도랑이나 개울이나 냇물이 아이들 삶자리 가까이에 없습니다. 살가이 찾아가서 함께 놀 이웃집이 아이들 사는 집하고 맞닿아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모조리 쪼개어졌습니다. 언니랑 오빠가 동생한테 골목놀이나 숲속놀이를 물려주지 못합니다. 진작에 골목놀이와 숲속놀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하는 말을 하는 어른들은 으레 잊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안 놀고 숲속에서 못 놀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부터 골목에서든 숲속에서든 동무를 사귀거나 어울리지 않아요. 어른들이 먼저 골목에서나 숲속에서나 사귀지 않습니다. 물레방앗간이라든지 갈대밭이라든지 수수밭이라든지 밀밭이라든지 대나무숲이라든지 …… 애틋한 서로가 몰래 만나 사랑꽃을 피우는 일이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디에나 흔해빠지도록 널린 모델에 방 하나 얻으면 그만인 사랑놀이입니다. 가까운 벗끼리 느릅나무 밑에서든 느티나무 밑에서든 미루나무 밑에서건 막걸리 사발 주고받는 조촐한 술잔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품앗이이든 울력이든 하지 않습니다. 도르리나 도리기란 잊힌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이 골목이나 숲속에서 놀지 않는다거나, 아이들 문화가 슬프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얄딱구리한 정치꾼이 아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입시지옥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고속도로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자동차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높은 건물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4대강사업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대통령을 뽑나요? 아이들이 교대나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되나요? 아이들이 체벌을 하나요? 아이들이 돈빨래를 하나요?

 모조리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습니다. 몽땅 어른들 말썽거리 때문에 아이들이 아파 합니다. 된통 어른들이 엉터리 바보 멍텅구리인 탓에 아이들이 놀이뿐 아니라 일하고 삶과 마음하고 믿음이랑 눈물에다가 웃음을 잃습니다.


.. 매리안은 그곳을 록사버슨이라고 불렀어. (매리안은 언제든지 모르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길 건너편에 있는 그곳은 그냥 흔한 바위언덕처럼 생긴 곳이었어. 모래와 바위가 있고, 낡은 나무 상자들이 조금 있고, 선인장과 덤불, 그리고 가시 많은 오코틸로가 자라고 있을 뿐이었지 ..  (6쪽)


 이제 ‘록사벅슨’에서 노는 어린이는 없다고 합니다. 록사벅슨에서 놀던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로 나왔다고 합니다. 도시 삶터에서 시골 록사벅슨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답니다.

 한국땅에서도 도시 삶터를 떠나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은 손에 꼽도록 드뭅니다. 드문드문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이 있으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도시는 사람이 꾸역꾸역 늘고, 시골은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게다가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 숫자는 크게 줄어듭니다.

 시골에서 사람들 숫자가 줄어드니까,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기 힘듭니다.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지 못하니까 ‘록사벅슨’처럼 ‘무너미마을’이나 ‘학다리마을’이나 ‘숯고개’나 ‘못고개’ 같은 놀이터가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다지만,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면서 ‘서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낼 마음’이 아닙니다. 저마다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뜻으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이 참 많으며 북적거리는 도시입니다만, 이 많은 사람이 서로서로 따사로이 어깨동무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돈다툼과 자리다툼을 할밖에 없습니다. 다들 말다툼과 성적다툼을 해야만 합니다. 도시에서조차 골목동네는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골목동네 값싼 땅과 집은 개발업자한테 통째로 팔려 비싼 땅 아파트로 다시 올려세우도록 떠밀립니다. 오순도순 고즈넉히 사귈 수 없는 도시 터전 사람들입니다. 알뜰살뜰 너나들이가 되어 가지 못하는 도시 터전 우리들이에요.

 아이들이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 놀이가 사라지기 앞서 어른들 놀이가 사라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 사랑과 믿음이 말라비틀어지기 앞서 어른들 사랑과 믿음이 벌써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음을 깊디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 말을 타면 바람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어. 말 타기에는 속도 제한이 없고, 꼭 길로 다닐 필요도 없었거든. 그저 긴 막대기 하나와 고삐로 쓸 끈 같은 것만 있으면 다가닥 다가닥 어디든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었지 ..  (22∼23쪽)


 딸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는 한편, 이듬해 2011년 봄에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갈 우리 식구 살림살이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인 저랑 아이 엄마인 옆지기는 어린 날 동네에서 신나게 놀던 일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손발에 곱게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언제라도 어렵잖이 떠올릴 만한 어릴 적 놀이요 삶이며 생각입니다. 이 어릴 적 발자국 또한 앞으로 쉰 해쯤 지나 “한국판 록사벅슨” 그림책으로 내놓아야 할까 모를 노릇인데,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무렵이든 충주 산골마을로 옮겨 살아가는 요즈음이든, 아이가 놀이동무를 마주하기는 퍽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마다 자동차로 꽉 찼으며, 시골에서는 너른 들판과 산자락마다 공장이 자꾸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동무를 사귀면서 놀 만한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며 ‘우리 아이들 나름대로 멋지게 이름붙이며 놀 록사벅슨’은 어디에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놀이터 록사벅슨은 박제가 되어야 할 유물이 아닌, 낡고 닳으며 새롭게 빛나는 구슬인데, 그저 ‘옛날엔 이랬단다(너희는 요로코롬 못 놀았지? 메롱!)’ 하고 노래하며 아이들 놀이터를 활짝 열어젖히지 않고 그림책만 쥐어 주는 이 나라 어른들 굴레가 이어지기만 할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바로 삶입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곧 내 삶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루하루 일구는 우리 삶입니다.


― 록사벅슨 (앨리스 맥레란 글,바바라 쿠니 그림,아기장수의 날개 옮김,고슴도치 펴냄,2005.6.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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