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霜의 미학, 미니멀리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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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霜의 미학, 미니멀리즘의 이해
  • 정민나
  • 승인 2019.05.0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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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이상은 실재와 비 실재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여 막다른 삶의 공간을 개방하였고 ‘속물근성 비판’, ‘무욕의 삶’ 추구 등 ‘축소의 미학’을 추구했다. 그를 아방가르드 시인, 자본주의적 가치에 저항하는 예술가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근대적 이성과 자아의 파편화를 침묵과 부재의 ‘미니멀리즘’ 기법을 통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매 순간 엄습하는 삶의 공허감과 자아의 해체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하였다.

미니멀리즘 논리 자체가 ‘더 작게’, ‘더 단순하게’라는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진 축소의 미적 형식이라는 점에 근거해 생활과 글 모두에서 가난과 단순함을 선택한 이상의 미학적 형식을 미니멀리즘 기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아래의 두 시는 공장에서 찍어낸 벽돌처럼 언어가 수평적 형태의 반복성을 드러내고 있다. 서사구조의 반복성과 불균형이 구축하는 세계는 단조롭고 간결함을 넘어서 무엇인가 빠진 듯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운명론적 세계관과 존재의 고독감을 표현함에 있어 정보를 많이 주지 않는 이야기 구조는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듯 마치 ‘자기 잠재성’의 원리를 탐구하거나 ‘자기 지시성’의 원리를 택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불분명 하고 이야기의 줄거리 역시 뚜렷하지 않다. 인과율이나 논리적 맥락에서 벗어나는 병렬법적 구문을 애용한다.

 
나의아버지가겨테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작고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
아버지가되니나는웨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웨드듸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이상,「烏瞰圖 詩 第二號」전문


 
위의 예문에서 현재의 나에 대응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는 가족 또는 가문의 차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의 구성에 있어 잘 짜여진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수와 묘사가 극히 한정적이고 플롯의 전개도 거의 없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 적이라 할 수 있다. 언어나 문장 구조까지도 해체시켜 모듈로 진행되는 연속성은 삼차원 공간의 ‘환영’을 거부한다. 이러한 역원근법 속에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사상가 플로렌스키는 예술작품에 반영된 세계의 형상을 원근법적 세계관에 기반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유클리드적 세계’와 역원근법적 세계관에 기반한 ‘비아리스토텔레스적’, ‘비유클리드적’ 세계 모델로 구분한다.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원근법’ 속에서는 기존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세계의 원칙이 지배하게 된다.

이 시는 작품 속 화자가 가문의 권위나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이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일련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단순 반복적 상황들과 모호한 관계는 이야기의 완전함에 있어서 불균형적인 구조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미장센에 초점을 두어 통일적인 하나의 시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내러티브의 종속적 배열보다는 병렬을 더 강조하고 있어 미니멀리즘 원리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미니멀리즘의 전통을 말레비치와 같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전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액션 페인팅’, ‘색면 추상’, 그리고 ‘팝 아트’의 특징들로 연결시키고 있다. 가령 앤디워홀의 영화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엠파이어>(1967)는 엠파이어 빌딩을 여덟 시간 동안 고정된 카메라를 설치하여 찍게 한 작품이다. 영화에 담기는 것은 시간 그 자체이다. 워홀은 영화제작 방식에 있어서 스스로의 개입을 최소화 하였는데 네러티브의 부재와 우연성으로 제작되는 구조영화 방식의 이러한 기법을 이상의 아래 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싸흠하는사람은즉싸흠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흠하는사람은싸흠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흠하는사람이싸흠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흠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흠하느것을구경하든지싸흠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흠하는구경을하든지싸흠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흠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흠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 이상, 「烏瞰圖 詩 第三號」 전문


 

이 시는 싸움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자체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 전체가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띄어쓰기를 거부하고 있는 이 텍스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싸움하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진술이다. 반복적으로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구조는 확정될 수 없는 의미의 지연으로 볼 수 있다. 끝없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이러한 언어유희 기법은 반복의 언어유희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지루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마치 결정적인 순간에 덧없이 끝나버리는 영화처럼 공허한 결말로 이어진다. 이 또한 이상의 염세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미니멀리즘 요소’라 할 수 있다.

 
긴 것
 
짧은 것
 

 
 X
 
그러나CROSS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 「 BOITEUX • BOITEUSE 」 부분

 

위의 시에서는 대상과 대상 사이, 혹은 여백으로 남겨둔 장면과 장면 사이 그것을 가로지르는 침묵의 단층들이 있다. 이 단층들은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형성한다. 작품 자체의 의미나 저자의 의도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를 읽는 감상자의 몫이다. 절름발이를 뜻하는 제목 BOITEUX나 BOITEUSE가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에 약간의 힌트를 줄 뿐이다. 이렇게 작가 이상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규칙으로 사물을 포착한다. 우리는 그 코드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묘사의 극소화, 배경의 극소화, 행동의 극소화를 통해 텍스트의 지시적 의미가 극도로 감소된 텍스트에 또 다른 미니멀리즘 시인 김종삼의 작품 ‘북치는 소년’이 있다. 이 시의 내용 없는 미니멀한 묘사와 서술에서 독자들은 제목과의 연상으로 ‘평화’와 ‘구원’이라는 의미를 읽어 낸다. 논리적 연결이 빈약한 미니멀리즘의 작품에서는 의미심장한 실제적 사건도 없고 지리적 배경, 시간적 배경에 대한 자각도 없다. 개인적 내력에 대한 느낌도,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는 인과성도 없다. 하지만 그 ‘없음’으로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침묵의 문학’, ‘부재의 문학’이라 알고 있다.
 
충분히 계발된 형식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문학양식이지만 1920~30년대 우리나라 이상의 작품에서 이미 표출되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문물의 변화기에 현실세계에 대한 ‘불쾌’, ‘모욕감’, ‘수치심’, ‘분노’ 등에서 나오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주제와 감정을 미니멀리즘 기법의 글쓰기로 표현하였다. 매 순간 엄습하는 삶의 공허감과 자아 해체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절박한 실존적 행위를 ‘금욕주의’란 형태로 표기한다. 그의 이러한 미학적 기법에서 미니멀리즘 요소의 공통되는 부분을 추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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