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 예술, 파동이 신체를 주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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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 예술, 파동이 신체를 주파한다
  • 정민나
  • 승인 2019.06.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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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환유적 시쓰기 - 정민나 / 시인



자신이 겪고 있다. 고통이 겪고 있고 책임자도 겪고 있다. 지방에서 겪고 있고 장례식에서도 겪고 있다. 포옹하면서 겪고 있고 식사하면서 겪고 있고 가장자리에서도 겪고 있다. 장엄한 물결 위에서 겪고 있고 온갖 오물들이 겪고 있다. 덩어리째 겪고 있다. 지푸라기도 겪고 있고 일찌감치 겪고 있다. 사랑하면서 겪고 있고 도망치면서 겪고 있다. 찬물에서 겪고 있고 망설이면서 겪고 있다. 헤어지면서 겪고 있고 최선의 방식으로 겪고 있다. 여행하면서 겪고 있고 어쩌다가 찍힌 사건에서도 겪고 있다. 분명히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거기서도 겪고 있다. 누가 겪고 있는가? 무엇이든 겪고 있고 검은 수면을 내려 보다가 겪고 있다. 처음 보는 물건이 겪고 있다.
 
- 김언, 「한계」 전문


 
김언은 위의 시 「한계」에서 근원이 되는 요소(나=자신)을 연속적으로 변주(책임자, 지푸라기, 처음보는 물건 등)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면적 자아로 복제한다. 인접성의 원리로 계속해서 건너뛰면서 경험적 주체의 다양한 목소리는 현현된다. 그리하여 감각이 교차 횡단하고 섞이면서 제 존재의 지평을 창조적으로 넓혀 나간다.
 
“주체에 관한 물음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앙리 메쇼닉은 말한다. 주체가 어떤 하나의 개념에 전적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단수가 감추어놓은 복수”의 주체들은 “적어도 열두 개에 이르는 주체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주체’, ‘심리적 주체’, ‘사물 인식의 주체’, ‘사물 지배의 주체’, ‘타자 인식의 주체’, ‘타자 지배의 주체’, ‘법의 주체’, ‘역사의 주체’, ‘행복의 주체’, ‘랑그의 화자(話者) 주체’, ‘디스쿠르의 주체’, ‘프로이트적 주체’가 존재한다고 매쇼닉은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체들 가운데 그 무엇도 시를 만들어내는 힘, 즉 ‘시적 주체’와 오롯이 포개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동력/무언가를 따르게 하는 힘’의 관점에서 ‘시적 주체’를 정의한다면, 우리는 ‘시적 주체’를, 시를 만들어내는 동력, 시를 고안해 내는 힘, 좀 더 그 의미를 확장하자면 역사 속에서, 우리 내면에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시를 고안하고 생성해내는 근원적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재룡은 매쇼닉이 구분한 열두 개의 주체, 그 어디에도 이와 같은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는 단일한 주체를 부정하고 확실성의 주체에 이의를 제기한다.
 
환유적 언술 형식으로 씌여지는 시들은 시인이 쓰고 싶은 것의 주변을 보여 주면서 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의 주변을 그려도 그 나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사물의 일부로서 관계있는 것들과 접속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링크된다는 것, 그것이 환유적 사고 체계이다.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시간과 공간, 심리적 인접성으로 인하여 시인의 사고가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환유의 사고체계는 그것과 닿아 있는 것만 골라서 간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재미와 흥미를 준다.

 
모 목장에서 양B로 오인받아 도살 당하는 양A
양B요! 배달된 양A를 보고 양B가 왔군 판매하는 식육점 주인.
양B로 알고 구매한 양A를 양B처럼 조리하는 요리사.
양A의 요리를 양B의 가격을 주고 먹는 손님.
굶주린 늑대가 얼룩말 떼를 습격할 때
같은 무리 발에 걸려 넘어지는 얼룩말.
집었던 콜라를 놓고 우유를 살 때 그 콜라.
어느 밤 트럭에 치여 즉사한 고양이.
어느 아침까지 계속 치이고 있는 고양이.
차창 밖으로 마주친 오줌 누던 개의 눈동자.
덜컹덜컹 시간 속으로 멀어지던 눈동자.
공터에 버려진 채 비를 맞는 소파.
오며 가며 아이들이 칼자국 내고
시청 다니는 늙은 자식이 오줌도 깔기는 소파.
버스 맨 뒷자리 아무렇게나 펼쳐진 신문.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되는대로 둘둘 말아 쥐고
바퀴벌레를 향해 내리치는 신문.
그 신문에 인쇄된 바퀴 벌레의 터진 비명.
 
- 황성희, 「개나리들의 장래 희망」, 『앨리스네 집』 중에서


 
위의 시에서 양과 얼룩말과 콜라와 고양이와 개와 소파와 신문은 정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상한 나라의 구성원들이다. 그들 중 하나가 하나의 거울상이라면, 어떤 게 정상이고 어떤 게 이상한지를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여기에 들끓는 어긋남이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왜곡한다. 혹은 은닉한다. 위의 시처럼 정상과 이상이 양파처럼 서로를 감싸는 겹 구조를 지니고 있는 시들이 황성희의 이 시집에서 많이 나온다. 권혁웅은 이를 “참말을 드러내기 위해 거짓말을 제출하는 이상한 나라의 발화”라고 하였다. 이는“정상적인 표면이 숨기고 있는 진정한 관계를 폭로하는 이상한 문법”이라고 하였다. 숭고한 것들이 증발하고 남은 현실이 누추하게 드러난다. 그것을 목도한 어법은 풍자와 조롱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자극을 동시에 둘 이상의 감각으로 느끼는 현상은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에 한정 시키지 않는 공감각의 능력이다.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기적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신체는 기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경계’ 혹은 ‘층리’들을 가진다. 감각은 그리하여 진동이다. 파동이 신체를 주파 한다. 감각은 유기적 활동의 경계를 잘라 버린다. 유기적 조직을 뛰어넘어 혼돈과 암흑 속에서 리듬의 통일성을 찾는 것, 이것이 위의 시를 읽는 원리로서 작동된다.
 
분별과유(有爲)의 방식으로 이해하면 사물은 이것(This)과 저것(That)으로 한정된다. 하이데거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일상의 이해 방식’에서 ‘경이의 이해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한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세상을 보는 네 눈을 바꾸라는 것이다. 자꾸 변하는 세상을 항상 그대로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관습적 사고방식으로 그 바탕에는 통제 지배력이 깔려 있다.

여기서 모든 괴로움이 발생한다. 주객이 공히 무너져야 경이로운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는 언어활동이 “훨씬 복잡하고도 다양한 체계 속에서 구동되며 시적 주체는 언어의 개별화의 문제 다시 말해 언어적 과정과 절차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조계종 포교사 대학원에서 간화선 강의를 하던 김홍근 선생님을 모시고 몇 분의 시인들과 함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그 때의 말씀으로 글을 맺는다.
 
나귀가 주체가 되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물이 주체가 되어 바라보는 것, 그럴 때 시인의 가치 판단은 자의식에 물들지 않게 된다. 우물은 가만히 있는데 그 속으로 구름도 비추고 나무도 비추고 해님도 그림자도 다 비추듯이, 인간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예술을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저 받아 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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