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청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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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청관거리
  • 조영옥
  • 승인 2019.10.1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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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회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앞 신작로는 볼거리가 항상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 문 밖을 내다보면 큰 책가방을 옆으로 메고 빨간 목수건을 목에 두른 까까머리, 중국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학교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이른 새벽, 멀리 주안에서부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 앞을 지나 시청을 거쳐 청관거리 끄트머리 언덕에는 벽돌로 지은 화교학교가 긴 담을 두르고 있었다. 화교학교가 인천에 한 곳 밖에 없고 대중교통도 없던 시대라 멀리 사방에서 걸어서 오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쯤이면 그 아이들도 다시 주안까지 걸어가느라 옆도 돌아보지 않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짓궂은 남자아이 눈에 중국아이들이 보였다. 그 아이는 중국 아이들을 놀려 댔다. “중국* 대가리 모모대가리 일전 줄게 때려 부셔라” 큰 소리로 그 아이는 노래를 부르며 약을 올렸다. 혀를 내밀고 놀리는 시늉을 하고 저희 집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면 중국아이들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쳐다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아이들 놀려 먹는 재미를 들인 그 아이는 몇 번을 그렇게 장난을 치고 숨어 버리곤 했다. 놀림을 당한 아이들은 이번에는 참지 않고 길에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고 끝까지 그 아이를 쫓아갔다. 그 아이는 날쌔게 뒷골목 길로 숨어들었다. 골목길에 서툰 중국아이들은 잔뜩 성이 나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을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며 그냥 돌아갔다. 어느 날도 개구쟁이 그 아이는 빡빡머리 중국 아이들을 보고 “중국* 대가리…” 하며 신이 나서 놀렸다. 중국아이들은 그냥 지나가는 척 하다가 획 돌아서더니 그 중 한 아이가 쫓아 왔다. 제법 키가 큰 학생이다. 재미가 난 듯이 약을 올리고 방심을 하고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서 있는 힘을 다해 뒷골목 길로 뛰어 들었다.
 
길에서 친구들하고 돌 붓으로 금을 긋고 땅 따먹기를 하며 놀던 우리들은 무서워서 한 쪽 옆으로 붙어 섰다. 골목길까지 쫓아오는 키 큰 학생을 이리저리 피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 아이는 남의 집 뒷문 고리를 붙잡고 뛰어 올라 뒷담에 붙어있던 그 집 변소 지붕으로 올라갔다. 숨이 턱에 닿도록 쫓아가서 멱살을 잡으려던 순간에 아이를 놓쳤다. 키 큰 학생은 한참을 노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돌덩이를 땅에 던져버리고 얼굴이 시뻘개져서 주먹을 쥐고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떠들면서 가버렸다. 짓궂은 아이가 붙잡혀서 혼이 날까봐 골목길 쪽을 흘끔거리며 서있던 우리는 그때서야 한 숨을 내 쉬고 놀이도 팽개치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한번 되게 혼이 난 그 아이는 다음부터는 중국 아이들을 놀리지 않았다.
 
인천항이 개항이 되고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은 부두에서 가까운 청관거리에 삶의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리는 어둡고 우중충했다. 집들은 기둥이 높은 석조건물 이층이고 창문마다 빨갛거나 짙은 청색 칠을 한 나무 덧문이 달려 있었다. 집 모양은 가운데는 마당으로 비워놓고 건물 가장자리를 죽 둘러서 방이 있었다. 이층에는 복도에 난간이 있어서 거기에 기대어 서서 마당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두꺼운 나무 대문은 검은색, 또는 금박이 박힌 한자(漢字)를 크게 써 넣은 붉은 종이가 마름모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없는 겨울날에는 가끔 대문을 열어 놓고 굵은 주름에 이가 빠져 합죽이가 된 얼굴을 한 노인네들이 대문 앞 계단에 죽 앉아서 볕 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지나가면 쳐다보고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떠들기도 했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때가 낀 두꺼운 솜옷을 들춰가며 이를 잡아 손톱으로 꾹 눌러서 피를 묻히기도 했다.
 
그들 앞을 지나려면 어릴 적 오빠가 읽다가 밀어 놓은 책에서 읽었던 무서운 내용이 떠올랐다. 깊은 산중 주막에서 사람을 잡아 만두를 만들어 먹고 팔기도 했었다는…
누가 뒤에서 머리채를 확 낚아채어 끌고 갈 것만 같아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아 조심스럽게 걸으면서도 열려있는 문틈으로 안마당을 훔쳐보기도 했다. 마당에는 알록달록한 붉은 옷을 입은 계집애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고 변발을 한 사내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농사를 짓는 화교들은 무척이나 근면했다. 신포동에 들어오는 채소에 칠팔십 퍼센트가 주안에 있는 땅을 임차해서 화교들이 농사를 지어 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농사를 전문적으로 잘 짓는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새벽이슬에 젖어가며 거둬들인 채소를 손수레에 산 같이 높이 싣고 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검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시내로 팔러 나갈 준비를 했다. 무게 중심이 뒤로 간 수레는 앞이 번쩍 들린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수레 앞으로 들어가서 손잡이에 양 손을 벌려 잡고 몸을 솟구쳐서 매달리며 발을 힘껏 내디뎌야 수레가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주안에서 신포동까지 오는 동안 식당마다 또는 여염집에 채소를 대어 주고 중앙동에 올 때 쯤이면 손수레는 바닥에 부스러기만 남았다. 채소를 다 팔고 한 낮이 된 그 때 땀으로 범벅이 된 그들은 쉬어 볼 틈도 없이 다시 밭으로 돌아가 채소를 돌보았다. 매일 아침, 가지, 기다란 청 호박, 가시가 박힌 오이, 부추, 감자 등 제철에 나는 싱싱한 채소를 상점까지 배달해주고 정직하게 거래하는 중국인들을 식당주인들은 반겨 기다렸다. 그들은 근면하게 농사를 지어 자본을 축적해서 인천 최고의 상권이던 신포시장에 점포를 하나 둘씩 마련했다. 대만이나 산동성에 근거가 있던 그들은 대만의 물건을 인천으로 들여오고 우리 물건을 대만으로 가져다가 파는 작은 화상(華商)으로 발전하며 넓고 깊게 삶의 뿌리를 내려갔다.
 
우리 집에서 신포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진*각이라고 하는 유명한 중국 음식점이 있었다. 주변에 인천우체국. 제일은행, 키네마, 동방극장 등이 밀집해있고 현금이 항상 흐르는 신포시장을 끼고 있는 목이 좋은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주변 직장인들로 앉을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서 먹어야 했다. 들리는 소리로는 하루에 밀가루를 열 포대가 넘게 소비한다고 했다. 밀가루 반죽을 어깨까지 치올렸다가 넓은 도마에 턱 떨어뜨릴 때마다 갈라지는 국수 가락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지금도 그 집에서 먹던 자장면, 짬뽕, 군만두 등의 맛을 떠올리면 군침이 돌고 혀는 어느새 입안을 한 바퀴 돈다. 때로는 아주 가끔 탕수육, 팔보채, 유산슬을 먹어 보기도 했다.
 
그 시대에 자장면은 입학이나 졸업식 때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가족이 모여 가끔 먹어보는 별식이었다. 구수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네 얇은 주머니를 열게 해서, 그들의 주머니는 불룩해졌지만 제한된 법규로 화교들의 재산은 여기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재산을 보호하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대만으로 많이 떠나기도 했다.
 
음력 명절이나 정월 대보름이 되면 그들은 특유의 전통적인 행사를 했다. 길거리가 요란하게 꽹과리를 울려대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무슨 볼거리인가 싶어 밖으로 나갔다. 붉은 천으로 만든 기다란 용의 탈과 사자탈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그 속에서 한 몸이 된 것처럼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다가 고개를 위로 쳐들고 꿈틀거리면 정말 용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 했다. 사자와 용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탈의 모습을 처음 본 동네아이들은 재미있고 신기해서 커다란 무리를 지어가는 그들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그들은 기다란 행렬을 이루며 시청 앞 길을 거쳐 청관 거리 끝에 있는 화교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가득모여 한 바탕 잔치를 벌이며 모두들 웃고 떠들어댔다. 지금 생각하니 타국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화교들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그런 행사를 자주 벌였던 것 같다.
 
오랜만에 하인천역에서 내려 나는 차이나타운을 둘러보았다.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거리는 많이 정비되어 있고, 삼국지를 연상케 하는 벽화가 죽 그려져 있어 중국 냄새를 물씬 풍긴다. 자장면의 역사를 말해주는 공화춘과 그 옆에 중화루 등 중국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서로 세(勢)를 과시 하고 있고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서너 집 건너 하나 씩 개성을 나타내며 카페거리를 이루고 있다.
 
어렸을 때 넓게만 느껴졌던 신작로는 동네 뒷길처럼 좁아보였다. 60여 년 전 묵직한 나무 대문에 짙은 청색 칠을 했던 집은 입구에 한 채만 보이고 석조기둥 높고 앞면에 베란다가 있던 이층 건물도 모습은 변했지만 골격과 앞 계단은 옛 모습을 지닌 채 홀로 남아있다. 계단에 나와 앉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던 이방인(異邦人)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버리고 여기가 조계지 구역이었다 것을 나타내는 돌 표지가 비석처럼 죽 늘어서서 개항기(開港期)에 벅찼던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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