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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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
  • 허회숙
  • 승인 2019.10.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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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허회숙 / 전 민주평통 인천부의장, 인천시의원
 


 

지난 6월 초 남해, 통영, 거제도 일원으로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얼마 전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 여행 후유증으로 두 달간 기력을 잃고 우울해 하자 딸애가 기획한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와 딸과 아들, 그리고 다섯 살짜리 친 손주만 데리고 떠났다.
 
딸과 아들이 결혼하여 우리 곁을 떠난 이래 우리 부부가 ‘빈 둥지’ 상태로 지내 온지도 19년이 흘렀다. 그동안 딸네, 아들네와 함께 온 가족이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매년 휴가철에 여행을 다니곤 했지만, 딸과 아들만 데리고 우리 부부가 여행한 것은 애들 결혼 이후 처음이어서 마음이 설레었다.

애들과 함께 한 가족여행은 아들이 진주에서 공군에 입대할 때가 마지막이었다. 아직 어린애 같기만 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부모의 아릿한 마음의 여행이어서 즐겁기 보다는 짠 한 추억이 더 많았다.

온종일 달려 진주 남강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노을빛에 붉게 물든 강물과 바람결에 서걱이는 갈대숲의 ‘솨아 ~’ 소리는 아직 헤어지지도 않은 아들에의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석양빛 속에 아름답게 저물어가는 남강을 내려다보며,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장어구이로 식사를 마친 후 진주성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일개 관기였던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바위 위로 유혹해 껴안은 채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던 바위와 촉석루, 논개사당을 둘러보았다. 그 당시 진주성의 함락을 막기 위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와 이름 없는 수많은 병사들, 그리고 사랑하는 님과 구국의 일념으로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기개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군에 입대하는 아들을 둔 이 나라의 부모들은 많은 생각에 젖을 것이다. 아들을 진주에서 입영시킨 후 세 식구만 귀향길에 올라 온양 온천에 들렀다. 그런데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남탕 문을 쓰윽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애가 그만 깜짝 놀라 내 옷깃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었다. 황당한 일을 벌린 것이었다. 그 일화는 두고두고 우리 가족들이 나의 정신없음을 놀릴 때 잘 쓰는 메뉴가 되었다.
 
아들의 입대를 위해 진주로 가족 여행을 한 지도 어언 25년이다. 그러구서 처음으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첫 번째로 들른 곳이 통영이었다.
흰 구름 두둥실 떠 있는 파아란 하늘과 그 하늘보다 더 푸르게 빛나는 바닷물 위로 케이불 카가 기분 좋은 유영을 한다. 산 정상에 오르니 밝은 햇살 속에 점점이 빛나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것이 대마도라고 한다. 어쩌면 이리도 평화롭고 아름다울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남해 바다의 경치 속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미로와도 같은 수로를 이용해 왜적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 이곳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통영시에서는 7년간의 임진왜란을 종식시키고 나라를 구한 성웅 이순신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시내 곳곳에 많은 역사적 기념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산책로를 걸어 ‘이순신 공원’에 도착했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대포와 역사적 사진자료들을 보며 5살짜리 손주에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옛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내로 돌아와 포구에 정박시켜 놓은 ‘거북선’ 모형 관람도 하면서 손주의 눈높이에 맞는 설명을 해 주려 애썼다.
 
25년 전의 가족여행도 임진왜란 당시의 유적지였는데, 이번 여행도 역시 임진왜란 전적지로 시작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숙명과도 같이 반복된 일본 침략과 항전의 흔적이 남해안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해질녘에 거제도에 도착하여 한화 리조트에 체크인 하였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 속에 빛나는 거제 앞바다의 석양은 25년 전 남강변의 석양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해변에 있는 횟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검은 돌들로 이루어진 몽돌해변으로 내려가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손주와 불꽃놀이를 하였다. 잠시나마 동심에 젖어본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틀 째 아침, 매미성 관람을 시작으로 바람의 언덕에서 풍차도 보고, 해금강 테마 박물관에도 들렀다. 박물관에는 수십 년 전 모두가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재현해 놓은 교실, 이발소, 술집 등과 그 당시의 사진, 선거 벽보, 반공 표어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옛날의 가난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되는 시간이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현재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요즈음 안보와 경제와 이념의 갈등으로 시끄러운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보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우려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두 아이들과 긴 시간을 함께 하며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동안 무기력하고 우울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력에 넘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작년 중반까지 현역처럼 활동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점차 중요하게 여기던 일들이 사라지고 나니, 어느 날부터인지 나의 존재감에 회의가 느껴지고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 나이에 아프리카 여행은 다소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여행이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의욕과 힘을 솟아나게 해 준 경험을 해 온 터여서 많은 망설임 속에서도 감행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 여행은 일정이 지나치게 빡빡하여 오히려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더구나 남편은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술을 많이 마시면서 조심성 없이 행동하여 내 마음을 졸이게 하였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원시의 자연 속에서 야생의 동물들과 사파리를 즐기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자 단행하였던 아프리카 여행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극심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 온 후 남편은 어려운 미션을 완수했다는 성취감에서였는지 오히려 기운이 넘쳐, 친구들과 국내 여행도 떠나고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두 달여 동안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우울 증세를 보이며 몸무게가 3kg이나 줄었다. 그러다가 딸의 배려로 오랜만에 함께 한 가족여행이 나에게 새로운 힘과 의욕을 되찾게 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모든 인생사가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딸, 아들과 남편이 한 목소리로 나에게 반론을 제기 하였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은 한 방향으로 갈 때 백보를 걸어 앞선 사람이나, 오십보를 걸어 뒤쳐진 사람이 다 거기가 거기라는 뜻인데, 인생의 길이란 모두가 제각기 다른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오십보백보를 갖다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방향이 제각기 다른 인생길을 걸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십보백보가 성립될 수 없다. 잘못된 전제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결론도 틀렸다는 것이다. 나의 무의식 속에는 내가 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고, 나는 인생에서 백보를 걸은 사람인데, 오십보 걸은 사람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허망함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력증에 빠지고 불안, 우울해 하는 모든 증세도 시작되었다는 지적이었다.

가족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오십보백보라고 할 때의 의미에 혼돈이 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을 한 방향의 잣대로만 재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공감이 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나 국가의 미래도 한 방향의 잣대로만 재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는 돈오頓悟의 경지에 이르러보려고 몰입한 상태로 이 화두를 붙잡고 고구考究해 본다. 그러나 역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고는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아직도 ‘오십보백보’의 참다운 의미가 무엇인지 확신이 없다. 그러나 삶의 자세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음과 충분한 힐링이 된 가족 여행에 감사한다.*



 

허회숙┃
인천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인천시의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인천부의장 역임. 『에세이포레』 등단(2018), 에세이포레운영이사. 수필집《칼국수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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